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의 역사 대원동서문화총서 10
막스디몬트 / 대원사 / 199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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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역자가 서문에서 밝힌대로 미완성의 번역본이다. 유대의 역사를 기술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고대의부분을 생략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략 반의 분량을 번역한 이 책은 독자들이 가장 흥미를 보이는 르네상스 이후 유대인 박해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 유대민족의 형성이라든가 그 고유의 종교와 선민의식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고대사를 필히 알아야만 한다. 유대민족은 팔레스티나에 살고있지만 그곳의 선주민은 성서에 블레셋인이라 불리우는 팔레스타인 민족이다. 유대민족은 이곳에 뒤늦게 들어와 선주민인 블레셋인과 치열한 투쟁 끝에 어렵게 이 지역의 일부를 장악할 수 있었다. 실제로 성서에 근거한 역사를 살펴보면 블레셋인들은 비옥한 해안지방을 유대민족은 척박한 산악지역에 근거하였음을 알 수있다. 이는 유대민족이 블레셋인의 무력에 눌려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민족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토의 문제보다 종교의 문제였다. 그들은 남의 땅에 들어와 빌붙어 사는 처지였기 때문에 문화적 종교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아야만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블레셋인들이 숭배했던 바알신의 문제였다. 사실 바알신은 그 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선진적인 종교의 한 형태였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유대민족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신을 떠나 바알신에게 많이 경도되어갔던 것이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바알과의 대대적인 투쟁에 나서게 되고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일정한 정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즉 이스라엘민족은 이 지역의 다신교적 문화에서 일신교적 고립으로 자신들의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지만 후에는 이것이 자신들의 탁월한 혜안으로 바꿔버림으로서 선민의식의 싹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고대적 발상에서 유대인들은 중세와 근세 그리고 현대를 살아오고 있다는 점이다. 막스 디몬트의 저서를 거두절미하고 전반부 반을 생략하고 후반부만을 번역함으로서 이런 전제사항이 무시된채로 후반부가 시작되기 때문에 이 책은 흥미있게 읽을 수는 있지만 전후의 상관관계를 밝혀보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르네상스 이후 시오니즘이 발생할 때까지 그 흔적을 추적하면서 우리에게 현대의 유대주의의 시원을 알게한다.  유대인의 사고방식은 유랑의 민족답게 하나의 정답을 고수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이들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두고 해결책을 상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사상은 여러가지 해결책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론은 생존이라는 점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결론을 정해놓고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을 읽으면 바로 이런 점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고방식이나 어떤 박해의 최종 결론은 이스라엘의 국가를 건설해야만 이 비극이 혹은 이 난점이 해결될 수 있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현대 이스라엘의 사고방식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현대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의 생존권이란 가장 큰 전제를 가정하고 모든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민족이 주변 이웃과 타협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며 유대인을 편협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보여진다. 이 책은 절반의 책이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한글 출판사의 역사로 본 유대민족이 이 책의 완역본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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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
알프레드 알바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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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돈 리비히라는 사람이 미국의 대중잡지 에스콰이어에 기고한 글을 번역해 놓은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읽다보니 죽음에 관한 시니컬한 기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자살을 할 때 품위를 생각한다면 목을 매지 말라든가, 손목을 그으려면 양탄자를 미리 접고 목욕탕에 들어가서 하라든가, 총살을 당할 때는 자질구레하게 연설을 하지 말고 간결한 구호를 선택하라든가 하는 식의 비꼼이 잔뜩 담겨 있는 내용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돈 리비히의 글을 통해서 죽음의 엄숙함을 역설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구입했을 때가 1980년대 중반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실비아 플라스를 처음 만났고, 자살이란 고정관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느낄수 있었다.

