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을 읽고 있다. 이 책은 제목이 아주 근사하다. 우리들의 관심사인 대중과 반역이라는 가장 첨예한 단어를 조합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제목의 파격에 비해 그리 많이 읽혀진 책은 아니다. 지금도 대중의 반역은 일어나고 있다. 우리들이 거리에서 혹은 모임에서 울분을 토하며 불평불만을 배출할 때 대중의 반역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중의 울분이 엘리아스 카네티가 이야기한 열린군중으로 방전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행동과 결과가 없는 대중의 반역은 어쩌면 말안주거리 밖에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뇌리에 계속 나타난 영상이 하나 있다. 사진작가 육명심 선생의 작품인데 제목은 확실치 않다. 흑백 사진으로 한 여인이 素服을 입고 슬프게 울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는 개인들은 슬픔의 한 구석에 자리잡은 에로티시즘을 발견하게된다. 슬프면서 섹시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육명심 선생은 그 순간을 기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대중의 반역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진지하다고 생각되는 이면에 엉뚱함이 숨어있는.. 그래서 오르테가는 대중의 반역에서 돈퀴호테의 말을 인용한다. "이유를 안가진 권리", "도리없는 도리".
대중의 반역은 여러가지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중세 유럽에서 귀족들만이 帶劍의 권리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 권리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부류는 사형집행인이었다. 사형집행인은 자신이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직업은 한번 선택하면 영원히 대대손손 지속되어야하는 직업이었다. 그러기에 이 기묘한 직업을 선택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권력자들은 사형집행인에게 칼을 착용하게하고, 귀족들만이 할 수 있는 세금수입권을 부여하였다. 세금수입권이란 장터에서 한줌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사형집행인은 장이 서는 날 자신의 손에 잡히는 것을 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이런 권리가 있었음에도 웬만한 사람들은 사형집행인이 되려 하지 않았다. 그 직업을 선택한 순간부터 자신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帶劍의 권리는 일반 대중의 家長들이 암암리에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 일반 대중의 가장들은 접는 칼 혹은 주머니 칼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가장들은 식탁에서 빵을 자를 때 자신의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가족들이 먹을 빵을 잘랐다. 바로 이 사소함이 바로 대중의 반역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가장들은 자신들이 귀족들에게 이 행위가 반역이라고 생각했을까?
이것이 바로 돈퀴호테식의 "이유를 안가진 권리"이며 "도리없는 도리"인 것이다.
또 생각할 것은 "進步"라는 것이다. 문명은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흘러간다. 즉 분화되어 가는 것이다. 옛날에는 장인 한 사람이 모든 공정을 혼자 하면서 제품을 하나 만들었지만 문명이 발전하면서 장인은 도제를 거느리고 작업상황을 분화시킨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밀하게 분화된 작업의 전과정을 장인 이외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바로 이점이 맑스가 "노동의 소외"를 착안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된 것은 대중이라는 거대한 생물체가 수단이 부족하기에 그런것이 아니다. 하나의 대중이 거대한 집합체가 되었을 때 이를 지도할 두뇌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관계에서 우열을 평등이나 동일이라는 단어로 재단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기묘한 특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카스틸랴는 넓은 것이다"
얼마 전까지 세상은 지배구조가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였다. 다수는 이 소수로부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것이 바로 혁명의 역사이다. 하지만 다수는 언제나 옳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좀더 넓게 생각해 봐야만 한다. 왜냐하면 대중이란 평균적이란 의미에서 볼 때 자질이 없는 개인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단순함을 비판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무리"를 구별한다. 축제적 성격이 강한 군중과 종교적 성격이 강한 무리를 구별하면서 대중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대중은 소수의 지배자로부터 그들의 권리를 자신들의 권리로 확대하였다. 소수는 이제 다수의 수에 의해 눌리는 신세가 되었다. 권력을 향유한 소수는 언제나 개인주의를 부르짖는다. 소수자들은 유능한 소수로부터 권력을 쟁취하기를 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는 다수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단결을 시도한다. 이 얼마나....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은 책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얼마전에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유사한 문제가 터져나왔다. 한 영화를 보면서 전문가 집단과 대중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불붙었다. 그 논쟁을 보면서 "소수의 존재로 인해 다수자의 부재를 강요"하는 현상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다수는 수적으로 누르려 하였고, 소수는 다수의 무식함을 공격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수는 거대하다는 것 이외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소수의 공격으로부터 다수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수의 집단은 또 분화를 해야만 한다. 그 결과 다수로부터 또 다른 소수가 태어나게 된다. 소수는 다수의 수적 도전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왜냐하면 소수는 다수에게 옛날부터 수적으로 절대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소수는 자신들만의 이론을 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카스틸랴는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