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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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쟝 바티스트 그르누이Jean-Baptiste Grenouille란 이름은 소설의 주인공으로 아주 제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르누이의 사전적 정의는 개구리frog를 뜻하는데 이 동물은 가끔 프랑스인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그 한 예로 아트 슈피겔만의 <쥐>에 보면 프랑스인을 개구리로 묘사하고 있다. 프랑스인 쥘 르나르는 <자연의 이야기>라는 책에서 개구리를 가만히 있을 때는 고요한 늪의 종기같고, 떠들때는 시끄러운 신문팔이처럼 뉴스를 소리쳐 알리는 동물이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벌레를 잡아먹으며 오직 사랑할 궁리만하는 짐승이며 낚시꾼을 괴롭히는 동물이라고 하였다. 자신의 동족인 프랑스인이 성향을 정확히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그의 이름 쟝 바티스트는 성서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보통 <세례자 요한>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극구 이를 부인한 인물이다. 그는 오직 자신의 뒤에 올 사람의 앞길을 준비하는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살로메의 유혹에 넘어간 헤로데의 명에 의해 참수되는 운명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이 두 이름을 무리하게 접합하면 메시아인것처럼 오해된 프랑스인 정도가 아닐까.

그르누이는 프랑스의 루이 15세 시절의 인물이다. 루이 15세(1715-1774)는 1726년부터 통치를 시작하였다. 앙드레 모로아는 <프랑스사>에서 그를 <연약하고 침울하며 비정하고 잔인했으며 소녀처럼 생긴 미남이었다. 성품이 비겁하고 게으르며 때로는 잔인한 만행을 저지르는 품이 꼭 루이 13세와 흡사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즉 신민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던 왕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1747년 다미앙이란 시종이 국왕에게 단도를 휘두르며 암살을 시도했을 때도 국왕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이 그르누이가 활약하던 시절이었다.  

그르누이는 후각이 아주 예민한 인물로 묘사된다.  인간의 오감 가운데 후각은 가장 빨리 피로를 느끼는 기관이다.  이런 사실은 이솝의 우화에 무두장이 이야기로 이미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후각은 어쩌면 천재성을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기에 순간적으로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하지만 그 흔적은 워낙 깊어 사람들은 그 깊이와 넓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깊이와 넓이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르누이의 후각은 동물적 천재성인 감각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는 당시 프랑스 사회가 이성의 물결 속으로 급속히 빨려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어쩌면 그르누이는 원시적 생명력을 가진 마지막 천재이자 예언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만나야 하듯 그의 원시적 생명력인 후각은 지세프 발디니와의 만남에서 서 극대화된다. 감각적 천재성과  이성의 만남은 발디니가 끊임없이 얻으려 노력하는 공식에 집약되어 있다. 즉 앞으로의 세계는 감각적 천재가 차지할 공간은 없는 것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계획되고 설계되는 공식의 세계인 것이다. 그르누이처럼 직감에 의존하는 천재의 시대-혹은 푸코가 말했던 광기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르누이는 한 곳에 머물수가 없다. 머문다는 것은 곧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르누이는 예수처럼 곳곳을 전전하며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전파한다. 그의 방식은 철저히 세례자 요한의 방식이다. 자신의 공을 뒤에 오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그럼에도 그르누이의 비극은 이미 예견되어 있다. 그는 메시아가 아니라 오직 그 메시아가 오는 길을 먼저 알려주는 전령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이름에서 이미 드러나 있는 셈이다. 그는 천재적 감각의 세계가 끝나고 합리적 질서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알려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위해 살로메 혹은 헤로데를 선택하는 일만이 남았다.  그것을 위해 그는 금단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순간 그의 천재성은 광기로 전이되어 버린다. 이제 천재성은 사라지고 광기만이 남을 때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프랑켄슈타인 뿐이다. 그리고 그는 왕을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이름이 운명을 결정한다면...

사실 그르누이의 후각은 어쩌면 당시 프랑스 사회를 암암리에 둘러싸고 있던 불온한 사상-지배자의 입장에서 볼 때-이 아닐까. 이 사상은 기존의 모든 질서를 서서히 질식시켜 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르누이가 살인을 저지를 때 교살을 택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교살을 통해 서서히 질식되어 가는 화석화된 프랑스 왕국도...  그르누이가 뿌려놓은 향의 냄새는 오래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인간의 뇌 속에 기억된 냄새는 일생을 간다.  그 원시적 감각의 냄새는 지금도 우리들의 뇌 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향수에 취해 상상을 하는 내가 본 그르누이의 세계이다.

