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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
마비쉬 룩사나 칸 지음, 이원 옮김 / 바오밥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으며 두 가지 일화가 생각났다.
하나는 디트리히 본 회퍼의 말이다. "그들나치)이 빨갱이를 잡아들일 때 우리는 침묵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사회주의자를 잡아들일 때도 침묵하였다.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민주주의를 탄압할 때도 침묵했고, 가톨릭을 칠 때도 침묵하였다. 우리는 기독교도이면서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를 잡으러 왔을 때 아무도 우리를 위해 변호해 줄 사람이 없었다."
다른 하나는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흑백 영화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소년이 독일을 거쳐 고향인 헝가리로 귀한하면서 독일의 역에서 한 독일 중년 남자와 마주친다. 중년남자는 어디서 왔느냐를 물은 다음 가스실을 보았냐고 묻는다. 소년은 분명히 가동하고 있던 가스실의 존제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본 적이 없기에 보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중년의 독일 남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른 석방 수인을 향해 걸어간다.
아더 퀘슬러의 "한낮의 어둠"에서 주인공 블라쇼프는 심문관에게 언제나 이런 소리를 듣는다. 아무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혹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당신은 바깥 사람들에게 잊혀진 사람이다. 블라쇼프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좌절하고 절망하며 부정하고 확인한다. 왜 나치는 수용소의 입구에 꽃밭을 가꾸게 하고 곧 노동으로 더러워질 옷을 점검때마다 깨끗하게 하라고 강요하였을까? 인간에 대한 일말의 자비심 때문에... 결코 아닐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희롱한 것이었다. 마치 자신들이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전지자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수용소는 어쩌면 나치들에게는 하나의 천지창조 이전의 카오스였는지도 모른다. 그 카오스의 혼돈을 자신들이 질서를 부여하여 창조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나치 이후 이런 모호한 전지자의 수용소는 하나의 스테레오 타이프가 되었다. 미국의 관타나모나 이스라엘의 아람인 정치범 수용소는 이름만 다를 뿐이지 나치의 수용소와 다른 점이 없다. 인간성을 조롱하고 삶의 의미를 빼앗는 그 무지막지한 재소자 프로그램은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싸운 목적이 인간성을 말살하는 종교적 교조주의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관타나모라는 수용소의 현실 속에서 아니면 아브 그라이브의 감옥에서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미국은 관타나모와 아브 그라이브로 대표되는 곳을 전지자의 수용소로 만들려했다면 탈레반은 한 나라를 그렇게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물론 한마리의 쥐가 콩을 먹고 귀에 혹이 났다고 해서 모든 쥐는 콩을 먹으면 귀에 혹이 난다고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콩을 먹고 귀에 혹이 생기는 쥐도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는 이런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뉴스에서 다룬 관타나모의 현실이 얼마나 우리의 인식과 동떨어진 곳인지를 알게된다. 그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면서 관타나모는 단순히 수용소가 아니라 인간성을 억압하고 말살하는 하나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 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