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재미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절대 고독이 넘치는 사하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거칠고 정말로 원초적 인간적 역동성이 넘치는 투아레그 족을 위해 온 몸을 헌신하였다. 그가 이 거친 사하라에서 투아레그 족을 위해 헌신한 기간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가 이 황량한 곳에 머문 기간은 6년 혹은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어느 누구도 그의 가르침에 감며을 받아 그가 믿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개종시키려 했던 투아레그 족 반도의 손에 살해되었다.
정말로 그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삶을 5년 혹은 6년 동안 거친 광야에서 살았던 것일까? 하지만 투아레그 족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사막에서 친절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환대의 정신이 가득찬 그에게 투아레그 족은 특별히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들과 똑같은 사막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동료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의 손에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의 삶은 사막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거친 사막에서 환대 이외의 수식어가 필요할까?
아세크렘, 사하라의 어느 고적한 곳, 지리적 장소....
홀로 있으면서 공동체를 인류를 생각할 수 있을까? 왜 위대한 거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홀로 광야에서 혹은 골방에서 기도하고 물레를 돌렸을까? 그 무섭도록 거대한 공간 속에서 무엇을 느낀 것일까? 그들은 그 공간에 자신의 입김을 채워 넣으려 했을까? 절대로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느끼지 못한 이웃 혹은 타인의 숨결을 그 무섭도록 거대한 공간에 채우려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광야는 위대한 우주의 자궁이며 사색의 공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