자살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suicide는 라틴어 sui와 cida의 결합어이다. sui는 자기 자신을 cida는 살인자를 뜻한다. 굳이 번역하자면 자신이 스스로 저지르는 자신에 대한 살인인 것이다. 바로 이런 해석적인 의미로 인해 자살은 죄로 규정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자신에게 저지르는 범죄이기에 그 선택은 어쩔 수 없이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살은 중세 기독교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범죄로 인식된 것이다. 사실 그 이전까지 자살은 죄가 아니었다. 성서에도 사울은 블레셋인들에게 패전하자 자살하였고, 유다 역시 자살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을 비난하는 구절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로마시대에 있어서 자살은 그 선택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에서 고귀한 죽음으로 칭송받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중세 기독교 시대에 들어와 자살은 유다의 죄악과 겹쳐지면서 흠있는 죽음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통념이 종교에 의해 일순간 역전된 것이 바로 자살이라고 할 수 있다.  

자살이 죄악에서 인간의 심층적인 구조의 문제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와 융의 연구는 인간의 내면이란 또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조명했고 자살 역시 이 새로운 내면을 통해 조명함으로서 그 이전과는 다른 해석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제 자살은 저주받을 죄악이고 죽어서는 공동묘지에 뭍히지도 못하는 그런 소외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바레즈는 이 책을 통해서 자살자들이 끊임없이 우리들 산자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죽겠다는 외침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 역시 인간이기에 살고싶다는 표시를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신호에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이들은 무리에서 소외된 존재로 혹은 삶의 의미를 잃은 존재로 전락하게 되면서 죽음을 선택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우리가 자살자들을 두번 죽이는 일에 방관자로 위치해 있다는 것을 고발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방관자로서의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인간의 심리처럼 복잡한 것은 없다. 그 복잡한 미로는 열린 세계가 아니라 닫힌 세계라는 점이다. 닫혀있는 세계, 그 속에서 자살자는 죽음과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나뭇잎을 한장 한장 떼어내며 <죽는다, 산다...>를 반복하다 불확실한 운명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자살의 핵심이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리는 자살이라는 것을 수치와 통계로만 이해하여 왔다는 점이다. 그 수치와 통계는 자살을 깊이 바라보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자살 그 자체를 스코어 보드판의 점수처럼 이해시킴으로서 자살자를 이해하기 위한 개인적 영역으로의 접근을 차단시켰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수치와 통계 대신 인간의 심리와 문학과 역사를 통해서 자살이라는 불가사의한 존재의 포기방식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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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5-03-08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때 이 책 살 당시 서점아저씨가 '자살은 하지 말구. 학생.' 이랬던 말이 생각나네요. ^^ 실비아 플라스 땜에 산 책이었는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에요. 이 책을 리뷰에서 보게되니 감회가 새롭네요.

dohyosae 2005-03-08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rky님 반갑습니다.
 
성서의 구조인류학 한길그레이트북스 8
에드먼드 리치 지음 / 한길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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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래서 성서는 고고학이 발전되면 될수록 그 역사적 사실성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성서의 역사적 사실에 가장 큰 추진력을 준 것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가 해독되면서부터였다. 이 두 지역의 신화를 조사하던 신학자들은 이들 이야기가 성서의 창조이야기와 유사한 관계에 있음을 주목하고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결과 지금은 성서의 내용이 이스라엘인들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신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인들은 그 지역의 다신교적 입장을 자신들만의 일신교적 체제로 변형시켰다는 점이 독창적일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성서의 구조인류학은 쉽게 말하면 이 지역의 신화의 유사성에 근거한 성서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영국의 기능주의와 프랑스의 구조주의가 집대성 되어 있다. 구조주의는 여러 다양한 사회는 서로 다른 양상과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특성과 양상에는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법칙이 있다고 본다. 프랑스의 에밀 뒤르켐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가지고 본질을 추구하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 겉을 해체하여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르셀 모스는 전세계 모든 민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적인 것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모스는 사회존재의 기본요소로 교환과 증여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반면 구조주의의 집대성자인 레비 스트로우는 언어학적으로 접근하였다. 즉 언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음소와 음소가 결합하여 하나의 단어를 만들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마찬가지로 신화에 있어서도 언어의 음소와 같은 신화소가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레비 스트로우는 각 민족의 신화에 나타난 신화소를 종합해보면 하나의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기능주의는 사회란 각부분이 질서를 유지하면서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사회 안에서 생존하는 부분적 존재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회현상이나 제도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고, 사회의 변동이나 갈등은 일시적이거나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은 공유된 가치나 규범에 대해 폭넓은 합의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기능주의는 현재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보통 보수적인 곳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서를 혁명적 자유와 보수의 힘으로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치는 대립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수적인 것이 가진자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해주는 힘이라면 혁명적인 것은 갖지 못한자들이 기존의 권위에 대한 자기 정당화로서의 적합한 이론이다.  

