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의 등장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5
피터 브라운 지음, 이종경 옮김 / 새물결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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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중반 브레멘의 아담Adam von Bremen이 유명한 "북유럽 선교사"를 발표할 때까지 스웨덴의 가믈라 웁살라Gamla Uppsala의 이교사원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한 저항의 거점으로 남아있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가 유럽으로 전파되는 과정이 신의 섭리에 의해 성공적으로 전파된 것만은 아니라는 뚜렷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11세기경에는 그리스도교가 유럽의 종교로 자리를 굳건히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사실 유럽의 그리스도교를 이야기할 때 우리들은 로마를 중심적인 위치에 올려놓고 그 시각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유럽 선교의 역사는 로마보다는 그 주변부의 역할이 더 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유산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지역을 아우르는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성을 가져야만 했다. 보편적Catholic이란 단어가 그 종교의 대명사가 되기 위해서는 억압과 정복이 아니라 조화가 필요하였다.

그리스도교가 서유럽에 도달했을 때 그 지역은 이교의 판테온이었다. 수많은 종교와 수많은 사제들이 각기 고유한 종교를 가지고 자신들만의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역시 수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 이런 그리스도교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제국의 종교로 공인을 받으면서 부터였다. 하지만 피터 브라운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과장할 필요도 없지만 무시할 필요도 없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314년 제국의 종교로 공인을 받았지만 그 이후에도 여러차례 대규모의 박해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종교로서 공인을 받았지만 유일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서 서로마제국이 이민족의 이동으로 인하여 멸망함으로서 서유럽에서 그리스도교는 동로마제국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였다. 이 결과 로마는 제국의 2등급 도시로 전락하면서 로마에 자리잡은 그리스도교는 상대적인 열세를 면치못하였다.  게다가 제국의 황제들은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격렬하게 발생하고 있던 교리적인 문제를 이용하여 종교를 적절히 통제함으로서 그리스도교 역시 다른 여타의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종교로 입지가 축소될 소지가 다분하였다.  그리고 동로마제국은 이런 종교적 교리의 차이점을 해소하기 위해 황제의 명으로 공의회를 개최하여 제국이 종교의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였다. 사실 이때까지 교회의 중심은 로마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로마는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7세기 경에는 동로마제국과는 별개의 라틴 그리스도교 세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결과 그리스도교는 비잔틴 세계와 라틴 세계로 양분되어 경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이외의 세력으로 이슬람이 등장함으로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고대 로마제국의 흔적이 일소되게 되었다. 이슬람 세력은 소아시아와 팔레스티나 그리고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함으로서 이 지역은 1세기도 지나기 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되었다. 이 결과 그리스도교 세계는 더욱 축소될 수 밖에 없었다. 이 결과 그리스도교 세계는 동쪽과 북쪽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려 노력하게 되면서 북유럽과 동유럽이 그리스도교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지역의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수도사들이었다. 수도원의 시발은 사실 이집트와 중동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험악한 사막 지형은 은수자들의 고향이었다. 이들 수도사들은 자신들을 과감하게 포기하여 신에게 받침으로서 외형적인 종교에 커다란 영감을 제공하였다. 이들은 초세기 그리스도교의 숨은 보석이었다.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더욱 풍부한 유산을 교회내로 수용할 수 있었다. 사실 초세기 그리스도교 세계는 엄청난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슬람이 대두하기 전까지 그리스도교는 옛 로마제국 지역의 대부분과 초원의 길을 따라 점점이 분포한 오아시스 도시들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대부분이 이단으로 몰린 아리우스교파였지만-가 산재하였다. 이 공동체의 종착지는 중국의 장안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공동체는 이슬람의 대두와 성상파괴논쟁으로 야기된 라틴교회와 비잔틴교회의 분열로 인해 붕괴되고 만다. 이후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가 상실한 지역-이슬람화된 지역과 초원의 길 지역-은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 이 결과 그리스도교는 유럽의 종교로 축소되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도교는 10세기경 북유럽과 슬라브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때까지 다양한 지역적 전통을 흡수하면서 유럽적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이시기에 라틴교회는 로마적 전통과 새로 선교한 지역의 게르만적 특성이 혼합되어 중세 특유의 교회제도를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동로마제국이 추구한 정교일치의 제국이 아니라 신의 우위성을 추구하는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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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예술로 본 기형의 역사
게르트 호르스트 슈마허 지음, 이내금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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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 키메라, 캔타우로스, 쌍두독수리, 키클로프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힌두교의 트리무르티trimurti-이 신은 비슈누,시바, 브라만이 합체된 형태이다-등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형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은 기형이면서도 다른 개체와 구별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 역시 공통이다.

