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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
리처드 엘딩턴 / 정음문화사 / 1989년 11월
평점 :
품절
한 인물을 인간의 지능으로 자세히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은 너무나도 가변적인 요소를 많이 지닌 불완전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영웅사관에 입각해 만들어진 위인전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이 크면서 조금씩 사라지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하지만 영웅적 감동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적 연민과 사랑이 스며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월 탓... 아니면 성숙? 세월은 인정해도 성숙은 인정할 수 가 없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어린 시절에서 두 발자국 이상을 나가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계속적으로 성숙해서 완전한 개체로 완성되어 죽는다면 이 세상의 부정과 부패와 악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사막의 로렌스라고 알려진 T.E.로렌스는 태어날 때부터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인간이었다. 귀족가문의 서자출신이라는 그의 신분은 항상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그늘에 안주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런 그의 품성은 아랍세계와 만나면서 능력의 극대치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다른 서구인들이 아랍세계에서 지배자인양 행세하던 시절 로렌스는 그들의 언어를 자진해서 배우고 그들의 풍속을 아랍인들보다 더 철저하게 익힌 인물이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아랍인들에게 친근감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이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열등감에 의해 형성된 자신을 가리고 상대를 높여주는 자세는 동양적 분위기에서 그를 믿을 만한 사람, 우리의 편이란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로렌스는 아주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막에서 살려주었던 한 아랍인을 그가 도적질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하기도 했다. 그가 자신이 살려주었던 아랍인을 처형하고 난 뒤에 그를 구했기 때문에 그의 목숨을 거두는 일도 해야했다고 고백할 만큼 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신념이 가득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그는 신과 인간의 사이를 방황하는 <사막의 영국인>이었던 것이다. 로렌스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터어키 지역을 정찰 나갔다가 검문에 걸려 군부대에 끌려가 터어키인들에게 비역질 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이 일을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를 내면 속으로 더욱 침잠하게 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로렌스는 정말로 당 시대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동료. 선배. 친구 등이 증언하는 그의 과거 모습은 전혀 어떤 공통의 고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무늬를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관들에게는 건방지고 조직에 융화되지 못하는 인물로 친구들에게는 엽기적인 인물로 동료들에게는 늘 혼자 있고 싶어했던 사람으로...
이렇게 다양한 그의 모습은 영웅이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게 되면 하나의 장점으로 전도된다. 건방지고 조직에 융화되지 못하는 것은 개성이 강한 것으로 엽기적인 것은 창의적인 것으로 고독을 즐기는 것은 과묵함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될 때 한 인간 로렌스는 사라지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사실 로렌스는 영국의 중동지역에 대한 지배욕이 결코 포기되지 않을 것이란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당시 막 개화되고 있던 석유의 산출지였기 때문이다. 이런 지역을 영국이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대국의 이런 태도는 당시 베르사이유에 베트남에서 온 완 아이 콕阮愛國이란 젊은이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자국의 독립을 위해 애를 썼지만 이 구호는 자국이 이익이 걸린 곳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공허한 구호임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그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얽힌 조국의 해방은 타협이 아니라 무력이 수반되어야함을 확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자신의 조국이 아랍인들에게 거짓 약속을 함으로서 그들의 기대치를 부풀려 놓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 장벽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전후 아랍을 위해 베르사이유에서 노력한 것을 보면 그는 철저히 이상을 위해 몸바친 인물이란 사실을 알게된다. 그의 이상이 스러지고 자신과 아랍인 동료들이 피를 흘리며 싸운 곳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이해가 대변되는 지역으로 남게된다. 아랍인들은 백인들의 거짓에 분노했고, 로렌스는 자신이 평화시대의 인물이 아님을 알고 조용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오토바이 사고에 의한 죽음과 이후에 벌어진 중동지역에서의 갈등은 그가 결코 바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렌스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마지막 단서는 그가 오토바이를 애용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토바이는 자동차와 달리 사고가 발생했을 때 운전자가 살아날 확률이 극히 적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