+ R. I. P. 쟝 바티스트 그르누이Jean-Baptiste Grenouille 1738년 7월 17일- 1767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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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과 해독 - 고대 최강대국 히타이트, 100년 동안의 발견 이야기
C. W. 세람 지음, 오흥식 옮김 / 푸른역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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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55년에 출판된 히타이트에 관한 저술이다. 히타이트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라면 고대 최대의 전쟁이라고 알려진 <카데시 전투>가 유명하다.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간의 전투였다. 팔레스타인의 카데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이집트의 람세스는 무승부에 가까운 이 전투를 대승리로 과장하면서 역사 속의 히타이트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히타이트는 소아시아의 중앙부에 위치해있던 관계로 자신이 침략자가 되기도 했으며 또한 자신이 침략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민족이다. 하지만 역사상으로 이들은 침략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만큼 당시 이들의 군사력은 막강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히타이트인들은 철기와 전차와 말을 사용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세 가지 신병기를 이용해 강력한 군사적 제국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모습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길지 않다. 고대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사-보가즈쾨이-에서 발견된 점토판이 1917년에 해독됨으로서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토판의 해석으로 이들은 우리들이 단순하게 생각하던 무기를 든 무법자가 아니라 상당히 체계적인 질서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들은 이렇게 자신들만의 문화, 예술. 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우리들의 시야에서 멀어진 것은 그들의 등장 못지않게 퇴장 역시 순식간에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갑작스런 붕괴로 히타이트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들이 다시 역사 속에서 조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문자의 해독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떤 민족이라도 문자가 없을 경우 그 민족의 쇠퇴와 함게 역사 또한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준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히타이트는 문자가 남았고 이를 해독하면서 그 역사적 전모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런 연구의 결과로 자신의 발굴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히타이트학의 선구자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겸손을 보이고 있다. 이런 학문적 자세는 이 책이 오래된 것임에도 내용에 대한 신뢰심을 갖게한다.

고고학적 발굴로 알려진 사실은 히타이트가 문화뿐만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인 면에서도 바빌론이나 테베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 제국이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폭력에 의존하는 무자비한 제국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책은 해독학, 연대기, 사료비판이 어울어져 히타이트의 실체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시간적인 한계 때문에 이후에 나온 히타이트의 연구결과를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기는하다. 하지만 이후 쏟아져 나올 히타이트 연구의 촉매작용을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히타이트가 세람에 의해 소개된지 60년이 다되어가지만 히타이트는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고고학은 정말로 愚公移山의 정신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학문이란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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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
연민수 엮음 / 보고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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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3국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면 서로 유사한듯 하면서도 상이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흔히 한.중.일이란 집합적 단어로 세 나라의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에 더 많은 무게를 싣는다. 하지만 각 국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 전개과정 속에서 역사적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우리들은 인종적, 언어적 측면에서 중국과 일본 가운데 어느쪽이 우리와 유사한가를 묻는다면 일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한일의 관계는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만큼이나 상이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일본이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일본의 역사가 우리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는 막연한 감정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적 견해는 중국과 우리의 관계를 보면 무색해진다. 사실 우리의 역사는 시작부터 일본보다는 중국과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 밀접함은 도가 지나쳐 우리의 선조들은 우리의 땅을  <小中華>로 부를 정도였다.

일본 역시 역사의 형성기에  대륙으로부터 많은 문명을 전해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전해지는 도식적인 설명을 일본은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경우하는 문화를 선택하기 보다는 중국으로부터 혹은 남쪽의 해양문화로부터 직접 문명을 전수받았다는 어려운 길을 택한다. 이는 일본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일본은 자신들의 모습을 해양문명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일본적 문화의 특질은 한국과 중국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대륙적 문명과는 아주 판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일본은 자신들 스스로 한국과 중국이라는 탯줄 대신 남쪽의 해양문명의 밧줄을 부여 잡았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성격은 신화에서부터 아주 판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종교관이라든가 윤리관 역시 대륙적 기질과는 거리가 있다. 이들의 윤리관은 아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강력한 무가문화로 제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무가적 특성은 한국과 중국에서는 그리 활발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이와 유사한 것을 들자면 중국에서는 협객의 문화가 있고, 한국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어떤 개념도 찾아볼 수 없다. 중국 역시 이 협객의 문화는 주류가 아니라 주변부의 문화였다. 하지만 일본만은 무가의 문화가 주류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특징만 보더라도 일본의 문화는 한국과 중국의 문화와는 아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겠다.

