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전쟁 제3부 - 에필로그를 위한 전쟁
안정효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월남의 영화감독 트란 얀 홍의 <씨클로>에 월남전의 베테랑이 암흑가의 살인청부업자가 되어 자신이 죽여야할 대상을 의자에 묶어놓고 넋두리를 늘어놓는 대목이 있다 그는 날이 선 잭크 나이프를 빼들고 자신의 몸에 난 상처의 의미를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뭔가 모른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희생물의 頸動脈을 절단한다. 뿜어지는 피와 교차되는 구슬픈 가락의 노래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전쟁이 한 인간을 어떻게 황폐화시켰는가를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하얀전쟁 3부는 전쟁이 끝난지 25년의 세월이 흐른뒤에 주인공 한기주가 다시 월남을 찾아가 바라보는 월남과 영원히 과거 속에 머물러있는 인간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과거의 적이었던 베트콩 출신과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이다. 수컷들이 군대에 관한 기억이 뻔한 것처럼 전쟁에 관한 기억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부대였는가, 어디서 싸웠는가, 상대방을 죽여봤는가에 대한 부질없는 물음과 대답 속에서 전쟁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총을 든 전쟁이 아니다. 자신의 기억속에 각인된 고정관념과의 전쟁인 것이다. 그리고 과거 베트콩이었던 사람은 <부상병>이란 그들의 노래를 부른다.  "어느날, 어느날 오후에/ 아가씨가 키를 들고 쌀을 까부는데/ 어쩌면 키가 그렇게 무거울까/ 어쩌면 키가 그렇게 무거울까/ 하루가 지나고 한주일이 지나고/ 한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그이는 언제 돌아오려나/ 그이는 언제 돌아오려나/ 남자가 떠났으니 사내가 할 일을/ 남자가 떠났으니 전쟁에서 할 일을/ 여자가 하고 있다네/ 마음은 무거워도 할 일은 해야지/ 마음은 무거워도 할 일은 해야지/      어느날 어느날 오후에/ 그이가 돌아왔지만/ 한쪽 소매자락이 바람결에 나부꼈네/ 전쟁에서 팔을 잃었기에/ 전쟁에서 한 팔을 잃었기에..."로 이어지는 대목을 읽었을 때 <씨클로>의 살인청부업자가 떠오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들은 모두 무거운 짐을 진 채로 전쟁이 끝났음을 애써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은 모두 전쟁의 피해자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참전한 전쟁에서 잃어버린 청춘과 희망과 꿈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을 유지하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옛 동료였고 사망으로 처리된 채무겸과의 재회를 통해서 전쟁의 악몽은 영원히 지속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하이라는 베트남 여인을 만나서는 그 옛 기억을 되살리려 하는 그 자체가 비극임을 느낀다.  하이가 즐겨 불렀던 <클레멘타인:베트남 제목은 레망타이>의 가락도 두 사람의 현재를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리지 못한다. 바로 그 점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한기주는 과거를 정리할 수 있는 끈을 잡게 되는 것이다. 그 전쟁이 자신의 의식에서 끝나는데 무려 25년의 휴지기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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