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이유 - 중세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 역사도서관 005 역사도서관 5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 지음, 유희수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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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기 피레네 산맥 언저리에 한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중세 프랑스의 여느 마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몇 가구 안되는 마을의 구성원들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일부는 결혼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을 중앙에는 조그만 성당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관장하고 있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마을 신부는 마을 구성원들의 고해성사를 집행하고 미사를 거행한다.

하지만 이렇게 평화롭게 보이는 이 마을은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악의 소굴이었다. 그들이 매일 거행하는 미사는 형식적인 것이었고, 이들은 정통 가톨릭 보다는 이단 카타르파에 가까운 종교를 신봉하였다. 이는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에 나오는 '메노키오'의 입장과 비슷한 모습을 이 몽타이유 마을의 구성원들은 보여주고 있다. 이론에 근거한 신앙보다는 자신들의 경험에서 유추된 걸러지지 않은 거친 종교적 신념은 이단으로 단죄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성의 판단보다 감성에 좌우되던 중세의 분위기 속에서 몽타이유의 주민들은 일방적으로 유죄라고 판단될 수 있을까?

이 책에는 사제의 帶妻라든가 근친혼과 같은 불길한 요인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제의 대처는 중세 내내 교회를 괴롭힌 가시였다. 교회는 사제들에게 파문이라든가 지옥의 불과 같은 격정적인 감정으로 아내를 갖는 것은 죄악이라고 설파했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근절하지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근친혼 역시 교회는 일반 사람들에게 강요할 입장이 아니었다. 지배층은 권력이라는 파이를 쪼개지 않기 위해 근친혼을 서슴치 않았고, 교회는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중세적 분위기는 종교와 삶이 일치되어 있던 중세에 일탈의 장을 마련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카니발이라든가 바보祭와 같은 열정의 분출구를 마련했던 것이다.

몽타이유 마을은 피레네 산맥 언저리에 위치해 있는 관계로 마을 주민의 다수는 목축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날씨가 풀리는 봄에 산맥으로 올라갔다 추워지기 시작하는 가을에 마을로 돌아오는 이동식 유목을 하였다. 이 결과 마을의 주민들은 피레네 산맥과 그 부근의 목초지를 규칙적으로 오가는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마을은 프랑스 이단의 본거지인 알비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관계로 카타리파의 이단과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주민들에게 불행하였던 것은 정통과 이단의 구분이 모호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에 가까운 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들 신앙을 지도해야할 사제마저도 종교적 소명감과 확신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이 몽타이유라는 마을이 '민중기독교'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몽타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중세를 완벽하게 제어하게되는 16세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교가 유럽의 종교로 정착하게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였다.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간에 루터 이후에는 종교적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들의 규칙-교리-을 따르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전까지는 중세 유럽의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전통종교와의 혼합적인 성격이 강했다. 하느님은 토르나 오딘의 혼합체로 이해되었고, 마리아는 대지의 여신과 별다른 구별이 없었다. 민중들에게는 세상을 주제하는 절대자가 한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면 자신들이 숭배하는 대지의 여신과 별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교회 역시 민중들의 이런 사고방식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통제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대중의 무지몽매함도  한 몫했지만 정말로 큰 이유는 사제 계급의 학문적 미성숙에 기인하였다. 이런 여러가지 요인들이 합쳐져 몽타이유의 비극이 배태되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중세의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모습-어쩌면 궁핍한-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읽어 볼 만한 책이라 하겠다. 다만 중세의 기본적 지식이 없다면 이 방대한 서술이 지루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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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
존 르 카레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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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르 카레의 작품에는 일관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직업세계에 대한 애틋함이다. 그의 시선에는 첩보영화의 상투성, 예를들면, '죽이기 전에 말해주지'와 같은 것이 없다. 그 세계에도 우리들이 느끼고 접촉하는 똑같은 현실이 있지만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뿐이다. 우리들은 커피 솦에 들어가면서 그곳에 사람이 몇 명 있고, 화장실은 어디이며, 비상구가 어느 쪽인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르 카레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눈에 띠지 않는 곳을 찾아 앉는다. 이런 일상의 긴장은 그 세계의 사람들에게 우울함과 고독함을 덤으로 주고 있다.

