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 서양고중세사 깊이읽기
윌리엄 레너드 랭어 엮음, 박상익 옮김 / 푸른역사 / 200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라... 영웅의 시대에서 광기로 끝을 맺는 이 책의 역사는 한마디로 서구 영웅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돈키호테까지의 역사는 서구의 열등감이 끝나는 시기라는것이다. 돈키호테로 표상되는 기사도 세계의 종말과 세르반테스가 참가한 레판토해전의 역사는 서구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기사도의 종말은 일대일로 맞부딪혀 싸우는 용기라는 것이 사라지고 전술과 전략에 의한 대량학살시대가 개막되었음을 알려주는 서막이었다. 그리고 레판토해전은 아랍 세계에 대한 유럽의 우위가 실제로 완수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호메로스는 서사시의 작가라기 보다는 헬라스의 팽창을 옹호하는 작가였다.  그리스 신화에 나타나는 영웅담-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이아손 등등-은 인근 부족에 대한 침략의 역사를 미화한 이야기일 뿐이다. 거기서 파생된 수많은 일화들은 얼마나 이들 영웅들이 잔인하게 이웃을 정복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이렇게 시작된 서구의 역사는 끊임없는 침략의 역사였다. 여기에는 경제-노예상인 티모테오스의 생애-와 종교-위대한 신앙 해석자 바울의 명예회복-가 포함된다.  여기서 야만족이 중세를 열었지만 위대한 샤를마뉴가 다시 유럽을 통합함으로서 단절되었던 영광은 지속적으로 연결된다. 이들 중세의 제왕들은 자신의 업적을 항상 이스칸더-알렉산더-와 비교함으로서 자신들의 위치가 그리스의 신화세계로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유럽의 세계는 지중해라는 자신들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서도 지중해의 끝인 두 기둥-지브로울터 해협-을 벗어나 울티마 툴레까지가본 인간은 헤라클레스 정도였다. 그만큼 유럽인들에게 있어 지중해는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면서 자신들을 묶어두는 사슬이었다. 그러기에 엔리케 왕자가 선단을 편성하여 해안을 바라보며 아프리카까지 나아갔을 때 유럽은 새로운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이후 유럽의 활동무대는 지중해가 아니라 대서양-정확하게 말하면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항로-의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유럽은 아프리카에 이미 먼저 뿌리를 내리고 있던 이슬람세계와의 최후의 결전을 벌여야만 했다. 여기서 유럽이 패하였다면 세계의 역사는 지금과 전혀 다르게 기술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은 승리를 하고 아프리카에서 이슬람의 확장은 사하라 사막 언저리에서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유럽은 중세와 근세의 갈림길에서 자신을 새롭게 점검할 시간이 도래하였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로 대표되는 인문주의자들은 대중에게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철저히 궁중문화에 바탕을 둔 부르조아 지식인이었다. 결국 유럽은 귀족의 통치에서 부르조아의 통치로 바뀌는 결과만을 경험하였다. 귀족의 유럽과 부르조아의 유럽은 어느것이 더 나은가를 판단할 기준은 없다. 다만 먼 훗날 아프리카의 콩고라는 거대한 땅이 벨기에의 레오폴드 국왕 개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벨기에의 식민지로 변환되면서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착취가 제도의 착취로 변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유럽이 갈등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한 주체로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하층민들이 제외되었기 때문이었다.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의 역사는 다수가 어떻게 소수의 지배속으로 들어가는 가를 보여주는 영웅담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역사가 한 영웅에 의해서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다수의 대중에 의해서 성취되느냐의 이야기 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책은 유럽 중심의 역사관이 말하 는 한계를 느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럽의 음식문화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3