리치는 이런 이론을 성서의 해석에 적용하고 있다. 즉 신화소로 구성된 하나의 신화적 원리가 어떻게 종교적인 원리로 이행되어가는가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적 원리에서는 구조주의적 시각을 종교적 원리로의 이행에는 기능주의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이 두 관계는 분석과 해석의 열쇠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결과에 따르면 성서는 신화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하지만 리치의 해석은 이 신화적인것을 넘어서서 성서속에는 그 무엇인 종교적 진리가 함축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하고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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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
리처드 엘딩턴 / 정음문화사 / 198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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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을 인간의 지능으로 자세히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은 너무나도 가변적인 요소를 많이 지닌 불완전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영웅사관에 입각해 만들어진 위인전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이 크면서 조금씩 사라지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하지만 영웅적 감동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적 연민과 사랑이 스며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월 탓... 아니면 성숙?  세월은 인정해도 성숙은 인정할 수 가 없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어린 시절에서 두 발자국 이상을 나가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계속적으로 성숙해서 완전한 개체로 완성되어 죽는다면 이 세상의 부정과 부패와 악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사막의 로렌스라고 알려진 T.E.로렌스는 태어날 때부터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인간이었다. 귀족가문의 서자출신이라는 그의 신분은 항상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그늘에 안주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런 그의 품성은 아랍세계와 만나면서 능력의 극대치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다른 서구인들이 아랍세계에서 지배자인양 행세하던 시절 로렌스는 그들의 언어를 자진해서 배우고 그들의 풍속을 아랍인들보다 더 철저하게 익힌 인물이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아랍인들에게 친근감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이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열등감에 의해 형성된 자신을 가리고 상대를 높여주는 자세는 동양적 분위기에서 그를 믿을 만한 사람, 우리의 편이란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로렌스는 아주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막에서 살려주었던 한 아랍인을 그가 도적질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하기도 했다. 그가 자신이 살려주었던 아랍인을 처형하고 난 뒤에 그를 구했기 때문에 그의 목숨을 거두는 일도 해야했다고 고백할 만큼 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신념이 가득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그는 신과 인간의 사이를 방황하는 <사막의 영국인>이었던 것이다. 로렌스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터어키 지역을 정찰 나갔다가 검문에 걸려 군부대에 끌려가 터어키인들에게 비역질 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이 일을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를 내면 속으로 더욱 침잠하게 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로렌스는 정말로 당 시대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동료. 선배. 친구 등이 증언하는 그의 과거 모습은 전혀 어떤 공통의 고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무늬를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관들에게는 건방지고 조직에 융화되지 못하는 인물로 친구들에게는 엽기적인 인물로 동료들에게는 늘 혼자 있고 싶어했던 사람으로... 