고대인들이 기형을 바라보는 눈은 현대의 우리들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기형의 출산을 보고 행과 불행을 자신들에 알려주는 하나의 징표로 생각하였다. 이집트에서는 꼽추나 난장이는 재앙과 불운을 막아주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과 스파르타인들은 기형이거나 허약한 어린 아이들은 태어나자 마자 죽여버렸다. 특히 스파르타의 타에토스 계곡은 이런 장소로 유명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기형아는 키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갈레누스 역시 건강한 아이만 키워야 한다고 하였다. 로마인들은 기형아의 경우 아버지가 기를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결정하였다. 로마에서는 기형아인 신생아를 죽이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반면 여성의 낙태는 법으로 금지되었다.  중세시대 기형은 신의 뜻에 따라 생겨난 존재로 인식되었다. 즉 기형의 출산을 통해 신의 섭리나 악마의 소행이 드러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기형은 신적 질서의 개념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해부학적 의학적 차원에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현대에 있어서 기형은 유전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죄악이나 신의 저주라는 차원보다는 예방적인 차원에서 기형을 바라보고 있다.

고대와 중세의 문헌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기형은 선천성 왜소증(난장이)이다. 왜냐하면 당시 의학의 수준으로 볼 때 이보다 더 심한 기형아가 지속적으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히박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여러종류의 기형적 인물을 보았을 때 고대에도 기형의 존재는 낮선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키클로프스에서는 외눈 기형을 야누스와 쌍두독수리, 트리무르타에서는 다두체 혹은 샴쌍둥이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이들 기형아들은 신화속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는 존재로 고대인들에게 부각되었다. 하지만 로마 제정 이후부터 기형은 더 이상 신비한 힘의 상징이 아니었다. 이들은 궁중과 대중 앞으로 불려나가  오락거리로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형은 악으로 단죄되기 시작하였다. 완전하지 못한것, 불완전함은 미적 질서에서도 벗어나있는 것이며 창조 질서의 저편에 위치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미신적. 신화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객관적 학문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생겨나면서 기형은 새롭게 정의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기형은 결함이라는 주관적 틀에서 인간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아주 자연스런 생물학적 현상으로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적극적인 기형에 대한 시선으로 인해 기형에 대한 연구는 급속히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인간의 염색체가 해독이 되었고, 기형에 대한 인간의 이해 역시 한층 발전하게 되었다. 이 결과 기형은 장애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식과 정상으로부터 벗어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인간은 기형을 좀더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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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 포경수술, 성기훼손 - 세계에서 가장 논쟁이 된 외과수술의 역사
데이비드 골래허 지음, 변기찬 외 옮김 / 문화디자인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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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경수술이라는 단어처럼 기묘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도 없는것 같다.