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구식 설교단과 같이 이것도 대단히 높은 것이어서, 만약 거기에 통상적인 계단을 마련한다면...좁은 이 교회당을 더욱 비좁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매이플 신부는 독특한 건조법을 이용한 것 같다. 말하자면 설교단에 계단을 붙이는 대신 보우트에서 큰 배로 옮겨 타려고 올라갈 때 사용하는 것 같은 줄사다리를 걸어 놓은 것이다..."  -삼성세계문학전집, 모비 딕, 오국근역, 1984년, 58쪽 이하 참조-

오래 전 이 부분을 읽으면서 설교단Pulpitum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어려웠다. 다만 포경선원들이 자주 이용하는 교회당이기에 교회의 내부를 배처럼 꾸며놨구나하는 식의 간단한 이해만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모비 딕에 나오는 교회의 모습은 해변가에 배처럼 꾸며놓은 레스토랑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허만 멜빌은 무엇때문에 교회의 모습을 배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그것은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우연히 정교회에 관한 저서를 읽으면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정교회뿐만 아니라 교회는 오래 전부터 교회라는 건물을 단순한 구조물로 이해하지 않았다. 이 지상의 구조물은 천상세계를 구현하는 장소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원초적인 발상은 교회라는 구조물은 하나의 커다란 "배"라는 생각이었다. 이 "배"는 그냥 단순한 배가 아니라 노아가 인류를 구원한 "방주"라는 생각이었다. 즉 영혼의 구원을 위한 절대적인 "방주"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제는 선장인 셈이다. 그래서 선장은 설교를 하기 위해 교회 정면 한편에 높다랗게 위치한 강대에 올라가 설교를 하는 것이다. 이 강대는 배의 가장 높은 전망대처럼 보인다. 여기서 선장은 물에 감싸인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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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1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콥 부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탈리아 자치 도시에가 위협을 받자 시민들은 돈을 들여 용병을 고용한다. 이들 용병들은 시민들의 염원대로 도시의 자치를 지켜낸다. 이에 시민들은 용병 대장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무엇을 해 줄까 토론을 벌인다. 돈, 명예에 관한 갑론을박이 펼쳐지는 가운데 한 시민이 일어나 외쳤다.

"그를 신으로 만듭시다!" 시민들은 그 사람의 외침에 잠시 침묵한 다음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시민들은 용병대장을 죽여 도시의 수호신으로 받들었다.

신이 되고자 한다면 죽어라?!

* 부크하르트는 이 이야기가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서 "언제나 사실이며 동시에 언제나 사실이 아닌"이란 말을 덧붙이고 있다.

"옛날 어느 都市-시에나라고하는-의 市民들이 그 市를 적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시켜준 將軍을 가지고 있었다. 市民들은 날마다 그 將軍에게 어떻게 報答을 해야 할지에 대해 의논했다. 그리고 가령 그를 그 市의 支配者로 삼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보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마지막에 한 시민이 벌떡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將軍을 죽여 이 都市의 守護神으로 삼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장군은 로마元老院이 로물루스를 죽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여버리고 말았다." -을유문화사,이탈리아 르네상스문화, 정운용역,1988년, 51-5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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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9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dohyosae 2006-08-11 0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적 사실로 볼 때 이런 일은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하지만 문서라는 증거로서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6-08-13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왜관 - 조선은 왜 일본사람들을 가두었을까 논형학술총서 24
다시로 가즈이 지음, 정성일 옮김 / 논형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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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각을 대륙으로 보느냐 아니면 해양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특히 일본의 경우 대륙의 관점에서 보면 문명의 최종 수혜자의 위치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해양의 시각으로 보면 가장 앞자리에 위치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시키기 보다는 해양의 첫번째 위치에 붙박아 두려 한다. 그래서 일본은 대마도와 나가사키란 두 지명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다르다. 대마도를 조선이라는 나라로 한정시켜 보려는 반면 나가사키는 세계로 나아가는 입구로 묘사한다. 대마도가 일본의 중세와 근대에 기여한 문화적, 경제적 측면은 무시되지만 나가사키의 폭 60미터에 길이 180미터의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인 데지마出島는 엄청나게 부풀려 소개된다.

