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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
알프레드 알바레즈 지음, 최승자 옮김 / 청하 / 1995년 5월
평점 :
절판
오래전에 돈 리비히라는 사람이 미국의 대중잡지 에스콰이어에 기고한 글을 번역해 놓은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읽다보니 죽음에 관한 시니컬한 기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자살을 할 때 품위를 생각한다면 목을 매지 말라든가, 손목을 그으려면 양탄자를 미리 접고 목욕탕에 들어가서 하라든가, 총살을 당할 때는 자질구레하게 연설을 하지 말고 간결한 구호를 선택하라든가 하는 식의 비꼼이 잔뜩 담겨 있는 내용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돈 리비히의 글을 통해서 죽음의 엄숙함을 역설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구입했을 때가 1980년대 중반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실비아 플라스를 처음 만났고, 자살이란 고정관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느낄수 있었다.
자살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suicide는 라틴어 sui와 cida의 결합어이다. sui는 자기 자신을 cida는 살인자를 뜻한다. 굳이 번역하자면 자신이 스스로 저지르는 자신에 대한 살인인 것이다. 바로 이런 해석적인 의미로 인해 자살은 죄로 규정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자신에게 저지르는 범죄이기에 그 선택은 어쩔 수 없이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자살은 중세 기독교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범죄로 인식된 것이다. 사실 그 이전까지 자살은 죄가 아니었다. 성서에도 사울은 블레셋인들에게 패전하자 자살하였고, 유다 역시 자살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을 비난하는 구절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로마시대에 있어서 자살은 그 선택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에서 고귀한 죽음으로 칭송받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중세 기독교 시대에 들어와 자살은 유다의 죄악과 겹쳐지면서 흠있는 죽음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통념이 종교에 의해 일순간 역전된 것이 바로 자살이라고 할 수 있다.
자살이 죄악에서 인간의 심층적인 구조의 문제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와 융의 연구는 인간의 내면이란 또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조명했고 자살 역시 이 새로운 내면을 통해 조명함으로서 그 이전과는 다른 해석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제 자살은 저주받을 죄악이고 죽어서는 공동묘지에 뭍히지도 못하는 그런 소외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바레즈는 이 책을 통해서 자살자들이 끊임없이 우리들 산자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죽겠다는 외침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 역시 인간이기에 살고싶다는 표시를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신호에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이들은 무리에서 소외된 존재로 혹은 삶의 의미를 잃은 존재로 전락하게 되면서 죽음을 선택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우리가 자살자들을 두번 죽이는 일에 방관자로 위치해 있다는 것을 고발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방관자로서의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인간의 심리처럼 복잡한 것은 없다. 그 복잡한 미로는 열린 세계가 아니라 닫힌 세계라는 점이다. 닫혀있는 세계, 그 속에서 자살자는 죽음과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나뭇잎을 한장 한장 떼어내며 <죽는다, 산다...>를 반복하다 불확실한 운명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자살의 핵심이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리는 자살이라는 것을 수치와 통계로만 이해하여 왔다는 점이다. 그 수치와 통계는 자살을 깊이 바라보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자살 그 자체를 스코어 보드판의 점수처럼 이해시킴으로서 자살자를 이해하기 위한 개인적 영역으로의 접근을 차단시켰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수치와 통계 대신 인간의 심리와 문학과 역사를 통해서 자살이라는 불가사의한 존재의 포기방식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