이 소설에 르 카레의 후기 작품에 나오는 중요인물들이 다 등장한다. 그들의 과거가 언뜻 언뜻 드러나는 과정에서 스파이 세계의 관계가 드러난다. 인간사에서도 그렇다. 언제 어디서 한번 만났던 사람들이 반대 세력의 정상에 앉게되면 그 만남의 순간은 증오로 혹은 우정으로 기억된다. 그러면서도 이들 사이에는 기묘한 우정이 싹튼다. 상대를 존중하면 존중할 수록 그 기묘함은 극대화 된다. 이 세계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세계처럼 그 고통의 순간이 일순간에 망각되었다가 어느 한 순간 -예를 들면 슈베르트의 음악-폭발되는 그런 상황이 결코 아니다. 이 세계는 우연의 연속이란 없다.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체스판을 응시하는 전문가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 지루한 과정을 기다리며 득실을 계산한다. 가장 하찮은 폰은 네 개가 룩이나 비숍 한 개와 같은 가치이고 룩이나 비숍 두 개는 퀸 하나와 같은 것이라는 등가의 법칙을 머리속에 그린다. 자신의 폰이 하나 상실되었다면 상대의 폰 하나를 어떻게하든 뺐어와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르 카레가 바라본 스마일리의 세계인 것이다.

이 평범함을 가장한 세계를 슬픈 낭만이라고 불러야하나. 레비 스트로스는 사라져가는 원시를 '슬픈 열대'라고 표현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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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의 巡禮旅行:산티야고1)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중심으로

 성지가 ‘종교적인 유적이 있는 곳’이라고 넓게 정의 된다면 중세 유럽은 전체가 성지였을지도 모른다. 각 지역마다2, 마을마다 중세 유럽인들은 자신들만의 성인을 탄생시켰고, 그 장소를 성지로 신성시하였다. 그러나 성지를 ‘종교의 발상지나 순교가 있었던 곳’으로 축소 해석한다면 중세 유럽인들의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인 ‘예루살렘Jerusalem’, 그리스도교 최고의 수장이 머무는 교황의 도시 ‘로마Roma’,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의 갈리시아 지방에 있던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다. 굳이 한 곳을 더 추가한다면 잉글랜드 인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던 ‘캔터베리Canterbury2)가 있었다. 이 네 장소는 중세 유럽인들이 평생 한 번은 순례를 해봤으면 하는 성지였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왜 이렇게 성지 순례에 집착하였을까. 그것은 ‘종교적 열정’과 ‘속죄’와 ‘질병의 치유’를 위한 것이었다. 죄에 대한 그 보속補贖의 차원에서 성지 순례는 민중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부채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순례 여행의 과정에서 겪은 ‘경이로움과 신기함이 모두다 신앙의 열정 속에 응집되어 녹아들었다’는 점이다. 순례자들은 여행을 통해 육체적인 어려움과 ‘세속과 자연이 주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의 섭리와 손길을 느꼈다. 즉 순례의 과정 전체가 하나의 종교적 체험이었던 셈이다.

  시골이나 혹은 다른 도시에서 온 순례자들이 하나의 무리를 이뤄 시작하는 순례여행은 다양한 문화의 혼합체였다. 그 다양함은 수많은 전설적 회상의 원초적인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런 복잡한 순례자들의 구성은 자연스럽게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하게 하였다. 잉글랜드인은 잉글랜드 인끼리, 부르고뉴 인들은 부르고뉴 인끼리,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끼리 자연스럽게 모여 여행의 집단을 이루었다.

