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오래 전에 서방의 기자가 이란과 터키 국경 지역에서 찍은 사진으로 그 해의 풀리쳐상을 받은 작품이다. 총을 겨눈 사람들은 이란 정규군이고 쓰러지는 사람들은 쿠르드 민병대원들이다. 터키와 이란은 그리 가까운 국가는 아니지만 쿠르드 문제에서만은 손발이 척척 맞는다. 터키에서 쿠르드족 소탕작전이 벌어지면 이란은 국경지역의 경계를 강화하면서 쿠르드족의 철수로를 차단한다. 그러면 터키군은 쿠르드족을 마음껏 소탕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쿠르드 문제는 국제 정치 무대에서 가장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문제이다. 이것은 이들 종족이 가장 첨예한 문제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에너지 문제이다. 쿠르드족이 산재한 지역은 터어키에서 이라크와 이란을 지나는 북부지역이다. 그런데 이 지역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강대국에서는 이 지역에 신생국가를 세워 불안을 자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서방으로서는 기존의 정권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편입시켜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라크 전쟁은 바로 이런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자치권을 얻었지만 결코 독립국가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서방 또한 그렇게 하여 이 지역의 불안을 부추기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사진은 이런 서방의 표현되지 못한 양심의 한 부분을 서방 기자가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진은 앞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고 이 사진을 통해 쿠르드 문제는 계속 제기되고 알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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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06-25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의 현장, 너무 적나라하군요 언제나 소설 보다 삶이 훨씬 더 치열하고 극적이고 끔찍한 것 같아요 숨이 탁 막히는 사진입니다
 
잊혀진 병사 - 어느 독일 병사의 2차 대전 회고록
기 사예르 지음, 서정태 엮음 / 루비박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이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인들은 엄청난 무력감과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들 패전국 국민들은 전쟁이라는 커다란 재앙을 공유하였지만 그 토론의 장에 결코 초대받지 못하였다. 게다가 많은 병사들-이들은 아버지이면서 아들이었고 남편인 사람들이었다-이 소련의 강수용소에 억류되어 전후 복구에 투입되었다. 이들 강제수용소의 병사들이 마지막으로 귀국한 것이 1955년이었다. 그때까지 독일은 전쟁이 완결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자괴감의 날들 속에서 독일 신문에서 재미있는 조사를 하였다. 질문은 간단하였다. "전쟁이 끝난 지금 가장 생각나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많은 단어가 신문사로 몰려들었지만 가장 압도적인 수를 차지한 단어는 "고향故鄕"이었다고 한다. 독일어로 '하이마트Heimat'인 이 단어는 단순히 고향으로만 번역되지 않는 폭넚은 단어이다. 이 단어는 고향이면서 마을이고 마을이면서 고국 혹은 모국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그리고 나즈막한 중저음의 독일어 성음으로 발음되는 하이마트는 어떤 또 다른 마음속의 울림을 느끼게 한다.

왜 독일인들은 전쟁이 끝났을 때 이 단어를 생각하였을까? 그들은 고향이라는 단어 속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한 것일까. 그들은 이 단어를 통해 전쟁이 앚아간 모든 것을 조금이라도 찾았을까. 그 당시 독일인들의 무력감과 피곤함은 하인리히 뷀의 소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네'라는 소설에 잘 드러나 있다.

잊혀진 병사라는 제목의 책은 이 고향을 찾기 전의 이야기이다. 아니 독일이 동방에 새로운 고향을 만들려고 한 시절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새로운 고향을 만든다는 것은 누군가 오랫동안 지내온 고향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결코 어느 한쪽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러시아는 독일과 조국전쟁을 진행하면서 "어머니 러시아"라는 슬로건을 외쳤다. 이 구호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독일과 러시아는 같은 단어를 두고 서로 상반된 입장에서 싸웠던 것이다. 그러기에 전쟁의 양상이 더욱더 잔인하고 처절했는지 모른다.