이렇게 다양한 그의 모습은 영웅이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게 되면 하나의 장점으로 전도된다. 건방지고 조직에 융화되지 못하는 것은 개성이 강한 것으로 엽기적인 것은 창의적인 것으로 고독을 즐기는 것은 과묵함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될 때 한 인간 로렌스는 사라지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사실 로렌스는 영국의 중동지역에 대한 지배욕이 결코 포기되지 않을 것이란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당시 막 개화되고 있던 석유의 산출지였기 때문이다. 이런 지역을 영국이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대국의 이런 태도는 당시 베르사이유에 베트남에서 온 완 아이 콕阮愛國이란 젊은이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자국의 독립을 위해 애를 썼지만 이 구호는 자국이 이익이 걸린 곳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공허한 구호임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그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얽힌 조국의 해방은 타협이 아니라 무력이 수반되어야함을 확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자신의 조국이 아랍인들에게 거짓 약속을 함으로서 그들의 기대치를 부풀려 놓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 장벽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전후 아랍을 위해 베르사이유에서 노력한 것을 보면 그는 철저히 이상을 위해 몸바친 인물이란 사실을 알게된다. 그의 이상이 스러지고 자신과 아랍인 동료들이 피를 흘리며 싸운 곳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가 대변되는 지역으로 남게된다. 아랍인들은 백인들의 거짓에 분노했고, 로렌스는 자신이 평화시대의 인물이 아님을 알고 조용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오토바이 사고에 의한 죽음과 이후에 벌어진 중동지역에서의 갈등은 그가 결코 바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렌스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마지막 단서는 그가 오토바이를 애용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토바이는 자동차와 달리 사고가 발생했을 때 운전자가 살아날 확률이 극히 적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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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 지혜에 이르는 길 세미나리움 총서 2
자크 아탈리 지음, 이인철 옮김 / 영림카디널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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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프랑스의 샤르트르 성당의 바닥에 그려져있는 미로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가운데에는 장미가 그려져 있고 둥근 원이 그 장미를 둘러 싸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이 성당에 도착하여 마지막으로 이 미로의 길을 순례함으로서 정신적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미로는 고대의 신화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미로는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지만 로마나 중세인들 또한 미로를 자유자재로 이용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집이나 성당의 바닥을 복잡한 미로로 장식함으로서 방문자들을 즐겁게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미로는 들어가는 입구와 나오는 입구를 동일하게 기획함으로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의미가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었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고대적인 사고방식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에 한때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미로 정원과 같은 것은 매번 복잡한 갈림길이 나타나고 거기서 우리는 선택을 하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 근대적 미로의 길은 가깝게 혹은 멀게 구성해 놓아 목표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선택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이는 고전적인 미로가 하나의 방향을 따라 가면 목표에 도달하고 그 반대로 밟아나오면 밖으로 나오는 것과 아주 다르다. 근대적 미로는 선택에 따라 더 깊숙한 미로로 가거나 아니면 목표에 도달하거나 혹은 원위치로 되돌아 온다. 여기에는 무수한 선택이 있고 결과도 다양하다.

하지만 현대의 미로는 입구도 출구도 없는 추상화적인 요소를 품고 있다. 여기서 미로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이런 모습은 어떻게 보면 컴퓨터의 연산과정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질문에 예와 아니오라는 선택의 무수한 길을 찾아 헤매는 컴퓨터는 어찌보면 근대의 미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컴퓨터는 근대의 미로처럼 어떤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질문에 따라 그 여정은 끝이 없는 것이다. 즉 기계속에 막혀있는 미로의 존재는 어쩌면 현대문명을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안도 밖도 없는 식물뿌리와 같은 미로-이를 리좀rhizome형 미로라고 한다-는 오로지 얽혀있을 뿐이다. 이 얽힘의 관계속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미로는 고정관념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고정관념에 길들여진 인간은 미로의 내부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되면 세계관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미궁속에 헤매는자는 어떤 자일까. 우리는 그 미궁을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즉 미궁은 우리에게 암흑을 벗어날 지혜를 선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중세인들은 미로의 모습을 통해 구원과 지혜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현대의 삶이 빠져나갈 출구도 없는 미로라면 이 미로 속에서 길을 찾기 보다는 현명하게 잃어버림으로서 오히려 진리의 길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 길은 구원의 길이며 진리의 길이라고 믿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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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3-03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절판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