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시선 - 일본의 자유주의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와 조선문제
한상일 지음 / 새물결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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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시선"은 吉野作造(요시노 사쿠조)라는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러일전쟁에서 한일합방, 삼일운동에 이르는 시기에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사상가의 식민지관을 검토해 봄으로서 일본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吉野作造라는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의 사상을통해 일본인들의 親韓 혹은 嫌韓의 실체가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될 때 한일관계의 미래 혹은 현재가 왜 이렇게 복잡한지를 절감하게된다.

일본의 고유종교는 神道이다. 이 원시적 종교는 불교를 받아들여 의식과 철학이론을 보강하면서 종국에는 불교를 신도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본의 기독교 역시 불교와 별반 다르지 않게 발전하였다. 일본은 기독교의 장점을 재빨리 흡수한 다음 기독교를 걷어차 버렸던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서양의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다. 이때 일본은 기독교적 메시아 주의에 일본의 팽창주의 혹은 제국주의를 결합함으로서 국가주의 교회와 비슷하게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기독교도들에게 일본의 팽창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광야에서 나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즉 일본의 지정학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조선과 만주를 그리고 대만을 병합하는 것이 신의 소명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시각은 福澤諭吉(후쿠자와 유키치)이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으로 규정하면서 전쟁이 필연적이었고 일본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 명치시절의 사상과 맥이 닿아있다.

福澤諭吉 이후 일본의 지식인 사회는 다양성을 상실하고 정부 정책의 충실한 대변자로 변모하게된다. 이런 사정은 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책에 소개되는 吉野作造는 이 시기 가장 진보적이면서 개방적인 일본의 종교인이면서 지식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선에 관한 사고방식은 명치시절의 사고방식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 예로 吉野作造는 삼일운동 이후 무단통치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찍히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의 무단통치 반대는 조선의 독립이나 조선 민족의 아픔을 이해한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본 정부가 어느 선까지 적당히 후퇴해야 한다는 점을 종교적 용어로 완곡하게 말한 것 뿐이었다.

사실 삼일운동은 일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1905년 이후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조선의 식민지화 정책이 실패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몰아붙이고-법에 의해 통치-기득권 계층의 이익을 적당히 보장하면 식민지 정책이 무난하게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런 일본의 정책이 삼일운동으로 인해 커다란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吉野作造는 무단통치를 종식하고 조선인의 심성에 호소하는 좀더 온건한 정책으로 전환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동일한 교육의 혜택을 주면서 조선의 일본화를 추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 시기는 백 년 혹은 2-3세대가 흐른 후에 일본의 이런 온건한 정책이 지속된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삼일운동에서 나타난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즉 吉野作造는 종교적 심성을 가진 제국주의자였던 셈이다.

실제로 일본 교회는 明治, 大正, 昭和를 거치면서 종교의 본질적인 면을 왜곡하였다. 그 시작이 명치시대였다. 선교사들에 의해 갓 이식된 교회는 명치시대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중국을 물리친 것을 보고 일본이 새로운 신의 소명을 받은 국가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천황과 신의 나라라는 일본의 공식과 절묘하게 들어맞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이후 대정 데모크라시를 거쳐 소화시대의 태평양 전쟁까지 그리고 패전 후의 지금까지 일본의 시각은 명치 시대의 관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총칼을 앞세운 무력이 아니라 경제력을 통한 일본의 아시아적 사명 혹은 세계적 사명을 조심스럽게 전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본 교회의 국가주의적 모습과 기독교적 감성이 결합되어 "大東亞 共榮圈"사상이 탄생하였다. 즉 일본을 머리로 다른 아시아 국가는 지체로 하는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체로서의 일본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는 결코 親韓, 嫌韓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일본이라는 국가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국가라는 유기체가 왕성하게 움직일 수 있다면 무엇인든지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시선은 결코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시선을 오해하면서 거기에 부화뇌동하였을까? 그 시선의 맞춤은 지금도 결코 중단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탄하면서 "조선인은 사대상에 젖어있는 흰색과 같아서 우리들의 입맛에 맞는 색깔로 염색할 수 있다"고 호언하였다. 하지만 우리 선배들은 풍찬노숙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였고, 일본이 원하는 그 어떤 색으로 변질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감개무량한 팔월에 이런 좋은 책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더위를 잊고 읽고, 급한 마음을 정리하지 않고 써내려 두서가 없지만 여러분들의 양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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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지음, 이승수 옮김 / 이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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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본 영화가 한 편 생각난다. 자살 로봇이 있는데 그는 인간과 똑같다는 설정이었다. 그는 인류파멸이란 임무를 띠고 인간 세계에 파견되지만 기폭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 로봇은 인간 세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경험을 하게된다. 그러다 결국 그 로봇은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한다. "내가 누구지?" 바로 이 핵심적인 문장이 기폭제였던 것이다. 기계가 사유한다는 것은 결국 작동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 아닌가?