이 책은 결코 유쾌한 책은 아니다. 곳곳에 기록되어 있는 전쟁의 참상은 우리가 그동안 배워온 이차세계대전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파괴자 독일군, 피해자 러시아라는 등식이 이 책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오직 인간들의 고통이 있을 뿐이다.  

"전쟁의 진흙탕 속에서 구르다 천국으로 올라온 병사들에게 하느님이 물었다. '아담아, 너 어디에 있었느냐?' 한 병사가 대답하였다. '지옥에 있었습니다.'"

* 이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슈판다우 포라는 독일 제식병기가 나오는데, 정확히 무엇인지. 총인지  대포인지...  전쟁 문학이나 기록을 번역할 때 군대식 용어나 장비의 용어가 생소하기 때문에 많은 실수가 일어난다. 여기서도 그런 실수가 너무 많이 보인다. 좋은 책이 이런 사소한 문제로 격이 떨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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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되지 않은 진실 하나

Congo란 지명은 레오폴드 벨기에 왕의 사랑스런 공주가 키우던 강아지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레오폴드가 아프리카의 공백지대를 보며 자신의 야심을 구상하고 있을 때 막내 공주가 애완견과 함께 들어오자 그는 즉석에서 그 미지의 장소를 강아지의 이름인 콩고로 명명했다고 한다.

진실된 이야기 둘

콩고는 원래 브라자빌 콩고와 레오폴드빌 콩고로 양분되어 있었다. 브라자빌 콩고는 그 지역을 첫번째로 탐험한 프랑스의 탐험가 브라자를 기리기 위해 수도의 이름을 그렇게 붙인것을 유럽인들의 무관심과 공명심에서 그러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레오폴드빌 콩고 역시 벨기에의 왕 이름을 딴 수도의 이름으로 거대한 콩고를 프랑스와 벨기에가 양분하여 구분하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 두 나라는 각기 다른 경로로 역사 속에 편입된다. 브라자빌 콩고는 훗날 콩고인민공화국으로 레오폴드빌 콩고는 콩고공화국에서 자이레로 다시 콩고공화국으로 변하였다. 하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지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엄청난 관심이라는 점이다. 풍부한 수력과 자원이 매장된 이 지역은 아프리카판 러시아의 시베리아이기 때문이다. 자연적 장애만 극복된다면 엄청난 잠재력을 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적 허구 셋

마이클 크라이튼은 콩고라는 소설에서 이 지역의 가능성과 야만성을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훈련된 고릴라에 의해 은폐되어 있는 황금의 도시 잔지는 콩고의 불확실한 미래이며 현재이다. 그 불확실성이 과학에 의해 개화된다는 그의 생각은 어쩌면 맞을 수도 아니면 틀릴 수도 있다. 크라이튼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에서 흑인 용병-혹은 짐꾼-들이 콩고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부르는 '호텔 캘리포니아'는 기괴한 느낌을 준다.

역사적 현실 넷

콩고는 60년대 초 독립을 하면서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서구 식민주의에 의해 재단되어졌던 콩고가 갑작스럽게 독립하면서 원하든 원치않든 맞이하게된 서구열강의 개입이었다. 신임수상 페트리스 루뭄바-그의 사후 그의 이름을 딴 대학이 모스크바에 설립되어 제3세계 혁명가들의 양성소가 되었다-와 서방의 지원을 받는 모이세 촘베 간의 대결은 촘베의 승리가 확실한 것이었다. 서방세계에 기댈 수 없었던 루뭄바의 선택은 동구권이었다. 서방의 언론은 이를 이용하여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로 콩고의 내전을 호도하여 루뭄바의 제거가 민주주의의 확고한 승리라는 것을 선전하였다. 이것은 민족주의자 호지명을 서방이 몰아붙여 공산주의쪽으로 기울게한  베트남의 상황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콩고에서 서방의 승리는 촘베도 아니었다. 미국의 지원을 획득한 모부투가 차지하였다. 그는 콩고의 이름을 자이레로 바꾸고 표범가죽으로 만든 모자-그것도 아프리카 특산품이 아니라 프랑스의 고급양복점에서 만든 것-를 쓴 것으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그 이후 자이레는 콩고의 혼란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지금도...