일본의 무가문화는 루스 베테딕트 여사가 저술한 <국화와 칼>이라는 저서에서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다만 베네딕트 여사가 다룬 것은 인류학적 측면에서 접근한 일본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무가문화의 성숙을 위해서 특이한 과정을 밟았다는 점이다. 일본은 무가문화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유학을 선택하기 보다는 불교의 선종계통을 수용하였다는 점이다. 선과 다도와같은 내면의 성숙을 위한 외적인 형식에 치중하는 무가문화는 일본 문화의 한 특질이 되어 버렸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통일국가를 이루면서 선종적인 이념으로는 국가를 다스릴 수 없음을 깨닫고 그때서야 조선을 통해 퇴계학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이 퇴계학을 기반으로 중국에서 받아들인  양명학과 조화를 통해  일본적인 국학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상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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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유럽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
조셉 폰타나 지음, 김원중 옮김 / 새물결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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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유럽이란 책은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나>라는 26권에 이르는 방대한 총서의 서두에 해당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유럽의 다양한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거울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비추는 것 같지만 거울의 상은 허상이란 사실이다. 거울 앞에서 왼손이나 오른손을 들어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거울은 결코 대각선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바로 좌우가 뒤바뀐 모습이 바로 거울인 것이다. 그리고 거울은 입사각과 반사각에 따라 저쪽편을 볼 수 있다. 즉 거울을 통해서보는 세계는 일직선의 세계인 것이다.  이런 우리의 편식을 바로잡기 위해 조셉 폰타나는 자신의 유럽을 거울 앞에 세우고 그 좌우가 바뀌어 이해되는 유럽을 우리가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울과 폰타나의 거울을 90도가 되도록 붙여놓고 유럽을 바라보면 그동안 바뀐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왔던 유럽의 모습과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실감나가 다가올 것이다.

유럽 스스로 자신을 세계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유럽이 오래전부터 세계의 주체로서 활동해 왔다고 믿고 있다. 이런 믿음을 갖게된 것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진출이라는 사건에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은 언제나 자신이 아시아, 아프리카와 함께 세계의 삼분의 일에 불과하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유럽은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게르만의 전통이 강했다는 사실이다. 이 변방의 문화는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면서 더욱 뚜렷이 드러났는데 그것이 바로 중세이다.  중세는 유럽이 로마라는 허상 위에 세운 가상의 단일한 왕국이었다. 하지만 결코 중세가 끝날때까지 아니 현재까지 유럽이 단일한 제국이 되어본 적은 없다. 반면에 그리스권에 속한 동쪽의 로마는 서쪽의 로마가 붕괴되고도 무려 1천년 이상을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동로마제국은 역사 속에서 로마제국을 이어받은 제국이었다. 로마적 다양성과 포용성은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쪽의 유럽을 그리스. 로마적인 전통의 틀 속에서 이해하려 하였다. 물론 이런 사고방식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유럽의 모습을 파악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또한 유럽의 한 특징으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라는 교리적 측면에서의 종교가 유럽에서 존재한 적이 없다. 물론 너무 과격한 단정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유럽이 아프리카의 노예를 거래하고, 남아메리카에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학대한 것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이들에게 신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것은 평등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의 왕국은 이교도를 제압하고 그들을 밟고 올라서는 가운데 형성되는 자신들만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사실 유럽은 인디오들의 영혼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그들의 땅 속 깊이 숨겨져 있던 금과 은이었다. 이러한 결론은 유럽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구분지어왔던 야만과 문명의 어설픈 구분으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는 그들의 저서를 통해서 유럽이란 세계를 변방의 세계와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들이 본 세계는 자신들의 관습과 다른 세계는 이상한 세계이며 야만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런 그리스. 로마적인 사고방식은 로마가 망한 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오히려 그 구분은 더욱더 강화됨으로서 유럽은 하나의 체계 즉 봉건제를 근간으로 하는 또 다른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즉 유럽은 팔레스티나에서 발생한 하층민의 종교를 부자와 상인들의 종교를 거쳐 제국의 종교로 변모시키면서 완벽하게 유럽의 종교로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봉건제의 특징은 모든 것을 구분 하는 체제란 사실이다. 세계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구분하는 봉건제도의 위계제도는 세계로 뻗어나갈 때 야만과 문명의 구분에 그대로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봉건제가 계서제를 기반으로 이뤄졌기에 필연적인 것이었다. 야만은 지배받아야만 하는 부류, 문명은 지배를 해야만 하는 부류. 이렇게 자연스런 구분으로 인해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신들 스스로 문명의 편에 서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 역설의 유럽사를 폰타나는 다시 비춰보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봉건제도는 지중해 중심에서 대양으로 퍼져나가면서 제국주의로 발전하게된다. 그 발전의 토대는 봉건제도 속에 온전하게 잠재해 있었다. 길드라든가 장인제도의 계서제는 물론이고 종교에서 조차 위계질서에 입각한 체제를 구성했다는 사실은 유럽의 봉건제가 얼마나 계서라는 체제에 집착했는지를 알수있다. 이 위계질서는 교회와 권력이 최상의 위치에 위치하려 할 때 증폭되었다.