  그리고 집결지에서 성지까지 이어지는 도로와 마을 주변에 널려있는 성당과 수도원과 성인들의 유물 등을 통해 자신들이 정말로 오래 전에 잊어버린 종교적 열정을 되살려 내었다. 이런 신산한 순례의 과정은 금욕과 극기와 고행이 혼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순례 여행을 마친 순례자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영광에 동참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순례 여행을 통해 자신이 그 동안 저지른 죄를 보속하고 속죄하였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종교적 이유로 해서 중세 유럽에서는 종교적 순례 여행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중세 유럽인들이 평생에 한 번 순례하고자 했던 성지는 예루살렘이었다. 왜냐하면 이 거룩한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세 전 기간 내내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 최대의 순례 장소였다. 로마는 종교의 분열 이후 가톨릭 세계의 성지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 전에는 그리스도교 수장이 거처하는 장소이면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지로서 성지 순례자들에게 매력이 있는 도시였다. 특히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로마는 중세 인들에게 또 다른 의미로 각인된 성지가 되었다. 캔터베리는 대륙에서 벗어나 잉글랜드 섬에 위치해 있었지만 토머스 베켓의 순교 장소로서 그리스도교 인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안겨 주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곳은 대륙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의미의 또 다른 세계였다.

  이베리아 반도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3)는 피레네 산맥 너머에 자리 잡은 도시로서 중세 유럽인들에게 낮선 장소였다. 중세 인들에게 스페인은 유럽이라기보다는 아프리카나 이슬람 이교도의 세계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하지만 이 거칠고 황량한 땅에 자리 잡은 그리스도교 성지는 상당히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콤포스텔라에서 나온 기록에 따르면 829년, 844년, 854년에 각각 성 야고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알퐁소2세가 성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들과 함께 즉위 직후 이곳을 찾아와 경배한 뒤 대리석으로 된 관 위에 돌과 점토로 성소를 세우도록 명령하였고 이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안테알타레스Antealtares수도원을 짓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성지의 성인인 야고보가 스페인의 수호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844년 그리스도교 왕인 라미로Ramiro가 클라비호Clavijo에서 무어인들과 전투를 벌일 때 성 야고보가 기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교도를 물리칠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전설에 접목되어 있다. 이때부터 성 야고보는 ‘마타모어Matamore' 즉, 무어인의 정벌자란 칭호를 얻게 되었고, 서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어 이곳으로의 순례가 시작되었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외국인 순례자는 프랑스의 주교인 고테스칼크Gotescalc였다. 르 퓌Le Puy의 주교였던 그는 950년 경 시종들을 거느리고 성지를 찾아왔다. 주교는 도보가 아닌 말을 타고 성지 순례를 했다고 한다.

  11세기 들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리스도교도가 이슬람교도에 대한 재 반격을 통해 반도의 재정복Reconquista에 나서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대한 순례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1099년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되었지만 이슬람교도들은 1187년 다시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도들의 손에서 탈환하였다. 이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부분적으로 폐쇄되었다. 이 결과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순례 여행을 로마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4) 이런 역사의 흐름은 이베리아 반도의 미래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교도는 이베리아 반도 북쪽의 일부지역-갈리시아, 카스티야, 나바라, 카탈루냐-에 겨우 근거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유럽에서 갈리시아 지역의 콤포스텔라로 성지순례가 시작되면서 그리스도교도들의 인적 자원이 이베리아 반도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순례자뿐만 아니라 모험을 즐기는 사람, 기사 편력자,5) 장사치들이 모여 들어 이베리아 반도 재정복6)의 십자군 운동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종교적 운동은 서유럽 사람들에게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이 결과 콤포스텔라는 새로운 종교적 순례지가 되었다. 이 순례지는 지리적인 위치에 의해 순례자들은 대부분 프랑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중세 프랑스의 뚜르Tours, 베즐레Vezeley, 르 퓌Le Puy, 아를르Arles는 콤포스텔라 성지 순례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이 출발점은 프랑스와 이베리아 반도를 가르는 피레네 산맥의 두 곳-롱스보Renceveaux와 송포르Somport 통로-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와 연결되었다.(지도1참조)

  프랑스에 있는 성지 순례의 출발지 역시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뚜르는 ‘골Gaule족의 성자’로 추앙받는 성 마르땡Martin의 도시7)이고, 베즐레는 마리 마들렌느Marie Madeleine-마리아 막달레나-의 유해가 모셔진 도시였다. 르 퓌는 5세기 이래로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도시였으며, 아를르는 남프랑스의 유서 깊은 종교적 도시였다.8)