미래적 현실 다섯

아프리카는 어떻게 변모해 갈 것인가? 서구에 의해 인위적으로 분할된 경계선은 아프리카를 언제나 끔직한 '태양의 눈물'로 만들지도 모른다. 다양한 인종과 언어는 하나의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에 편입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그런 예는 70년대 초의 나이지리아 내전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사실 아프리카에서 종족과 국가가 일치하는 경우는 사하라 이북의 북아프리카 뿐이다. 그 이남의 국가에서는 종족과 경계가 일치하는 경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것은 서구 식민제국이 자신들의 편의에 의해 경계선을 고의적으로 확정하였기 때문이다. '결코 화합할 수 없게 하라'란 식민지 정책의 철저한 구호 아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아프리카의 경계선은 아프리카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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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왕의 유령 - 아프리카의 비극, 제국주의의 탐욕 그리고 저항에 관한 이야기
아담 호크쉴드 지음, 이종인 옮김 / 무우수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오래 전 지리시간에 사회과부도를 보면서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도배되어 있던 아프리카의 중앙부 거대한 지역이 벨기에의 식민지라는 사실이었다. 당시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것은 지도상으로 손톱의 1/3 밖에 되지 않는 벨기에가 어떻게 손바닥만한 거대한 지역을 소유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벨기에가 그 넓은 지역을 손에 넣는 동안 제국주의 강대국 영국과 프랑스 심지어는 인접한 식민지 소유국가였던 독일과 포르투갈이 아무런 재제를 가하지 않았을까?  딩시에 나는 벨기에의 콩고 소유가 역사적 기적이나 혹은 열강들의 이해 속에 얽혀진 하나의 실수쯤으로 여겼었다.

이런 소박하고 단순한 생각이 얼마나 바보같은 것이었는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콩고는 시작부터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의 집념과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한 노예국가였다는 점이다. 약소국 벨기에는 유럽의 대가문인 합스부르크가와 결혼에 의한 결합으로 강대국으로 상승하려 했지만 그것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고 말았다. 이런 정략이 실패하자 레오폴드는 정치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완충지대인 이 거대한 자연적 방벽을 명예욕에 사로잡힌 탐험가-이 탐험가는 우리 아이들이 읽는 위인전에 들어있는 사람이기도 하다-의 허영을 이용하여 자신의 제국으로 건설하려 하였다. 그는 당시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신봉하던 '야만에 대한 문명의 교화'라는 교묘한 수사를 이용하여 아프리카에 대한 자신의 야심과 욕심을 교묘히 숨기는데도 성공하였다. 이 결과 거대한 콩고분지르 자신의 사적 소유물화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사적 소유지에서 나온 흑인들의 땀과 피를 자신의 개인적 욕심과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사용하였다. 이런 그의 탐욕은 당시 서구 제국주의의 숨겨진 본질이었지만 그것이 레오폴드 처럼 만천하에 공개된 것은 흔치않은 것이었다.

콩고는 이렇게 서구 식민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의 얼그러진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한 개인에 의해 소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전락의 과정에서 콩고의 원주민들이 어떤 형태로든 개입된 흔적은 없다는 점이 콩고의 비극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어떤 식민주의자들의 허식-교육제도, 원주민 관리, 평등이란 구호와 같은 것-이 접목되지 않았다. 콩고는 처음 백인이 발을 디딘 순간부터 철저하게 한 백인의 개인 소유물이 되어 수탈되고 파괴되었던 것이다. 그 은밀성과 잔혹함이 세상에 드러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했는데 그것은 콩고가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물이기에 그런 것이었다. 여기에는 국익이 아니라 개인의 욕심만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 어떤 도덕적 구호나 신념도 이익이라는 현실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 양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콩고에서의 수탈과 잔학행위가 서구사회에 알려지게 된 것은 소수의 양심있는 선각자들 때문이었다. 이들은 콩고를 착취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차원에서 바라본 최초의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이 전도되었을 때 문명과 야만의 공식 또한 어떻게 바뀌는가를 철저히 검증하였던 것이다. 사실 콩고에서의 문제를 보면 백인=문명, 흑인=야만이라는 등식은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오히려 백인=야만, 흑인=문명으로 전도된다.