맛시모 몬타나리 지음, 주경철 옮김 / 새물결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시리즈 3번째 권으로 음식에 관한 유럽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유럽이란 세계가 강력한 신분제 위에서 구축된 세계임을 잘 알고 있다. 이 신분제는 의복에서부터 건축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규제되고 있다. 심지어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에서 조차 신분적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언어적인 구분은 지금도 유효하게 살아있다. 이렇게 각 계층 사이를 구분하는 인위적인 벽은 지금도 알게 모르게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유럽의 음식문화 역시 이런 분위기속에서 발전해 왔다는 점이다. 중세시대 각 민족마다 독특한 음식체계가 있지만 기본적인 사상은 고정되어 있었다. 신분에 따라 귀족은 육식을 농민은 채식을 먹고, 농민은  땅속에서 자라는 식물의 구근을 귀족은  땅 위에서 자라는 식물의 열매를 먹었다. 그리고 육류도 귀족들은 대체로 살아있는 짐승을 사냥한 것을 선호한 반면 농민들은 돼지 하나로 만족하여야만 했다.  이런 자잘한 규제는 오로지 신분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를 위해 교회는 기독교적 질서와 혼합된 신분제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교회는 성서를 인용하여 <지체마다 역할이 다르듯이  인간 역시 신분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르다>는 가르침을 통해 신분제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신적 질서의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귀족이 먹는 음식을 함부로 섭취하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단순한 밀렵자로 볼 수 밖에 없는 로빈 훗 일당이 셔우드 숲에서 사슴을 함부로 잡아 먹는 행위가 왜 당시의 권력자들이 위험시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행한 죄는 절도가 아니라 체제를 위협하는 반역죄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중세 유럽의 귀족들이  향신료를 많이 사용한 것은 고기를 보관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한 맛을 상쇄하기 위한 것이란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비싼 향신료를 사용한 귀족들은 신선한 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예를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역사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측면에서 한번쯤은 새롭게 생각해 봐야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고기의 자유로운 유통은 기후라는 가장 큰 적을 타개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당시 유럽의 기술적 수준으로 볼 때 가공된 육류의 유통은 염장법에 의해 가능하였지만 고기의 질은 저하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가 말한 살아있는 가축을 몰고 와서 그 자리에서 잡아 신선한 고기를 제공하였다는 것 역시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하지만  정복왕 윌리엄의 법에는 도시-즉 성안-에서 허가받지 않은 자가 고기를 도축하여 파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조항이 있는데 이는 고기의 유통이 허가된 자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농민이 직접 고기를 팔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주목해 봐야할 것은 육식을 먹는 지배자인 귀족과 채식을 먹는 피지배자인  농민이란 관점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유럽이 대항해 시대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팽창하면서 원주민들의 음식습관에 유의하였다는 점이다. 유럽인들이  원주민들과 처음 상면하였을 때 대부분 채식위주의 식사를 하던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유럽의 침략자들은 자신들보다 못한 지위에 있는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즉 육류를 섭취하는 자신들은 이들 원주민들보다 신분이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미리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 속에서  다른 민족들의 다양한 문화적 우월성은 보이지 않게되고 오직 겉으로 드러난 음식문화를 통해 지배와 피지배를 적용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유럽의 왜곡은  제3세계 국가군들이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개발을 시작하면서 맹목적으로 유럽을 추종하였다는 점이다. 이 추종의 한 부분에는 식탁의 메뉴도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그 파장의 효과를 짐작할 수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냐 2005-02-08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빈훗의 사례가 새삼 흥미롭네요. 못된 전통은 정말 끈질기다는 생각도 듭니다.