  순례의 길은 거룩함의 여행이면서 세속의 비열함이 난무하는 장소였다. 굳이 성서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중세 시대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길은 잡초로 뒤덮였고, 로마가 이루어 놓은 도로망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도로 중간 중간이 유실되어 마차로 여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중간 지대는 숲으로 뒤덮여 있었고 숲에는 늑대와 도적들이 사시사철 잠복해 있으면서 나약한 여행객을 노리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세의 농민들은 자신들의 장원을 빠져나와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종교사회였던 유럽 중세는 어떤 이유에서도 귀족이나 농민들의 성지순례의 열정을 제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중세 유럽인들은 성지 순례를 떠날 때면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집단을 이뤄 함께 떠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와 인접해 있던 프랑스는 산티야고 데 콤포스텔라 성지 순례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 결과 중세 프랑스는 콤포스텔라로 성지 순례를 떠나는 출발지점의 도시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앞의 지도는 12세기 프랑스에서 출판된 “순례자의 가이드”라는 책에 나온 순례의 길을 지도상으로 구성한 것이다. 지도에서 보듯 순례자들의 집합장소는 프랑스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고, 이 도시들로부터 다양한 지역을 지나 국경지대인 송포르와 롱스보에서 일차적으로 합류하여 국경을 넘은 다음 푸엔타-라-레이나에서 각지의 순례자들은 합류하여 스페인의 콤포스텔라로 향하였다. 이 순례의 여정에는 케른Cairn-중세에는 몽주아(나의 기쁨)이라고 불렀던 돌무더기들이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9) 이렇게 이들은 전설 속에서나 만나던 “생쟈크의 길Chemin de Saint Jacques"을 따라 갔던 것이다.10) 성지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교회와 성유물에 참배하고 대제단 위에 있는 성 야고보의 동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콤포스텔라로 순례의 여정을 마친 사람들은 “쟈케Jacquets"라는 명예로운 칭호로 불렸다. 하지만 이런 명예로운 칭호를 받는 순례자들의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콤포스텔라로의 여정 길은 평균 6개월이었다. 그러기에 순례자들은 봄이나 초여름에 순례를 시작해야만 했다. 그래도 이렇게 서둘러 시작한 순례의 마지막은 겨울의 초입이 되어야만 끝났다.

  순례를 마친 사람들 가운데 열성적인 사람들은 콤포스텔라에서 자신들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소수의 열성자들은 성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돌배石舟에 실려 왔다고 하는 바닷가까지 자신들의 순례 여행을 연장시켰다. 이들은 이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주워 자신의 바랑이나 지팡이에 매달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순례자는 교회 앞에서 파는 조개껍질이나 납으로 만든 모형을 구입하였다. 이 조개껍질은 순례의 완성을 증명하는 증표이면서 순례자의 호신부가 되었다.11)

  당시 순례는 도보가 원칙이었다. 이들 콤포스텔라 순례자들에게 프랑스와 이베리아 반도의 경계에 위치한 피레네 산맥은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이 산맥에는 예전부터 산적과 추위가 여행자들을 항상 괴롭혔다. 이런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콤포스텔라 순례자들은 무리를 지어 산맥을 넘었고, 피레네 산맥 곳곳에는 무료 숙소와 수도원들이 순례자들을 위해 규칙적인 간격으로 위치해 있었다. 이들 무료 숙소12)와 수도원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종을 울려 순례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콤포스텔라 순례13)의 절정기는 12세기였다. 이 열정의 시대가 지나가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1337-1453으로 순례의 출발지인 프랑스가 전쟁터로 화함으로서 콤포스텔라 순례의 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16세기에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유럽 전체가 혼란에 휩싸임으로서 순례여행 자체에 큰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민중들 사이에서도 성자와 성자의 유해를 숭배하는 성지순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유럽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함으로서 감성적인 종교에서 이성적인 과학의 세기로 접어들게 된다.

