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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本紀 ㅣ 까치동양학 22
사마천 지음 / 까치 / 1994년 3월
평점 :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는 태도는 역사자료를 선택취사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사마천은 방대한 사기를 저술하면서 당시까지 전해져오던 역사저술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였다. 정부소유의 문서는 물론이고 이전시대의 공문서 또한 독파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마천은 방대한 자료에 질식함몰되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자료의 인용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런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오제본기>이다. 그러므로 본기를 읽음으로서 사마천의 역사인식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마천은 오제본기를 기술하면서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통용되어오던 오제의 실체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황제의 후손이라는 통념을 비판적으로 숙고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오제본기를 기록하고 말미에 사마천은 <尙書는 요 이후만 기록하고 있음>을 들어 아무리 많은 자료들이 있다하더라도 이를 잘 상고해 보아야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많은 자료를 검토한 결과 <그 가운데 비교적 전아하고 합리적인 것을 골라 본문을 저술>했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 자신이 실제로 답사하여 듣고 본 것을 기록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인물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는 항상 분별이 있고, 한 인물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한 인물이 역사상 아주 폭군으로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하더라도 그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적당한 평가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진시황본기에 보면 진시황을 呂政이라고 부르고, 재위 37년동안 폭정을 행한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政令을 만들어 후대왕들에게 전해준 역사적 사실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漢의 劉邦과 패권을 다투었던 覇楚王 項羽를 당당히 황제들의 자리인 본기에 집어넣었다는 점이다. 이는 항우가 제왕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천하를 분할하여 왕과 후를 봉하고 정령을 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진의 폭정에 항거하여 최초의 농민반란을 일으킨 진승을 世家에 집어넣은 것과 비교가 된다. 그것은 진승이 왕으로 행세를 했지만 진의 황제가 여전히 제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사마천은 역사의 기록을 남김에 있어 공평무사한 필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마천은 이 방대한 저서를 저술하면서 한자의 특성을 적절히 살려 아주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필요하다면 그 당대에 사용되던 일반인들의 소박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함으로서 글 전체의 사실성이 돋보이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를 저술하는 것은 사명이었지 곡학아세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는 곳이 당시 황제였던 무제시대의 정치현실을 추호의 보류도 없이 폭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제국은 정치적 안정을 기초로하여 무리한 확장정책을 실시함으로서 문경지치로 안정을 이루었던 백성들의 삶을 다시금 전쟁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런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가혹한 세금정책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사마천은 이런 것들을 가감없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이것을 잘 알아보려면 평준서와 혹리열전을 참조할 것).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본기 곳곳에 드러나는 정확하게 꾀뚤어 보고 있는 사마천의 혜안을 보면서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