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 - 고대 델피의 숨겨진 예언과 사라져 버린 비밀들
윌리엄 브로드 지음, 김혜원 옮김 / 가인비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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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나에는 제우스에게 바쳐진 한 그루의 참나무가 있었으니, 이 참나무는 여사제들을 통해 신탁을 내렸네. 조언을 구하러 온 자가 참나무에 다가서면 일순간 나무가 움직이고, 곧이어 여인들이 이렇게 말한다. '제우스 신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도다.' 이 여사제들은 비들기를 의미하는 펠레이아데스 혹은 페리스테레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들은 트로이인들로서 최고 연장자는 앞선 영혼을 뜻하는 프로메네이아, 다음은 칭송을 받은 미덕을 의미하는 티마리테, 최연소자는 인간들의 승리자를 뜻하는 니칸드라로 각각 불렸다. 그런데 펠레이아데스는 어떤 방식으로 나뭇잎이 사각거리며 내는 소리들을 해독할 수 있었을까? 플라톤에 따르면, 도도나의 여자 예언자들은 델포이의 퓌티아(이들은 월계관을 쓰고 월계수로 장식된 삼각 의자에 앉아 신탁을 내렸다)처럼 예언을 내렸던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일종의 엑스터시에 빠진 상태에서 신으로부터의 메시지를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크 브로스의 "나무의 신화" 중에서- 

이 책은 신탁의 엑스터시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은 형이상학적 예언의 실체를 과학적인 눈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플라톤이 증언한 대로 델피의 퓌티아들은 환각의 상태에서 예언을 하였다. 그리고 플라톤은 델피의 무녀가 앉아있는 삼각의자 밑으로 갈라진 틈이 있어 그곳으로부터 신의 영기가 나와 여기에 취한 무녀가 예언을 쏟아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실제로 증언할 증거가 고고학적으로 발견되지 못했기 때문에 현대의 우리들은 델피의 신탁에 의혹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 델피의 무녀 혹은 이와 비슷한 내용을 표현할 때믄 형이상학적 접근보다는 형이하학적인 표현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델피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의 신탁에 성적요소가 강하게 표현되었다(최근의 것으로는 '300'이란 영화의 관능적이고 자극적인 신탁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고대의 기록을 보면 그러한 몽환적이고 관능적인 예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대의 우리가 고대의 신탁을 성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델피의 고대 증언이 근대의 고고학적 발굴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델피의 경우 고고학적 발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모습을 그려내지 못했던 것은 그리스가 히말라야에서 시작하여 코카사스지역을 지나 소아시아(터키지역)와 그리스를 지나 알프스로 이어지는 지진대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잦은 지각변동이 있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리스에서의 고고학은 지질학과 병행하여 발굴이 이루어져야만 정확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1892년 프랑스팀이 델피를 발굴조사하였음에도 고대의 기록과 일치하는 유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동안 잦은 지진으로 인해 델피지역의 단층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소한 실수가 바로 잡히기까지 델피의 신탁은 일종의 야바위로까지 비하되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한 지질학자의 우연에 의해 델피의 모습이 바로 잡히게 된다.  

고고학에 지질학이 가세함으로서 델피의 모습은 바로잡히게 된다. 고대인들이 묘사한 델피의 모습-퓌티아가 삼발이 의자에 앉아있고 그 삼발이 밑 갈라진 틈으로 흘러나오는 연기-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각이 갈라진 틈으로 흘러나온 연기도 에틸렌일 것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즉 무녀는 석회암 지대의 갈라진 단층 사이로 흘러나온 에틸렌에 취해 무아지경 속에서 예언을 내린 것이다. 물론 이 예언을 해석하는 임무는 신전의 사제들이 하였다. 물론 이 해석은 후대로 갈수록 단순해지며 모호한 경우가 많았지만 델피신전에 받쳐진 무수한 감사의 팻말과 봉헌물의 기록은 예언이 단순함을 넘어 그리스 전체의 운명까지도 결정하였었다(스파르타의 리쿠르구스법과 아테네의 솔론법).  