 

1)신약성서에는 세 사람의 야고보가 등장한다. 대야고보, 소야고보, 예수의 형제 혹은 사촌으로 추정되는 야고보가 그들이다. 대야고보는 제베대오와 살로메의 아들이고, 소야고보는 알페오의 아들로 나온다. 여기서 이베리아 반도를 복음화하기 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은 대야고보이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에스파냐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이 세 명의 야고보는 분리와 융합을 통해 하나의 국가적 원형을 창조하게 된다.
성 야고보의 에스파냐 선교에 관한 것은 쟈크 드 보라진 Jacques de Voragine의 <황금전설La legende doree>을 참조할 것.

2) 국가의 개념이 정립된 것은 근대 이후이다. 그 전에는 국가보다는 자신의 지역에 더 충실하였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자신을 가스코뉴 사람이나 부르고뉴 사람으로 불렀고, 지금의 영국인들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하였다.  

3) 성지순례의 과정을 보고자 한다면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전체서문을 참조할 것. 잉글랜드에 한정된 이야기이지만 성지순례의 준비과정과 순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활기차게 묘사한 초서의 글을 통해 중세 성지순례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캔터베리는 잉글랜드 인들의 성지였다. 그러므로 이 성지는 헨리8세의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세계에서는 잊혀 진 장소가 되었다.

4) 콤포스텔라Compostela란 지명의 어원은 9세기 초 은둔수도자 펠라기우스가 꿈에 성야고보의 시신이 뭍힌 장소가 현현하자 이를 찾아 나설 때 별이 안내하였다는데서 유래하였다. ‘별들의 들판campus stellae'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1950년대 말 콤포스텔라 성당을 정밀 조사한 결과 이 성당의 지하가 6세기까지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래서 일군의 학자들은 지하공동묘지를 뜻하는 라틴어 콤포스툼Compostum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다.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순전히 개인의 몫이라 할 수 있다.

5) 당시 사람들은 로마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사람을 ‘로미유Roumieux’라고 부르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떠나는 사람을 '쟈케Jacquets'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것은 중세 서유럽의 성지 순례가 예루살렘의 공백을 통해 로마와 콤포스텔라로 양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기사 편력자에 대해서는 한길 출판사에서 나온 ‘위대한 기사, 윌리엄 마셜’을 참고할 것. 특히 1부 <죽음>편을 읽어 볼 것. 당시 중세 유럽의 상속제도와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으며, 장자 이외의 상속자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7) 현대의 역사가들은 스페인의 역사에서 재정복Reconquista라는 단어를 신중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에스파냐 역사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압축되고 단순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의 역사적 복합성이 쉽게 무시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까치, <스페인사>, 3장 초기중세시대를 참조할 것.

8) 성 마르땡이 뭍힌 장소는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의 성소였다.

9) 이 시기의 도시 형성에 관해 기본적인 성격을 이해하려면 앙리 피렌느의 <중세 유럽의 도시> 제3장 키비타스와 부르구스를 참조할 것. 도시 형성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10) 쟈크 르 고프, 중세에 살기, 동문선, 2000년, p61

11) 프랑스인들은 은하수를 생쟈크의 길이라고 부른다. 알퐁소 도데의 단편 “별”에도 목동이 주인아가씨 스테파네트에게 은하수를 가리키며 생쟈크의 길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도 생쟈크의 길은 샤를마뉴와 사라센간에 벌어졌던 전쟁과 전설이 혼합되어 있다.

12) Flos Santorum이란 양피지에 기록된 전설에 따르면, 성 야고보의 시신을 실은 배가 갈리시아의 바닷가를 지날 때 한 기사의 결혼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기사가 갑자기 파도가 높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바다가 잠잠해 지고 기사가 살아나왔는데 그의 마구에는 온통 가리비조개가 붙어있었다. 이후 가리비 조개는 순례의 상징이 되었다.

13) 중세에는 병원Hospital과 구호소Hospice란 말은 동의어였다.