그날 밤의 거짓말을 읽으면서 생각난 것은 바로 이 상황이었다. 감옥에 갇혀 사형선고를 받는 죄수들은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고 있느냐가 핵심이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생각하면 할수록 진실에 가까이 가게되기에 결국 권력자가 원하는 비밀을 고백하게 된다. 반대로 자신의 현실을 직시한다면 진실을 말해도 혹은 거짓을 말해도 죽는다는 것을 알게된다. 자신이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배신을 하게되는 상황이고 자신이 실토하는 것이 거짓이라면 죽게되는 상황이라면 호랑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문을 여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미화한다. 월척을 너무나 꿈꾼 나머지 길이가 한자이고 두께가 한자인 뱀장어를 잡았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남자들이 자신의 관심 대상인 여성에 대한 오해일 것이다. 술좌석에서 남성들은 그 한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해보자(물론 여성의 경우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다섯의 사내가 있다면 그 여성의 다섯가지 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주관적인 관심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야기가 진행되다보면 그 여성의 객관적인 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는 점이다. 주관적인 칼날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 진실 혹은 심줄이 슬쩍 드러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괜찮다. 하지만 여기서 더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언어의 폭력이며 자신의 아집이 될 뿐이다. 그리고 진실의 히미한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하나의 환상이 자리를 잡게된다. 바로 그 절정이 피천득 선생의 아사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날 밤의 거짓말 역시 이와 유사한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芥川의 羅生門을 이야기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진실성이 시험대에 올라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이 세상의 다른 동물과는 달리 후회를 한다는 점이다. 이 색다른 점이 인간의 지적 능력 혹은 윤리성을 진보시키기도 혹은 퇴보시키기도 한다. 베드로는 닭이 세번 울기 전에 자신의 배반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유다 역시 예수의 죽음에 자신의 배반을 후회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미래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하나는 천국의 열쇠를 관장하는 위치에 섰지만 다른 하나는 지옥의 불 속으로 떨어졌다.

"그날 밤"에 어떤 거짓말이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날 밤의 "거짓말"이란 점이다. 그것은 살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 다른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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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의 모자 -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본 17세기 동서문명교류사
티모시 브룩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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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던 것은 70년대 중반이었다. 그것도 한국의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동경대학 교양강좌라는 번역물을 통해서였다. 이때 베르메르-당시에는 페르메르라고 번역했다-의 그림은 철학적인 접근으로 소개되었다. 사실 그 당시에 베르메르라는 화가와 그 그림의 배경이 되는 델푸트라는 도시는 생소함이 가미된 무관심의 도시였다. 베르메르가 기억되는 것은 그림에 드리워진 철학적 깊이감-이것도 솔직이 작가의 주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때문이었다.

사실 베르메르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간단히 생각해 볼 화가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베르메르가 활동할 당시 네덜란드는 페르낭 브로델이 말한 것처럼 세계의 도시였다. 즉 베르메르는 세계인의 관점에서 그의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가 무엇을 그렸건 간에 그것은 당시 최고의 무대에서 살았던 화가의 느낌이었다. 그는 이 도시를 통해 들어온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그것을 자신의 화폭에 표현하였다. 그는 결코 그 자신이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와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세계를 연결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메르의 세계는 정말로 신기하다. 그의 그림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같은 장소-자신이 살고 있던 2층 방-에서 같은 모델-자신의 부인인 카타리나 볼네스-을 가지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였다. 실제로 이 책에 나와있는 '장교와 웃는 소녀'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젊은 여인' '지리학자' '저울을 든 여인'의 배경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본다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주 작은 세상에서 저 넓은 세계를 바라본 한 사람의 천재적인 발상 혹은 능력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미래를 향한 혜안?! 아닐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의도하지 않았던 역사가 아니었을까? 베르메르의 세계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나비의 날개짓에 포함된 세계인의 초기 모습이 아니었을까? 베르메르는 느끼지 못했지만 이미 그 당시 네덜란드, 아니 델프트의 세계는 세계 경제의 한 축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페루와 멕시코의 은이 스페인으로 흘러오고 다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프랑스로 흘러간 다음 중국으로 흘러가는 무역의 과정을 통해 베르메르의 세계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세계화라는 범주 속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의 흐름이 오는 순간 왜 일본이 30여년 전에 이 화가를 깊이 생각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세계화는 90년대 후반에 말로만 시작되었지만, 일본의 세계화는 70년대에 이미 철학적 접근으로 구체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최고의 대학이라고 생각하는 동경대학의 신입생들을 대상을 교양강좌를 실시하면서 베르메르의 조그만 세계와 일본, 그리고 그 베르메르의 세계가 동경했던 혹은 알지 못했지만 묘사했던 세계화의 연결점을 일본이라는 조그만 나라와 연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으면서 자꾸 뒤켠으로 어른 거린 불편함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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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재미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절대 고독이 넘치는 사하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거칠고 정말로 원초적 인간적 역동성이 넘치는 투아레그 족을 위해 온 몸을 헌신하였다. 그가 이 거친 사하라에서 투아레그 족을  위해 헌신한 기간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가 이 황량한 곳에 머문 기간은 6년 혹은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어느 누구도 그의 가르침에 감며을 받아 그가 믿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개종시키려 했던 투아레그 족 반도의 손에 살해되었다.