사실 '300'에 나오는 레오니다스의 신탁은 델피에서 "황소와 사자들의 힘으로는 적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아니, 적은 그 도시 또는 왕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때 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경고를 받았다. 스파르타인들은 이 불길한 예언에 고민해야만 했다. 도시를 잃어버리는 것이 나을 까 아니면 왕을 잃어버리는 것이 나을까? 이 예언대로 사자(레오니다스)는 쓰러졌지만 스파르타는 구원을 받았다.  

이 책은 과학의 잣대로 모든 것을 바라볼 때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과학으로 시공간의 무한함을 모두다 밝혀낼 수는 없다. 과학은 종교가 아니다. 과학은 다만 종교의 길을 밝혀주는 무수한 재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델피에서 과학은 갈라진 틈에서 흘러나온 증기라는 단어를 밝혀내지 못하자 그 수천년의 역사를 단순한 사기 혹은 희극으로 격하시켰었다. 하지만 그 실체가 드러나자 과학은 한발 뒤로 물러나 더 정확한 과학적 증거가 나올 때까지 자신의 판단을 유보한다.  

하지만 델피의 퓌티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나의 비밀 가운데 하나를 발견했지만 나는 여전히 다른 비밀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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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
마비쉬 룩사나 칸 지음, 이원 옮김 / 바오밥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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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두 가지 일화가 생각났다.  

하나는 디트리히 본 회퍼의 말이다. "그들나치)이 빨갱이를 잡아들일 때 우리는 침묵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사회주의자를 잡아들일 때도 침묵하였다.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민주주의를 탄압할 때도 침묵했고, 가톨릭을 칠 때도 침묵하였다. 우리는 기독교도이면서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를 잡으러 왔을 때 아무도 우리를 위해 변호해 줄 사람이 없었다." 

다른 하나는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흑백 영화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소년이 독일을 거쳐 고향인 헝가리로 귀한하면서 독일의 역에서 한 독일 중년 남자와 마주친다. 중년남자는 어디서 왔느냐를 물은 다음 가스실을 보았냐고 묻는다. 소년은 분명히 가동하고 있던 가스실의 존제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본 적이 없기에 보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중년의 독일 남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른 석방 수인을 향해 걸어간다.  

아더 퀘슬러의 "한낮의 어둠"에서 주인공 블라쇼프는 심문관에게 언제나 이런 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혹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은 바깥 사람들에게 잊혀진 사람이다. 블라쇼프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좌절하고 절망하며 부정하고 확인한다. 왜 나치는 수용소의 입구에 꽃밭을 가꾸게 하고 곧 노동으로 더러워질 옷을 점검때마다 깨끗하게 하라고 강요하였을까? 인간에 대한 일말의 자비심 때문에... 결코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희롱한 것이었다. 마치 자신들이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전지자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수용소는 어쩌면 나치들에게는 하나의 천지창조 이전의 카오스였는지도 모른다. 그 카오스의 혼돈을 자신들이 질서를 부여하여 창조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나치 이후 이런 모호한 전지자의 수용소는 하나의 스테레오 타이프가 되었다. 미국의 관타나모나 이스라엘의 아람인 정치범 수용소는 이름만 다를 뿐이지 나치의 수용소와 다른 점이 없다. 인간성을 조롱하고 삶의 의미를 빼앗는 그 무지막지한 재소자 프로그램은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싸운 목적이 인간성을 말살하는 종교적 교조주의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관타나모라는 수용소의 현실 속에서 아니면 아브 그라이브의 감옥에서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미국은 관타나모와 아브 그라이브로 대표되는 곳을 전지자의 수용소로 만들려했다면 탈레반은 한 나라를 그렇게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물론 한마리의 쥐가 콩을 먹고 귀에 혹이 났다고 해서 모든 쥐는 콩을 먹으면 귀에 혹이 난다고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콩을 먹고 귀에 혹이 생기는 쥐도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는 이런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뉴스에서 다룬 관타나모의 현실이 얼마나 우리의 인식과 동떨어진 곳인지를 알게된다. 그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관타나모는 단순히 수용소가 아니라 인간성을 억압하고 말살하는 하나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 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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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 교양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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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유럽은 양심과 감정이 지배한 시기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찬미와 혁명에 대한 노동자들의 열정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대공황으로 촉발된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은 사람들에게 파시즘에 대하여 관용의 느낌을 갖게 하였다. 자본가들 또한 거북스런 공산주의보다는 파시즘에 경도되었고, 자본가들은 파시즘을 자신들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사냥개쯤으로 여겼다. 이에 반해 지식인들은 파시즘보다는 공산주의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집산화 과정에서의 비인간적인 모습과 스탈린의 숙청을 통해 드러난 공산주의의 잔인성을 애써 무시하였다. 이들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에게 인간의 감정이 가미된다면 지상의 낙원은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의 안식처는 될 것으로 믿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은 1936년 6월18일 이후 유럽인들의 감정과 이성에서 사라지게 된다.  