14) 콤포스텔라의 순례에 관해서는 쟈크 르 고프의 <중세에 살기> 가운데 콤포스텔라 순례자들의 일상생활을 참조할 것. 그리고 프랑스 어문교육 제15집에 수록된 서울여자대학교 박동찬 교수의 <생쟈크 드 콩포스텔르로의 순례여행에 관하여>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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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을 읽고 있다. 이 책은 제목이 아주 근사하다. 우리들의 관심사인 대중과 반역이라는 가장 첨예한 단어를 조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제목의 파격에 비해 그리 많이 읽혀진 책은 아니다. 지금도 대중의 반역은 일어나고 있다. 우리들이 거리에서 혹은 모임에서 울분을 토하며 불평불만을 배출할 때 대중의 반역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중의 울분이 엘리아스 카네티가 이야기한 열린군중으로 방전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행동과 결과가 없는 대중의 반역은 어쩌면 말안주거리 밖에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뇌리에 계속 나타난 영상이 하나 있다. 사진작가 육명심 선생의 작품인데 제목은 확실치 않다. 흑백 사진으로 한 여인이 素服을 입고 슬프게 울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는 개인들은 슬픔의 한 구석에 자리잡은 에로티시즘을 발견하게된다. 슬프면서 섹시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육명심 선생은 그 순간을 기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대중의 반역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진지하다고 생각되는 이면에 엉뚱함이 숨어있는.. 그래서 오르테가는 대중의 반역에서 돈퀴호테의 말을 인용한다. "이유를 안가진 권리", "도리없는 도리".

대중의 반역은 여러가지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중세 유럽에서 귀족들만이 帶劍의 권리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 권리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부류는 사형집행인이었다. 사형집행인은 자신이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직업은 한번 선택하면 영원히 대대손손 지속되어야하는 직업이었다. 그러기에 이 기묘한 직업을 선택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권력자들은 사형집행인에게 칼을 착용하게하고, 귀족들만이 할 수 있는 세금수입권을 부여하였다. 세금수입권이란 장터에서 한줌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사형집행인은 장이 서는 날 자신의 손에 잡히는 것을 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이런 권리가 있었음에도 웬만한 사람들은 사형집행인이 되려 하지 않았다. 그 직업을 선택한 순간부터 자신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帶劍의 권리는 일반 대중의 家長들이 암암리에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 일반 대중의 가장들은 접는 칼 혹은 주머니 칼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가장들은 식탁에서 빵을 자를 때 자신의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가족들이 먹을 빵을 잘랐다. 바로 이 사소함이 바로 대중의 반역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가장들은 자신들이 귀족들에게 이 행위가 반역이라고 생각했을까?

이것이 바로 돈퀴호테식의 "이유를 안가진 권리"이며 "도리없는 도리"인 것이다.

또 생각할 것은 "進步"라는 것이다. 문명은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흘러간다. 즉 분화되어 가는 것이다. 옛날에는 장인 한 사람이 모든 공정을 혼자 하면서 제품을 하나 만들었지만 문명이 발전하면서 장인은 도제를 거느리고 작업상황을 분화시킨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밀하게 분화된 작업의 전과정을 장인 이외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바로 이점이 맑스가 "노동의 소외"를 착안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된 것은 대중이라는 거대한 생물체가 수단이 부족하기에 그런것이 아니다. 하나의 대중이 거대한 집합체가 되었을 때 이를 지도할 두뇌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관계에서 우열을 평등이나 동일이라는 단어로 재단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기묘한 특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카스틸랴는 넓은 것이다"