 
천황을 알면 일본이 보인다 - 문고판
사이카와 마코토 지음, 조양욱 옮김 / 다락원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이책은 천황제라는 일본의 제도를 법제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즉 일본의 법이 어떻게 변천해가느냐를 따라가면서 천황제 역시 어떻게 변모해가는가를 추적한 책이라 하겠다. 법이란 고정불변의 법칙은 아니다. 법이란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모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법의 정신은 한결같지만 그 정신을 표현하는 문자는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일본의 천황제 역시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제도를 도입하여 성립된 고대 일본은 자신들을 중국이 중심이된 동아시아의 질서체제속에 자신들을 편입시킬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만약 이때 일본이 중국의 질서체제속에 편입되었다면 천황제 역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중국이 중심이된 질서체제속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는 당시 일본의 항해술이라든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볼 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자신들의 최대의 후원자였던 한반도의 백제가 멸망하고 자신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신라가 통일세력으로 나타남으로서 일본은 한반도를 통한 선진문물의 수입이 곤란하게 되었다. 이 결과 일본은 필사적으로 견수사와 견당사를 파견하여 중국과의 직접적인 통로를 개척하려 하였다. 하지만 역사의 사실에서 볼 때 이는 명백한 실패였다. 결국 이런 사정으로 일본은 고대 동아시아 질서속에서 고립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이미 받아들였던 중국의 제도를 끊임없이 변형시켜 나가면서 시대에 적응하였다. 이를 좀 심하게 말한다면 일본은 唐의 시대에 머물러있던 법률적으로 정체된 국가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한반도의 신라, 고려, 조선은 당률, 대명률과 같은 중국의 법률을 받아들여 결국 자신들의 법률인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되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일본은 고대 국가를 형성한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국가였던 것이다. 이는 이들의 고립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일본이 선택하는 길은 가지고 있는 법령을 통해 자신들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 우선 중국의 모든 제도를 자신들의 체제에 적용시켜야만 했다. 천자의 대응으로 천황을 내세웠다. 하지만 하나 곤란한 점은 천명사상에 의한 왕조의 교체는 일본적 상황에서 너무 위험한 발상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왕조교체사상을 거부하였다.  이는 고대국가 초기 소가蘇我씨가 전횡을 하는 과정에서도 천황의 지위를 건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웅변해준다. 이제 일본은 정권은 바뀌어도 천황은 언제나 존재하는 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제조건에 대한 반대급부로  천황은 정치적인 질서에서 배제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무가질서를 배제하고 명치유신이후 일본은 다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율령체제로 복귀하면서 근대적 질서에서 다시 고대적 질서로 되돌아 갔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이런 율령적 정치체제는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이차세계대전 패망 이후 미국에 의해 강제로 새로운 헌법을 갖게되면서 고대의 율령국가의 틀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천황제에 대하여 16세기 일본에 입국한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놓았다. <일본의 국왕은 황제에 상당하는 이름을 여러가지 쓰고 있으나 중국인들은 이를 비웃는다. 그 이유는 중국의 국왕은 중국 안팎에 왕의 칭호를 가진 자 여럿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그야말로 황제이지만, 일본의 국왕은 그와같은 왕을 거느리고 있지 않으니까 그저 국왕이지 황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일본의 통치체제를 어떻게 주변의 국가들이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어찌보면 일본의 천황제는 고립에 의한 산물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史記本紀 까치동양학 22
사마천 지음 / 까치 / 199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는 태도는 역사자료를 선택취사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사마천은 방대한 사기를 저술하면서 당시까지 전해져오던 역사저술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였다. 정부소유의 문서는 물론이고 이전시대의 공문서 또한 독파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마천은 방대한 자료에 질식함몰되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자료의 인용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런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오제본기>이다. 