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수술에서부터 감방 안에서 불법적으로 시술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포경수술은 남성적인 어떤 것으로 치부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포경수술의 가장 큰 피해자가 제3세계의 여성들이란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언젠가 외국기자가 찍은 사진에 아프리카-수단으로 기억된다-의 한 여인의 고통스런 표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녀는 여성할례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 당시 여성도 할례를 받는가한느 의문보다 어디를 어떻게 시술하는지가 가장 큰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여성이 할례를 받을 때 음핵을 도려낸다는 것을 알았을 때 토하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제3세계의 많은 국가에서 여성들에게 강제적으로 할례를 시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성의 할례가 신에게로의 봉헌이란 거룩한 미사여구로 치장되어 있는 반면 여성의 할례는 음탕함의 제거라는 차별적 인식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 또한 충격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벽화에서부터 유대민족을 거쳐 아랍으로 퍼져나간 할례의 신학적 의미는 아직도 정확히 규명된 것은 없다. 다만 그 행위 자체가 정화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즉 인간의 피-제물-대신 한 부분을 훼손하여 신에게 바침으로서 정결하게 된다는 이론은 지금도 많은 국가의 토속종교에서도 유효한 이론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유대교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이 할례의 의식을 신과의 계약의 표시로 보지 않고 하나의 상징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육체의 훼손으로 맺는 계약보다 마음의 회심으로 맺는 계약이 더 유효함을 언명하였고 할례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음으로서 유대교와 같은 선민적 종교가 아니라 보편성을 가진 종교로 기독교를 이동시켰다. 이 결과 서구 세계는 할례의 열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랍권에서 발생했다.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교는 독립적인 종교가 아니라 중근동에서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유대교와 그로부터 파생된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랍권지역은 이 지역이 이슬람화될 때까지 초세기 기독교의 사상적 요람지였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와 같은 곳은 신학의 양대 산맥이었다. 이런 지역이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종교는 어떤 차별성을 가져야만 하였다. 바로 그런 차원에서 할례는 시행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할례의 문제는 이슬람에서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이슬람교도가 아니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되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여성 할례의 문제가 처음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현재 전세계 28개국-대부분이 아랍과 아프리카-에서 매년 2백만명의 소녀들이 할례를 받고 있다. 이들지역에서 여성 할례는 전통적, 종교적 권위라고 선언하면서 시행하고 있지만 코란이나 성서의 어디에도 여성을 할례하라는 구절은 없다는 점이다. 바로 성서적 혹은 코란적 권위와 상치되는 이런 전통은 인위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인위적인 전통의 대부분은 기성질서의 수호를 위해 생겨난 부차적 조항이 통치의 수단으로 변모하면서 강력한 강제력을 갖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여성 할례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적 관념의 또 다른 표출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여성할례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잔인함에 앞서 시술의 불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시술자들은 대부분 소독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도구를 이용해 수술을 시행함으로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할례의 후유증으로 사망하는지 통계조차 잡혀있지 않고 있다. 여성할례는 아프리카의 수단에서는 전체 여성의 90%이상, 이집트에서는 80%이상, 소말리아 89%, 에티오피아 90%, 지부티 98%, 나이지리아 50%이상이 시술을 받고 있다고 한다. 여성할례의 지역이 이렇게 아랍권에 집중하기 때문에 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대부분의 중동국가에서는 여성의 할례가 시행되고 있지 않다. 바로 이런 점이 여성할례에 대하여 우리를 더욱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원인이다.