얼마 전까지 세상은 지배구조가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였다. 다수는 이 소수로부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것이 바로 혁명의 역사이다. 하지만 다수는 언제나 옳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좀더 넓게 생각해 봐야만 한다. 왜냐하면 대중이란 평균적이란 의미에서 볼 때 자질이 없는 개인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단순함을 비판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무리"를 구별한다. 축제적 성격이 강한 군중과 종교적 성격이 강한 무리를 구별하면서 대중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대중은 소수의 지배자로부터 그들의 권리를 자신들의 권리로 확대하였다. 소수는 이제 다수의 수에 의해 눌리는 신세가 되었다. 권력을 향유한 소수는 언제나 개인주의를 부르짖는다. 소수자들은 유능한 소수로부터 권력을 쟁취하기를 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는 다수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결을 시도한다. 이 얼마나....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은 책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얼마전에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유사한 문제가 터져나왔다. 한 영화를 보면서 전문가 집단과 대중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불붙었다. 그 논쟁을 보면서 "소수의 존재로 인해 다수자의 부재를 강요"하는 현상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다수는 수적으로 누르려 하였고, 소수는 다수의 무식함을 공격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수는 거대하다는 것 이외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소수의 공격으로부터 다수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수의 집단은 또 분화를 해야만 한다. 그 결과 다수로부터 또 다른 소수가 태어나게 된다. 소수는 다수의 수적 도전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왜냐하면 소수는 다수에게 옛날부터 수적으로 절대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소수는 자신들만의 이론을 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카스틸랴는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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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1972
아론 J. 클라인 지음, 문일윤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이스라엘은 1967년 6일전쟁의 승리로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아랍제국과의 완충지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집트와는 시나이반도를 요르단으로부터는 서안지역을 시리아와는 골란고원이라는 완충지역을 확보하였다. 이 결과 이스라엘 땅으로 아랍제국의 폭탄이 직접 날아오는 일이 없게되었다. 이런 완충지대의 확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안보에 대하여 약간 느슨한 감정을 가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모르고 있었던 사실은 1967년 이후 이스라엘 지역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자신들의 땅을 수복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서구제국에 이스라엘의 부당함을 호소한다면 자신들의 노력이 성취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들의 순진한 믿음이 오산이었다는 점은 금새 드러나고 말았다. 이에 팔레스타인측에서는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는 방법을 온건한 쪽에서 폭력쪽으로 이동시켰다. 이 결과 70년대 들어오면서 유럽지역은 팔레스타인 전사들의 테러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한 팔레스타인 정첵에 있어서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런 이스라엘의 정책이 변하는 시점이 바로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사건이다.

뮌헨에서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이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에 의해 살해당하자 이스라엘은 기존의 온건한 방식에서 탈리오의 법칙으로 선회하게 된다. 그것은 외적으로는 무고한 시민에 대한 테러응징이라는 명분을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이면에는 점점 조직화되어 가는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에 대한 쐐기를 박고자하는 열망이 강했다. 즉 이스라엘은 제2차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 희생국임에도 불구하고 더 큰 악을 제거하기 위해 뿌리를 제거한다는 히틀러의 노선을 자신들도 모르게 답습해 나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 싯점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의회민주주의의 탈을 쓴 경찰국가로 급속하게 변모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종교적 과격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종교적 과격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라고 공공연하게 목청높임으로서 이스라엘의 준제국주의적 정책에 가속도를 붙게 하였다. 그래서일까 이스라엘은 유엔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점령한 영토를 자국으로 편입시키고 말았다. 어쩌면 1972년 뮌헨은 이스라엘이 준제국주의로 나가기 위한 하나의 구실 혹은 발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뮌헨 테러와 관련이 있는 검은 9월단의 암살집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암살에 대한 극적인 요소는 없다. 하지만 암살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모해 가는 정당성을 확보해 가는 추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정말로 끔찍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에피소드

미국의 수영선수 마크 스피츠는 수영에서 7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개인 최다 기록. 그도 유대인피가 섞여있어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북한은 뮌헨 올림픽에 처음으로 출전하였다. 당시 생방송으로 중계하던 입장식 광경에서 갑자기 화면이 바뀌며 스튜디오의 해설자 모습이 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한 뒤 다시 화면이 뮌헨 스타디움으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그때 북한 선수단이 입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들은 스타디움 반대편으로 인공기를 들고 걸어가는 북한 선수단을 찾을 수 있었다.

북한의 사격선수 이호준이 금메달을 딴 뒤에 프레스 센터에서 기자들과 회견하였다. 기자들이 어떤 심정으로 사격을 했는지 묻자, 이호준은 '미제-MADE in USA가 아니라 美帝-의 가슴에 총알을 박는 심정으로 쏘았다'라고 대답하였다.

뮌헨 올림픽에서  올림픽 마스코트가 처음 등장하였다. 뮌헨의 마스코트는 허리가 긴 닥스훈트를 회화화한 발디Waldi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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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10-07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첨 글 남깁니다.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도효새님은 대학에서 서양 중세사 가르치시나요?

dohyosae 2007-10-11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심술님. 그냥 취미로 서양중세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서재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술 2007-10-11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알았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