정말로 그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삶을 5년 혹은 6년 동안 거친 광야에서 살았던 것일까? 하지만 투아레그 족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사막에서 친절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환대의 정신이 가득찬 그에게 투아레그 족은 특별히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들과 똑같은 사막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동료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의 손에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사막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거친 사막에서 환대 이외의 수식어가 필요할까?

아세크렘, 사하라의 어느 고적한 곳, 지리적 장소....

홀로 있으면서 공동체를 인류를 생각할 수 있을까? 왜 위대한 거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홀로 광야에서 혹은 골방에서 기도하고 물레를 돌렸을까? 그 무섭도록 거대한 공간 속에서 무엇을 느낀 것일까? 그들은 그 공간에 자신의 입김을 채워 넣으려 했을까?  절대로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느끼지 못한 이웃 혹은 타인의 숨결을 그 무섭도록 거대한 공간에 채우려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광야는 위대한 우주의 자궁이며 사색의 공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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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하다... 어느 자매가 있었다. 하나는 몽상적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적이었다. 몽상적인 아이는 조신하고 뭐가 있는듯이 보였고, 활동적인 아이는 좀 껄끄러운 아이였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이 둘은 크면서 아니 죽을 때까지 경쟁적인 관계였을 것이다. 이 둘의 관계를 그나마 냉각시켜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매라는 혈연적인 것 밖에 없었다. 이 둘은 컸고, 자랐고, 여인이 되었다. 언니는 마르타였고 동생은 마리아였다.

그리고 그들의 오빠가 죽었다. 이 자매는 소문으로 들어왔던 나자렛 사람을 불렀다. 서른이 조금 넘은 나자렛 사람이 왔을 때 마리아는 집안에 있었고 마르타는 나자렛 사람을 마중 나갔다. 마르타는 '당신이 조금만 더 일찍 왔었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당신께서 구하시기만 한다면 하느님이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수염이 더부룩한 나자렛사람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두 자매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나자로라는 오빠와 살았지만 그 역시 활동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두 여동생을 남겨두고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몸이 허약하여 두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활이 가능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르타의 간절한 부탁으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뒤에는 그는 무엇을 하였을까? 나자로는 현재의 삶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 십자가에 처형된 뒤에 죽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 다음 그에 대한 증언을 하며 마지막 삶을 불태우지 않았을까...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충족하고자 했을 때 나자로라는 사람은 아주 유용한 선전 매체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좀비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이런 오빠와 살고 있떤 마르타와 마리아는 아마도 내외적으로 무척 고단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소극적인 마리아는 마르타에게 어떤 힘이 되어 주었을까? 성서의 문맥상으로 볼 때 마리아는 마르타에게 아주 얄미운 인상을 심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자매의 오빠인 나자로가 죽기전에 나자렛 사람이 이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마르타는 부엌에서 이 예언자를 위해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었지만 동생인 마리아는 그 예언자 발치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예언자도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마리아가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마르타의 감정이 폭발한다. "선생님 동생인 마리아에게 바쁜 제 일을 좀 돕게 해주세요. 재는 그림처럼 앉아 있어 아주 얄미워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때 예언자는 마르타의 가슴을 아프게하는 말을 한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빵을 얻기 위한 노동과 진리를 얻기 위한 명상의 가치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선의 무게와 죄악의 무게는 어떻게 다른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 부조화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교회는 마르타는 교회의 외적활동을 표현하는 것이고 마리아는 내적 영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교의의 가르침과 삶의 경험이 마주칠 때 우리는 갈등이 아니라 포기를 해 버린다. 갈등은 이상적이지만 포기는 현실적인 것이다. 이 부조화가 바로 현실과 종교의 간극인지도 모른다.

                                   중세력으로 말하면 마르타 축일(7월29일)에 쏟아낸 넋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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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yosae 2008-08-01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정말 그리운 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