사실 유대인들이 할례를 신과의 계약을 맺은 유대민족 고유의 관습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나 아프리카 오지에서 발견되는 할례를 보면 꼭 유일신 야훼가 유대민족과와 독점계약을 체결한 것만은 아닌것 처럼 보인다. 즉 할례의 종교적 의미는 그만큼 퇴색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할례가 하나의 이슈로 등장한 것은 맹장과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은 대부분의 장을 남성의 할례에 할애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인 여성의 할례는 불과 1개장만을 할당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할례는 남성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할례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란 점이다. 그 반대편에 남성 할례의 우월적 지위가 존재하고 있다. 남성들이 집착하는 할례의 종착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천박한 비아그라의 세계와 유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 할례의 종착점은 끊임없는 수모와 고통과 충격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성의 성감을 억제함으로서 얻어지는 남성의 가학적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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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전쟁 제3부 - 에필로그를 위한 전쟁
안정효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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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의 영화감독 트란 얀 홍의 <씨클로>에 월남전의 베테랑이 암흑가의 살인청부업자가 되어 자신이 죽여야할 대상을 의자에 묶어놓고 넋두리를 늘어놓는 대목이 있다 그는 날이 선 잭크 나이프를 빼들고 자신의 몸에 난 상처의 의미를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뭔가 모른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희생물의 頸動脈을 절단한다. 뿜어지는 피와 교차되는 구슬픈 가락의 노래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전쟁이 한 인간을 어떻게 황폐화시켰는가를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하얀전쟁 3부는 전쟁이 끝난지 25년의 세월이 흐른뒤에 주인공 한기주가 다시 월남을 찾아가 바라보는 월남과 영원히 과거 속에 머물러있는 인간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과거의 적이었던 베트콩 출신과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이다. 수컷들이 군대에 관한 기억이 뻔한 것처럼 전쟁에 관한 기억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부대였는가, 어디서 싸웠는가, 상대방을 죽여봤는가에 대한 부질없는 물음과 대답 속에서 전쟁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총을 든 전쟁이 아니다. 자신의 기억속에 각인된 고정관념과의 전쟁인 것이다. 그리고 과거 베트콩이었던 사람은 <부상병>이란 그들의 노래를 부른다.  "어느날, 어느날 오후에/ 아가씨가 키를 들고 쌀을 까부는데/ 어쩌면 키가 그렇게 무거울까/ 어쩌면 키가 그렇게 무거울까/ 하루가 지나고 한주일이 지나고/ 한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그이는 언제 돌아오려나/ 그이는 언제 돌아오려나/ 남자가 떠났으니 사내가 할 일을/ 남자가 떠났으니 전쟁에서 할 일을/ 여자가 하고 있다네/ 마음은 무거워도 할 일은 해야지/ 마음은 무거워도 할 일은 해야지/      어느날 어느날 오후에/ 그이가 돌아왔지만/ 한쪽 소매자락이 바람결에 나부꼈네/ 전쟁에서 팔을 잃었기에/ 전쟁에서 한 팔을 잃었기에..."로 이어지는 대목을 읽었을 때 <씨클로>의 살인청부업자가 떠오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들은 모두 무거운 짐을 진 채로 전쟁이 끝났음을 애써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은 모두 전쟁의 피해자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참전한 전쟁에서 잃어버린 청춘과 희망과 꿈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을 유지하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옛 동료였고 사망으로 처리된 채무겸과의 재회를 통해서 전쟁의 악몽은 영원히 지속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하이라는 베트남 여인을 만나서는 그 옛 기억을 되살리려 하는 그 자체가 비극임을 느낀다.  하이가 즐겨 불렀던 <클레멘타인:베트남 제목은 레망타이>의 가락도 두 사람의 현재를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리지 못한다. 바로 그 점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한기주는 과거를 정리할 수 있는 끈을 잡게 되는 것이다. 그 전쟁이 자신의 의식에서 끝나는데 무려 25년의 휴지기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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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소련 현대사 - 쉬또젤라찌총서 5 쉬또젤라찌 총서
V.P.드미트렌코 외 지음, 이인호 외 옮김 / 열린책들 / 199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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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들에게 1917년은 영광스런 해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1991년은 어떻게 기억할까. 동구권의 이탈로부터 시작된 소련 연방의 붕괴는 1917년의 영광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선배들이 성공한 혁명의 본질은 어떤 것이었는가에서부터 그것은 올바로 계승되었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문과 질문을 이 책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은 소련의 가장 암울하면서도 영광스런 시기인 1945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스탈린의 공포정치로 기억되는 대숙청의 시기였다. 그러면서 이 시기는 급격한 중공업의 성장을 통해 소련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드러낸 기간이기도 하였으며, 파시스트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위대한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영광된 시기였다. 이제까지 이 시기는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의 영도하에 소련 인민의 영웅적인 투쟁으로 위대한 승리를 구현한 시기로 러시아인들에게는 기억되고 있다. 물론 그 다른 편에는 굴락의 아품이 스며있지만...

