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평하다... 어느 자매가 있었다. 하나는 몽상적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적이었다. 몽상적인 아이는 조신하고 뭐가 있는듯이 보였고, 활동적인 아이는 좀 껄끄러운 아이였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이 둘은 크면서 아니 죽을 때까지 경쟁적인 관계였을 것이다. 이 둘의 관계를 그나마 냉각시켜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매라는 혈연적인 것 밖에 없었다. 이 둘은 컸고, 자랐고, 여인이 되었다. 언니는 마르타였고 동생은 마리아였다.

그리고 그들의 오빠가 죽었다. 이 자매는 소문으로 들어왔던 나자렛 사람을 불렀다. 서른이 조금 넘은 나자렛 사람이 왔을 때 마리아는 집안에 있었고 마르타는 나자렛 사람을 마중 나갔다. 마르타는 '당신이 조금만 더 일찍 왔었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당신께서 구하시기만 한다면 하느님이 다 들어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수염이 더부룩한 나자렛사람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두 자매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나자로라는 오빠와 살았지만 그 역시 활동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두 여동생을 남겨두고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몸이 허약하여 두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야만 생활이 가능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르타의 간절한 부탁으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뒤에는 그는 무엇을 하였을까? 나자로는 현재의 삶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 십자가에 처형된 뒤에 죽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간 다음 그에 대한 증언을 하며 마지막 삶을 불태우지 않았을까...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충족하고자 했을 때 나자로라는 사람은 아주 유용한 선전 매체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좀비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이런 오빠와 살고 있떤 마르타와 마리아는 아마도 내외적으로 무척 고단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소극적인 마리아는 마르타에게 어떤 힘이 되어 주었을까? 성서의 문맥상으로 볼 때 마리아는 마르타에게 아주 얄미운 인상을 심어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자매의 오빠인 나자로가 죽기전에 나자렛 사람이 이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마르타는 부엌에서 이 예언자를 위해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었지만 동생인 마리아는 그 예언자 발치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예언자도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마리아가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마르타의 감정이 폭발한다. "선생님 동생인 마리아에게 바쁜 제 일을 좀 돕게 해주세요. 재는 그림처럼 앉아 있어 아주 얄미워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때 예언자는 마르타의 가슴을 아프게하는 말을 한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빵을 얻기 위한 노동과 진리를 얻기 위한 명상의 가치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선의 무게와 죄악의 무게는 어떻게 다른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 부조화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교회는 마르타는 교회의 외적활동을 표현하는 것이고 마리아는 내적 영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교의의 가르침과 삶의 경험이 마주칠 때 우리는 갈등이 아니라 포기를 해 버린다. 갈등은 이상적이지만 포기는 현실적인 것이다. 이 부조화가 바로 현실과 종교의 간극인지도 모른다.

                                   중세력으로 말하면 마르타 축일(7월29일)에 쏟아낸 넋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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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yosae 2008-08-01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정말 그리운 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