스페인 내전은 이베리아 반도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다. 비록 스페인에서 일어난 내전이었지만 이 전쟁의 과정은 모든 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체험을 제공하였다. 3년동안 지속된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4가구에 1집 꼴로 사망자가 나왔는데 이는 스페인 전체가 내전의 희생자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깊은 상처는 계급과 계층의 갈등으로 더욱 증폭되어 내전 기간 내내 보복과 처형의 악순환을 불러왔다. 스페인 사람들은 내전 내내 풍차를 향해 내달리던 돈키호테처럼 광기에 휩싸였다가도 알지 못할 종교적 침울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들은 내전의 갈등 속에서도 자신들의 화려했던 과거의 영화를 기억했고, 현실의 참담함에 슬퍼하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 국민들은 계급과 계층의 갈등이 너무나 커 귀족과 일반 평민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스페인은 유럽이면서 아프리카였고, 현대에 존재하면서 중세의 마지막 아들이었다. 이러한 절망감이 무려 5백년 동안 스페인을 지배했다. 이 결과 스페인 민중들은 자신들을 오래 전부터 지배해왔던 종교와 정치에 반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민중들은 지배층과 결탁한 그리스도교의 대안으로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였다. 무정부주의는 형제애, 상부상조, 타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존중, 경작지의 공동경작과 수확물의 평등분배, 이웃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이 사상은 급속하게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잠식하고 국가의 지도력에 도전하였다. 교회와 국가는 스페인의 새로운 종교인 '무정부주의'를 국가와 교회를 좀먹는 암으로 규정하였다. 여기에 혁명적인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가세하면서 스페인은 이즘-ism의 시험장이 되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스페인 민중에게 사랑을 받았던 무정부주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공화주의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분권적이며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이들 공산주의, 사회주의, 공화주의자들은 중앙집권적이며 사상의 통제를 강력하게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스페인 내전은 무정부주의자에 대항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공화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이었다. 내전이 발발하였을 때 각 집단은 서로를 견제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정부주의를 공격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좌파와 우파 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바르셀로나를 장악하고 있던 무정부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숙청되었고, 북부지역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우파의 공격과 좌파의 방관으로 말소되었다.  

스페인 내전은 유엔이 창설되기 이전에 각국의 의용군이 모여 하나의 여단을 만들어 싸운 최초의 전쟁이었다. 물론 이 국제여단이란 하나의 상징이 스페인 내전의 모순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그 공통의 열정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최초의 국제여단은 바로셀로나에서 독일의 베를린 올림픽에 대항하여 국제노동자 올림픽을 개최하려 모였던 각국의 노동자들이 결성한 부대였다. 국제여단은 그 이름에 걸맞는 군대는 아니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통제 하에서 철저히 선전물로 이용되었다. 이들의 자유분방함은 규율과 통제를 신봉하는 집단에게는 의심스런 존재였다. 그러기에 이들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사상이 아니라 순수한 자유에 대한 열정으로 스페인 내전에 뛰어든 인간 집단이었다. 