이런 자랑스런 역사는 개혁과 개방으로 상징되는 물결 앞에서 너무나 쉽게 퇴색해 버렸다. 이런 결과 소련의 인민들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에 대한 의심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의문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배워왔던 체제가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이었으며,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올려놓은 것이었다면 왜 이렇게 아무런 저항없이 붕괴되었을까하는데 따른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이 책은 저술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종래의 영광과 찬양 일변도로 기술되었던 영광스런 시기를 고난도 있었으며 실수도 있었던 그리고 무고한 희생도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편협한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역사의 기술보다는 보다 넓은 시각으로 러시아의 영광스런 시기를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은 어쩌면 공산주의 소련과 민주화된 러시아 사이에 잠시 나타난 중간적인 역사서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러가지 다양한 관점에서 주제에 접근하고 있다.

가장 먼저 기술된 러시아혁명에 관해서는 과연 러시아가 혁명에 성공한 뒤에 레닌주의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였던 기층 농민들이 급격한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13년 러시아의 공업생산량은 세계 5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 1인당 공업생산량은 미국이 1/13에 그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산업은 세계의 정상에 도달해 있었지만 농업부문은 취약하기 그지 없었다. 15만의 대지주가 5천만의 농민이 가진 땅의 거의 5배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농민은 노동자보다 혁명역량에서 뒤쳐지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혁명의 주체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은 토지의 분배로 인해 잉여분의 자산을 축적하자 가장 혁명을 반대하는 집단으로 변모함으로서 이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혁명의 억압적 체제가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혁명의 성공 뒤에 곧바로 일어난 내전은 그 단순한 도식으로 인해 감정적인 역사로 변질되었다. 백군과 적군의 물러설 수 없는 투쟁으로 인하여 러시아를 고통속에 몰아넣었던 내전은 그 후에 전개된 권력투쟁의 결과 사실의 왜곡이 이루어졌다. 대다수의 내전기의 사령관들의 이름은 역사에서 삭제되었고 이들의 이름이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은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 있고난 후였다. 이전까지 내전의 승리는 오로지 스탈린의 몫으로 돌려졌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서방으로 망명한 백군 출신들의 자전적 역사가 있었다. 이들의 기록 또한 역사적 실체를 교묘하게 왜곡함으로서 러시아 내전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만 내전은 러시아의 문학에서 깊이있게 다루어졌을 뿐이다. 내전에 대하여 러시아 사학계는 다양한 견해를 인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전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26년부터 40년 사이에 이루어진 산업화에 대해서는 그동안 주장되었던 공산주의에 의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에 러시아가 축적해 놓은 공업적 성과가 나타난 것이란 것이 대립하고 있다.  1946년 스탈린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산업화를 이룩하는데 13년의 세월(1928-1941)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이후 하나의 진실이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런 급격한 공업화는 어두운 측면도 노출시켰다. 중공업을 중시하고 경공업을 소흘히한 결과 소련은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후진적인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급격하게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농민들이 모든 희생을 떠안게 되었다.  이것은 산업화가 경제적 질서인 상품과 화폐라는 기반 위에서 조성 된 것이 아니라 당의 일방적인 지침에 의해 시행되었기 때문이었다. 

1941년부터 1945년동안 치러진 대조국전쟁은 가장 개혁과 개방의 색채가 농후한 기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전의 사회주의 사관에 따르면  스탈린의 영도로 승리를 획득하였다는 일방적인 서술만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소련이 당시 전쟁준비가 부족했다는 점을 시인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중공업산업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로 인해 소련인민들은 전쟁 이전부터 소비재의 만성적 부족에 시달렸고 전시에는 그 정도가 더욱 극심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전쟁이 발발하여 대략 2천7백만의 러시아인민이 희생당하였는데 이는스탈린의 독재로 인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 국가가 다시 일어서는데 있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정립하는가에 따라 그 국가의 성격이 정해지는 것이다. 현재의 러시아는 자신들이 과거에 경험했던 성공과 좌절의 역사를 이 책에서 솔직하게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러시아가 아직 사회주의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시기에 저술된 책이라는 점에서 일독할만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속한 시일내에 그 이후에 기술된 역사책도 번역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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