일본은 나가사키를 통해 서양의 문물과 중국의 문물을 직접받아들였다고 역사책에 서술한다. 대신 대마도는 나가사키의 그늘에 가려 초라하게 보일 뿐이다. 이렇게 초라한 대마도와 조선의 관계를 솔직하게 기록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경상도에 위치한 왜관은 일본이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유일한 해외거점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동북아시아에서 외교적으로 고립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는 중국 중심의 당시에 세계 질서로부터 소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새로운 통치자인 도쿠가와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일본이 해양국가이지만 대륙이라는 정치질서에 의존해야한다는 냉정한 국제관계의 한 단면이었다. 일본은 동북아에서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중국과 조선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중국은 명.청의 교체기였기에 일본이 원하는 답을 줄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은 조선을 통해 동북아 질서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交隣의 원칙에 따라 일본과 수교를 재개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선을 일본을 중화의 세계에 편입시키기 위해 교화해야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시작된 왜관은 단순히 교역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을 통해 일본은 다양한 문화를 흡수해 나갔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조선과 일본의 이런 관계를 의도적으로 대마도와 조선과의 관계로 바라보고 있고 교역 물품 또한 인삼으로 한정시키고 있다. 하지만 조선-왜관-대마도-에도로 이어지는 이 통로는 단순화된 시각으로 단정할 수 없다. 그만큼 이 통로는 일본이 19세기 해양세력으로 재편될 때까지 대륙의 문화를 흡수하는 탯줄과 같은 통로였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이 길을 인삼의 길로 축소하여 보고 있다.

이런 일본의 시각은 근 2백여년 동안 지속하였던 왜관 보다 동남아시아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일본인 집단을 과대포장하여 설명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일본이 이렇게 보는 것은 자신들은 대륙과는 무관한 해양문명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근 2백년 이상 대륙의 끝자락에 일본 자신이 붙들고 있었던 왜관은 이런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편향된 것인가를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본이 왜관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페리 제독에 의해 개국이되고 중국이 유럽 열강에 의해 유린 되는 것을 보고 난 뒤의 일이다. 

왜관을 바라보는 시각이 대륙지향적이냐 해양지향적이냐에 따라 다른 무늬를 띠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외교적 주체성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도 왜관은 조선의 외교가 수동적이었는가 능동적이었는가를 판단하는 한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관을 통해서 동북아시아라는 세계를 보면 미국의 저명한 일본사학자인 마리우스 젠슨이 "동북아시아의 중국. 일본. 조선 가운데 가장 폐쇄적인 국가는 조선이었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세계는 우리 스스로가 한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韓館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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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정교 - 역사.신학.예술 고려대학교출판부 인문사회과학총서 61
석영중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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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작가 이오시프 칼리니코프의 <Moshchi모쉬치>라는 작품이 있다. 이 소설은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혁명기 러시아 사회의 모순점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놀라웠던 것은 러시아 종교의 자유분방함이었다. 한국에 들어온 그리스도교가 유교의 엄격함과 결합하여 종교적 기쁨보다는 고통에 중점을 둔 종교적 분위기에 익숙한 나에게 칼리니코프의 소설은 엄청난 종교적 일탈로 보였다. 물론 칼리니코프의 저편에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또 다른 러시아적 종교가 있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의 거의 무신론적이며 부정의 신학에 기반을 둔 종교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실천적 사랑 신학에 기반을 둔 종교적 심성은 칼리니코프의 육적인 종교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 각각은 러시아 정교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란 점이다.

이 책은 러시아 정교의 이런 다면적인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역사와 신학과 예술을 통해 러시아 정교가 러시아 민족의 정신구조를 어떻게 형성시켰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로마 가톨릭과 차별화를 위해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이-안드레아-를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이것은 러시아의 정교가 로마 가톨릭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가 로마만큼 역사적 정통성과 유구성을 함께 보존하고 있다는 또 다른 의미의 자부심인 것이다.

 러시아는 언제나 유럽의 변방이었다. 이런 러시아적 고립감은 종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크게 고려되었다. 가톨릭을 받아들여 서유럽의 끝자락에 위치하느냐 아니면 동방정교를 받아들여 그 선두에 서느냐를 심사숙고하였던 것이다. 이는 어찌보면 '조삼모사'와 같은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러시아는 종교를 통해 그리스 세계의 후계자로 자신을 자리 매김하였던 것이다. 이는 그리스를 시작으로 로마로 이어져온 역사적 연속성 상에 러시아가 위치하고 있음을 선언한 것과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교는 언어적으로는 그리스와 접촉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너무나 일찍 자신들의 언어-키릴문자-가 만들어졌고 이 언어로 복음서가 번역됨으로서 그리스, 라틴어로부터 고립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러시아 정교는 그리스와 라틴 세계의 정교하고 현학적인 신학과 접할 기회를 상실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리스 세계로부터 신학이 들어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표피적인 것이었다. 러시아는 이 표피적인 것을 통해 자신들의 신학을 만들어 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정교는 서방의 종교나 그리스 정교와 달리 감각적이며 내면적인 독특한 종교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세계는 닭과 계란의 우열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민족성과 종교의 함수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종교가 민족성을 형성시켰는가 아니면 민족성이 종교를 그렇게 변형시켰는가하는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지만 그것은 항상 원점으로 되돌아온다는 점이다. 그만큼 종교와 러시아민족간의 관계는 밀접하고 끊어질 수 없는 것이란 점이다. 그렇기에 러시아 종교는 러시아 혁명 이후 70년간 극심한 탄압을 받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종교와 민족, 민족과 종교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었던 것이다. 즉 러시아인들에게 종교는 자신들이었고 자신들은 바로 종교였던 것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대지가 결합되면서 러시아는 민족, 종교, 대지가 삼위일체처럼 하나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셋 가운데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것 역시 붕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종교의 축복 속에 대지 위에 지금까지 굳건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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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사스 2006-06-22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겐 참으로 유익한 리뷰였습니다. ^^ <모쉬치>라는 소설도 시간 내서 읽어보고 싶네요.