그러므로 본기를 읽음으로서 사마천의 역사인식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마천은 오제본기를 기술하면서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통용되어오던 오제의 실체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황제의 후손이라는 통념을 비판적으로 숙고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오제본기를 기록하고 말미에 사마천은 <尙書는 요 이후만 기록하고 있음>을 들어 아무리 많은 자료들이 있다하더라도 이를 잘 상고해 보아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많은 자료를 검토한 결과 <그 가운데 비교적 전아하고 합리적인 것을 골라 본문을 저술>했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 자신이 실제로 답사하여 듣고 본 것을 기록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인물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는 항상 분별이 있고, 한 인물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한 인물이 역사상 아주 폭군으로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하더라도 그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적당한 평가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진시황본기에 보면 진시황을 呂政이라고 부르고, 재위 37년동안 폭정을 행한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政令을 만들어 후대왕들에게 전해준 역사적 사실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漢의 劉邦과 패권을 다투었던 覇楚王 項羽를 당당히 황제들의 자리인 본기에 집어넣었다는 점이다. 이는 항우가 제왕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천하를 분할하여 왕과 후를 봉하고 정령을 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진의 폭정에 항거하여 최초의 농민반란을 일으킨 진승을 世家에 집어넣은 것과 비교가 된다. 그것은 진승이 왕으로 행세를 했지만 진의 황제가 여전히 제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사마천은 역사의 기록을 남김에 있어 공평무사한 필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마천은 이 방대한 저서를 저술하면서 한자의 특성을 적절히 살려 아주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필요하다면 그 당대에 사용되던 일반인들의 소박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함으로서 글 전체의 사실성이 돋보이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를 저술하는 것은 사명이었지 곡학아세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는 곳이 당시 황제였던 무제시대의 정치현실을 추호의 보류도 없이 폭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제국은 정치적 안정을 기초로하여 무리한 확장정책을 실시함으로서 문경지치로 안정을 이루었던 백성들의 삶을 다시금 전쟁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런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가혹한 세금정책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사마천은 이런 것들을 가감없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이것을 잘 알아보려면 평준서와 혹리열전을 참조할 것).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본기 곳곳에 드러나는 정확하게 꾀뚤어 보고 있는 사마천의 혜안을 보면서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칼잡이들의 이야기 보르헤스 전집 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외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르헤스의 상상력은 언제나 현실과 접목되어 있다. 그 접목은 역사적 관계이다. 케네디를 추모하며라는 단편에 보이는 한 발의 총알의 역사는 아주 짧은 분량임에도 창세기의 카인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인류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단편을 읽어보고 뒤에서부터 다시 읽어나갔을 때 명료하게 드러나는 살인의 이야기는 카인이 아벨을 죽인 돌멩이에서부터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살인의 행위는 돌멩이에서 소크라테스의 독배로 예수를 찌른 창촉으로 총알로 바뀌어 가지만 그 행위는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이런 보르헤스의 관점은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온다는 일반적인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의 연속성이란 과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보르헤스의 단절된 역사관은 매우 혼란스럽게 보인다. 그럼에도 그의 역사관은 아주 익숙하게 보여진다. 왜냐하면 윤회관과 유사한 방식이기 때문일까. 다시 케네디를 추모하는 단편으로 돌아가서 윤회관을 반영해 본다면 더 그럴듯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전생에 카인이 던진 돌멩이였고, 예수를 찌를 창촉이었으며, 여왕을 죽인 세모꼴 칼이었고...결국은 케네디를 죽인 총알로 태어나 여기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의 세계는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대화속의 대화로 들어가면 다시 보르헤스의 미로속에서 방황한다. 작자와 마세도니오스가 영혼은 불멸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한다. 이때 저자는 이 대화를 지속하기 위해 자살하자고 제안하는데 이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인가. 영혼이 불멸이라면 죽음자체도 불멸이고 그들의 대화는 끊임없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영원의 불멸성에 참여하지 못한 늙은 작가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기억이라는 또 다른 영원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천국XXXI,108에서는 케네디를 죽인 총탄과 유사한 세계가 제시된다. 다만 여기서는 신의 모습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천국은 금고의 비밀번호처럼 하나의 암호문으로 대치되어 있다. 이것은 기억이라는 것과 연관되는데 기억속에서 천국의 번호를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으면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 생각난다. <아마 이 책은, 자기 스스로 이 책 속에 표현된 생각이나 적어도 그와 유사한 생각을 이미 했던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해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보르헤스의 환상과 상상력이 부러울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