스페인 내전의 이상과 낭만성은 좌파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전선의 지배권을 장악한 순간 소멸되고 만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교조주의적인 맹목적 복종과 통제만이 남게되었다. 부패와 무능은 공화파에 대한 인민전선의 투쟁을 급속히 약화시켰다. 이상과 순수성이 짖밟힌 스페인 내전은 더이상 파시즘에 대항하는 인류 양심의 전쟁이 아니었다. 철저한 자국의 이익계산 속에서 스페인은 자신들의 손으로 무참하게 유린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정치적 야망은 앞으로 다가올 세계대전이란 큰 그림 속에서 그려지게 된다. 히틀러는 스페인이 파시즘화 됨으로서 인민전선의 프랑스를 견제해 줄 것으로 생각했고, 스탈린은 적색혁명의 물결을 유럽의 끝으로 수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동상이몽 속에서 스페인은 고통을 받았고, 상처를 입었다. 그 고통과 상처의 치유는 한 세대를 넘어 계속될 것이었다.  

스페인 내전이 종료되었을 때 200백만명의 민간인들이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수년 동안 강제노역을 통해 사상개조를 받았고, 10만의 사람들이 총살대 앞에서 스러졌다. 그리고 50만명은 10년 이상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전이 종결된지 15년 이후에야 겨우 스페인은 내전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였다. 내전으로 스페인은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형성했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폭력으로 억눌린 통일이었다. 아무도 프랑코의 독재에 대해 거부할 수 없었다. 프랑코의 우파 역시 철저한 자가 정화를 통해 반대파를 척결하였다. 교회와 왕정의 통치를 거부하는 집단은 가차없이 숙청되었다. 프랑코의 권력의 핵심이 될  팔랑헤당은 권력의 핵심에서 비껴난 상태를 유지하며 체제의 하부구조를 이루었다. 프랑코는 모든 권력과 지배의 원칙에 교회와 국가를 최우선으로 하였다. 그 어느 것도 이들보다 상위에 위치할 수 없었다. 오직 자신만이 이 두 집단과 동등할 뿐이었다.  

1939년 3월31일 신의 은총(?)으로 스페인의 지배가 확정된 순간 프랑코는 부르고스에서 유행성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다.  부관이 그의 침실로 들어와 전쟁이 끝났고 우리가 스페인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보고하자, 그 속을 알 수 없던 독재자는 '아주 좋아, 고맙네'라고만 말하였다. 그 조용한 대답은 3년 동안의 갈등을 40년 후에 폭발시키게하는 음울한 전주곡이었다.  

*스페인 내전에 관한 책으로는 형성사의 "스페인 내전 연구-인민전선의 붕괴와 프랑코의 집권"을 참조하면 더욱더 내전의 이해를 도울 수 있습니다.  

무정부주의에 대해서는 미토의 "역사의 격정-자율적 반란의 역사"를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간략한 대강을 보려면 "신동아 86년 3월,4월호(?)에 실린 "인류양심의 전쟁 스페인 내전(지그프리트 코겔프란츠의 슈피겔지 연재기사 번역)"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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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2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이런 좋은 책이 있었다니!!

dohyosae 2011-08-21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요즘 게을러서 제대로 정리도 안된 서재인데...
감사합니다.
 
속일본기 1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클래식 5
스가노노마미치 외 엮음, 이근우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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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의 고대사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氏姓-우지/카바네라고 부른다-에 관한 것이이 아닐까. 그 긴 이름 속에서 어떤 것이 진짜 이름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이런 고역은 속일본기1을 읽다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길고 지루한 이름과 관직명의 덤불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읽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왜 고대의 일본인들은 현대인이 볼 때 무의미하다싶은  이런 기록을 끊임없이 서술하며 기록하였을까? 