문제는 이런 유럽이 현대에 와서도 변모했는가하는 것이다. 대답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연장이란 관점에서 볼 때 유럽은 아직도 중세적인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달콤하고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포장되어 있는데 바로 전통이라는 것이다. 전통적 질서가 강한 사회일수록 계서제의 흔적이 깊게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거울에 비친 유럽은 진보의 사회가 아니라 연장된 중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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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소외집단 - 서양 중세사 총서 3
제프리 리처즈 지음 / 느티나무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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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부제가 섹스. 일탈. 저주라고 되어 있다. 이 세 단어는 중세인들이 자신들과 다른 집단의 존재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중세의 소외는 산업혁명 이후 맑스가 언급한 소외와는 약간 다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중세는 장원중심의 세계였다. 장원은 어느 정도 자급자족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고, 여기에 속한 자유민과 농노들은 영주의 보호 아래 있었다. 자유민들은 이동의 자유가 있었지만 자신들의 토지가 장원 내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고 떠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농노는 애초부터 영주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그곳을 떠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렇게 농업을 기반으로 한 장원경제하에서 그 공동체를 벗어난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중세 초기 가장 무서운 형벌은 공동체로부터 추방이었다. 추방을 당한 자들은 중세의 질서 속에서 제외된 것이기에 모든 것에서 예외로 인정되었다. 공동체로부터 격리된 상태가 바로 중세의 소외인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집단은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중세는 서기 1000년을 기준으로 크게 술렁이게 된다. 이른바 천년왕국이 도래한다는 소문이 온 유럽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을 통제할 수 있었던 권력기관은 당시로서는교회가 유일하였다. 일반 세속권력이 교회의 역할을 대체한 것은 12세기에 들어와서였다. 그러기에 중세 천년의 시작에서 혼란을 수습할 권력은 교회였다. 바로 교회의 기준에 따라 중세시대의 소외집단이 분류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집단의 성격을 자세히보면 정치적인 성격을 띤 집단이 전무하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중세는 어찌보면 교회에 의한 윤리적인 제국을 건설하려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 윤리적인 면은 하나의 질서로 변하고 그 질서에서 벗어난자를 교회는 사회 밖으로 격리시켰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격리되어야할 집단은 종교적인 부류와 성적인 부류로 대별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중세의 근간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협하는 이단자와 마녀는 철저히 색출되어 처벌되었다. 이들은 종교를 부정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영원한 지옥의 불에서 고통을 받아야할 죄인들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못박은 죄를 저지른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의 희생양이었다. 이들은 중세 기독교 유럽에서 아무런 신분적 법적 보장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다른 부류와는 달리 자신들이 스스로 격리를 택하였다. 창녀와 동성애자들 특히 동성애자들은 저주를 받아야만 하는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이는 신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 나병환자가 소외집단에 포함된 것은 성서에 근거한 것이었다. 구약에 나타난 부정한 개념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병은 신의 뜻을 거슬른 자에게 내려지는 징벌로 이해되었는데 이는 구약에서 모세의 동생인 미리암의 예에서 잘 드러난다.  

이 책은 미셀 푸코가 관심을 기울인 권력이 어떻게 소외집단을 이용해 강화되는가를 보여준 것에 대한 중세적인 해설서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다양한 예를 통해 중세의 소외집단을 통해 교회권력과 국가권력이 강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의 질서를 확립하여 지배체제를 공고히하기 위해 교회와 국가의 결합이 인간 자유에 대하여 어떤 구속을 가져오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소외집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외집단을 통해 정상적인 사람들이 권력에 의해 통제되어 가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법은 결코 어떤 특정집단만을 향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만들어진 법은 만민의 주위를 배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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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1-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은 결코 어떤 특정집단만을 향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만들어진 법은 만민의 주위를 배회하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대목이 참 인상적인 리뷰임다^^

dohyosae 2005-01-24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쑥쓰럽네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