dohyosae 2006-06-22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쉬치는 1989년 열린책들에서 이갑수씨가 <모나히>란 제목으로 번역했습니다. 유익하셨다니 감사합니다.
 
멕시코 혁명과 영웅들
엔리케 크라우세 지음, 이성형 옮김 / 까치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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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멕시코 修士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멕시코 혁명으로 옮겨갔다. 물론 가톨릭 수사인 그분은 멕시코 혁명을 좋게 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멕시코 혁명 기간 동안 가톨릭이 얼마나 박해를 받았던가... 그럼에도 멕시코 혁명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에밀리아노 자파타라는 이름을 자주 언급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전까지 멕시코 혁명-솔직히 혁명인지도 몰랐다-의 가장 대중적인 인물은 판쵸 빌라Villa-이 철자가 비야로 읽힌다는 것은 아주 후일에야 알았다-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것도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더러운 그런지 룩에 솜브레로를 눌러쓴 도적 이상의 이미지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수사님은 비야보다는 자파타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자파타의 이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자파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었다. 그만큼 80년대에 멕시코 혁명은 우리에게 낮선 화두였던 것이다.

이 책은 멕시코 혁명의 가장 중심에 서있던 일곱사람의 간단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일곱명의 이야기를 사마천의 史記처럼 기전체의 형식을 취함으로서 시간의 순서보다는 인물의 행동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 일곱명의 혁명아들이 알게 모르게 역사 속에서 스쳐지나가고 만나고 결별하는 과정을 통해 멕시코 혁명의 본질과 완성 그리고 변질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각 인물에 할애하는 지면은 적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혁명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멕시코 혁명은 근 30년에 걸친 지난한 권력의 역사이다.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들과 교조적인 사람들이 엉켜붙어 기존의 체제를 뒤엎기도하고 다시 회귀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 가는 과정의 역사이다. 물론 이런 단순하고 교과서적인 희망사항은 68년 멕시코 월드컵을 계기로 허상이라는 것이 드러났지만... 그 허상이 드러나기 까지 절대 다수의 민중들이 원했던 길이 무엇이었는가를 일곱명의 혁명아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봉기한 마데로서부터 헌정질서를 붕괴시키지 않기 위해 '제도혁명당'이란 또 다른 괴물을 만들어내고 이를 제도화시킨 카르데나스에 이르는 과정은 혁명이 얼마나 역설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프란치스코 마데로, 판쵸 비야, 에밀리아노 자파타, 알바로 오브레곤, 플루타르코 카에스Calles-철자에 주의할 것-라자로 카르데나스의 이름은 민중들이 이들 이름 앞에 '거룩한聖Saint'이란 수식어를 붙인다해도 결코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지도자의 이름에 새겨진 숙명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 볼 생각거리이다.

평생 가난을 숭상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마데로의 삶, 죽음에서 부활한 라자로의 삶과 카르데나스의 이야기, 풀르타르코 카에스란 이름 사이에 숨어있는 엘리아스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의 이미지는 혁명아들의 내면적인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게 맞물려 있다. 판쵸 비야와 에밀리아노 자파타는 항우가 제왕이 아님에도 사기의 本記에 기록된 것처럼 이들 역시 멕시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했기에 충분히 이들의 반열에 오를만한 자격을 갖춘 인물들이다.

이 책은 어떻게 보면 혁명의 심리서라고 할 수 있다. 혁명가들이 평생 안고 살아야만 했던 개인적인 콤플렉스가 어떻게 혁명의 역사에 투영되었는가를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 콤플렉스가 사회적인 모순과 결합되어 어떻게 변형되고 그것을 극복해가려하는 과정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혁명의 공약들은 새삼 혁명에서 지도자의 자질을 생각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만큼 짧은 개개인의 삶 속에 수많은 역사의 이미지와 상징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soldadera란 혁명기의 女性戰士를 일컸는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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