일본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氏-우지-는 거주지역 혹은 직능을 표시하는 씨족명을 얻은 일족을 가리키고, 姓-카바네-은 氏의 수장에게 주어지는 세습적인 칭호라고 한다. 즉 氏는 공통의 세습적 氏를 가진 가구들의 결합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집단 안에 세습칭호인 姓을 가진 한개 이상의 혈통이 존재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氏는 집단의 구성원으로 姓은 지배자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볼 때 일본의 氏姓제도는 정치적 필요성에 의한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즉 한 집단 혹은 여러집단을 하나로 묶는 끈으로서의 역할이 바로 氏姓이었던 것이다. 한 예로 일본의 氏는 혈족이 아닌 자를 양자로 삼는 전통이 강한데 이것은 동질적인 혈족은 아니지만 같은 氏를 조직함으로서 소규모 공동체의 수장 및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배아래로 흡수하려 시도하였다. 이런 일본의 관습은 혈통,부계혈통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하지만 이들에게 氏姓의 울타리 안에서 상하복종의 관계가 형성됨으로 혈통보다는 능력에 의한 양자제도가 자연스럽게 고착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속일본기의 기록은 천황이라는 단일 지도국가로 향해가는 일본의 새로운 조직도와 같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천황-이들은 姓이 없다. 오직 이름만 있을 뿐이다-을 중심으로 일본은 하나의 거대한 氏姓국가로 재편하였던 것이다. 즉 氏라는 거대한 울타리-혹자는 우지의 어원을 한국어 울(울타리)로 보기도 한다-안에 조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고대의 일본부터 현재까지 내려온 일본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왜 일본인들은 천황제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왜 천황이라는 단일지배체제 속에 아무 불만없이 편입되려 하였을까? 그것은 일본이라는 하나의 국가-솔직히 국가라기 보다는 천황을 가부장으로 하는 하나의 집단-속에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자신의 위치가 고정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속일본기1의 세계는 이러한 세계가 시작되는 고대 일본의 모습을 지루하게 혹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보충>이런 氏의 예는 백제에서도 볼 수 있다. 한 예로 흑치상지를 들 수 있다. 흑치氏는 원래는 백제 왕족인 扶餘성姓을 가진 집단이었는데, 그 조상이 흑치지방의 영지를 봉토로 받았기에 자손들이 흑치라는 씨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흑치상지의 비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즉 일본의 고대사에 있어서 백제의 역할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제는 아마도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고대사 국가 가운데 건국신화가 없는 유일한 경우가 아닐까. 즉 백제는 시작부터 중국이나 주변의 국가들로부터 문물을 전수받아 그것을 자신들의 통치에 작용시켰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원동력 덕분에 처음부터 자신들의 노하우를 타국에 전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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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조세프 R. 스트레이어 지음, 김동순 옮김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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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중세는 복합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중세의 밑그림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는 늘 지상에 하느님의 나라-왕국이 아니다-를 건설하려 하였다. 물론 이 나라의 주도권은 성직자들이 갖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명제-지상에 건설된 하느님의 나라와 종말론적 미래-가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중세는 이렇게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성직자들은 중세를 완벽한 종교의 세계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들은 로마의 붕괴로 생겨난 공백을 종교의 힘으로 보전하였다. 주교좌를 중심으로한 신의 도시는 로마의 전통을 보전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로마 역시 그 넓은 제국을 지배하는데 도시-시비타스-중심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결국 중세의 도시는 이런 성직자들의 바램으로 성당을 중심으로 광장이 있고 광장의 좌우에 행정과 입법 그리고 사법을 상징하는 건물이 들어서고 그 외곽으로 시장이 설치되었다. 이런 구조는 어떻게 보면 교회, 정부, 시민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삼위일체의 지상 구현이었다.하지만 이들에게는 관용과 자비가 없었다. 이교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는 언제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그 정당성은 타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적용될 때 언제나 부조화를 불러일으켰다.