콩고문제는 그 땅의 소유주였던 레오폴드가 사망하면서 소유권이 개인에서 벨기에 국가로 넘어가면서 일단락된다. 그것은 완벽한 해결이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을 콘크리트로 덮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강력한 콘크리트의 균열 사이로 존재된 모순의 새싹이 솟아 오름으로서 콩고는 60년대초에 독립국가로 변신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무서운 사실은 '인간은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과 투쟁하며 그 증오의 모든 것을 배운다'라는 점이다. 독립국 콩고의 지배자들은 인종적 색만 바뀌었을 뿐 그 착취의 농도와 대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옛날 고대나 중세 시대에 살인행위를 목격하거나 그 현장을 본 사람이 추적의 고함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 역시 살인자와 동일한 취급을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죄에 대해서만은 우리 인류 모두가 연대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준엄한 신의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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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8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이 책을 파시나요?

- 2020-08-28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사고 싶은데 구매할 수 있는 곳이 없네요..

dohyosae 2020-08-29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는 책이라....
인천 아벨 서점에 한번 알아보시면 어떨런지요.
 
마술의 그림들
아니타 알부스 지음, 배진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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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유럽과 동아시아의 역사를 읽다보면 아주 근접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질서'라는 부분이다. 유럽은 신적 질서의 지상적 구현이라는 큰 틀 안에서 사회분화가 이루어진 반면에 동양은 신의 대리자로서의 절대군주의 강림에 의한 직접적인 하늘의 질서를 구현한다는 점이다. 이 두 관점은 아주 다른듯 하면서도 서로 유사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질서를 구현한 것은 사회체제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하였다. 서양이 창조에 바탕을 둔 질서였다면 동양은 하늘의 뜻을 구현하는 질서였다. 창조와 천명은 동서양 질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천명을 강조한 동양적 질서는 덕을 앞에 내세운 반면 창조적 질서의 서양은 믿음이었다.

믿음의 토대는 창조질서가 지상에 착오없이 시행되는 것을 의미했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명백한 것. 이런것이 바로 확실한 창조질서가 지상에 드러나는 것이었다. 즉 자연질서처럼 분명하게 반복되어 지는 것이 바로 구세주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반복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런 자연적 질서의 명확함은 유럽인들에게 자연의 이해라는 부분을 또 다른 숙제로 제공하였다. 즉 자연을 이해하면, 아니 자연의 질서를 파악하면 창조질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발상에서 16세기의 유럽인들은 식물과 지도와 같은 분야로 눈길을 돌렸다. 무수히 그려진 세밀한 식물의 모습은 유사성이란 개념을 통해 식물과 동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결국에는 아담이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듯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이는 유럽이 곧 새로운 아담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식물의 종,속,과,강,목의 이름을 정하는데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지도 역시 이런 창조적 질서의 산물이었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불분명한 부분이 있어서는 안되었다. 왜냐하면 신이 불분명하게 창조한 부분이 있다면 그 자체로 완벽한 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신은 숨겨는 놓되 결코 불확실하게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이 유럽인들의 신념이었다. 그 숨겨논 부분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신적인 창조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당연히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가야했고, 그 숨겨진 부분이 자신들의 눈 앞에 드러나는 것이 바로 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들이 추구한 것이 신을 영광이었고, 개인의 명예였던 간에 분명한 것은 창조질서라는 믿음 위에 유럽인들은 과학의 질서를 교묘히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그것은 창조주의 대우주에 비견되는 순전히 인간이 만들어낸 소우주의 질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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