반면에 세속의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사고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바이킹으로 대표되는 야만족의 침입을 방어하고자 성채-부르구스-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근거지를 건설하였다. 성채로 둘러싼 자신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장원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성채에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성당과 지배체제를 건설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들은 중세를 특징짓는 장원체제를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조직을 경영할 머리가 없었다. 이들은 단순하고 잔인했다. 그 잔인성은 종교의 이름으로 표출되는 聖戰에서 언제나 정당성을 획득하였다. 결국 이들은 타자에 대한 잔혹함은 언제나 교회의 이름으로 상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일까, 이들에게 신앙심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종교를 통해 얻은 정당성과 합법성만이 중요시될 뿐이었다.

이렇게 볼 때 중세는 주교좌의 시비타스와 영주들의 부르구스의 경쟁이었다고 볼 수 있지도 않을까? 이 다르면서도 같은 同腹異父의 체제는 중세를 성과 속의 대결로 몰아갔다. 주교들이 지배하는 도시는 성스러움이 지배했지만 무력이 없었다. 반면 영주들이 지배한 도시는 무력은 있었지만 교회로 대표되는 성스러움이 없었다. 성스러움은 그것을 유지하고 전파할 수 있는 힘을 원하였고, 세속의 권력은 힘은 있었지만 그것을 정당화할 성스러움을 필요로 하였다. 이 두 이질적인 요소가 어떻게 합쳐졌을까? 중세 기간 내내 이 둘은 결코 통합되지 않았다. 마지못해 타협은 되었을지 몰라도 어느 한 쪽이 굴복하여 한 쪽으로 통합되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 결국 아무도 승리하지 못하였음에도 세속의 권력과 교회는 자신들이 중세의 지배자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세속의 권력과 교회의 권력이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세웠던 시비타스와 부르구스 내부의 변화였다. 이 도시들에서 서서히 힘을 비축하기 시작한 시민계급이 새롭게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세속과 교회의 사고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계층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정당화해줄 종교에 기댈 신분도 없었지만 그들 자신이 성스러운 신분에 편입될 의향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노력으로 부를 축적하여 자신들의 위치를 만들어간 새로운 계급이었다. 성직자-귀족-농민으로 구성된 중세의 신분 질서에 이들이 위치할 공간은 없었다. 이들은 성직자도 귀족도 아니었지만 농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의 뿌리는 세속권력과 교회권력이 자리를 잡고 있던 그곳이었다. 그러기에 이들 신흥계급은 어떻게 보면 세속적이었지만 다른 편의 그림자는 성스러운 교회에 닿아있었다. 이들은 부를 추구했지만 한편으로는 내세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위선에 경멸적인 시선을 보냈고 세속의 권력을 우습게 알았다.  이런 이들의 사고와 시선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 새로운 계급은 자신들의 근원을 고대에서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것은 현재의 교회 체제의 이데올로기에서는 자신들을 정당화할 어떤 근거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부에 대한 편견과 엄격한 위계질서는 새로운 계급이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고대의 그리스-로마의 시대를 하나의 전거로 삼아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출하였다. 구원은 믿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믿음의 깊이는 기도의 힘이 아니라 근면과 성실을 통해 쌓아올리는 부의 크기로 측정되었다. 믿음의 느린 시간은 이들에게 죄악이었다. 이들에게 시간은 돈이었으며 신앙이었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죄악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고는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신학이 한 걸음 더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하면서 가능하였다. 교회는 이들의 사상을 이단시하면서도 자신들의 체제에 맞게 재단하였다. 교회는 신 중심의 창조에서 과감하게 이 지상의 창조물을 통해 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려 하였다. 단일성에서 다양성으로 퍼져나간 창조사상을 다양함에서 단일함으로 시각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교회는 변화의 조짐이 퍼져나가던 시대에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유럽의 뿌리에는 세련과 야만이 혼재해 있음을 알게된다. 그리스-로마로 대표되는 문명의 뒤 편에 숨어있는 잔혹함이나 불관용은 게르만으로 표현되는 야만성에서 언뜻 언뜻 드러나는 관용과 포용을 보노라면 뿌리의 근원이란 큰 테두리에서보다는 그 깊은 곳의 본성을 살펴봐야만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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