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로부터의 비망록 패러독스 12
율리우스 푸치크 지음, 박수현 옮김 / 모티브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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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분 후면 시계는 열시를 알릴 것이다. 1942년 4월 24일, 아름답고 따스한 봄날 저녁이다>로 시작되어 <종막의 커튼이 올라간다. 나는 여러분 모두를 사랑했다, 친구들이여. 몸조심하시오! 1943년 6월 9일 율리우스 푸치크>로 끝나는 별로 두껍지 않은 책이 나의 마음을 두드린다. 그 울림은 새벽 절 간에서 스님들을 깨우는 북소리처럼 아주 미약하게 시작되어 점점 큰 소리로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그 두드림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깨어나시오, 깨어나시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깨어나시오. 또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소.


체코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버드와이저로 알려진 맥주의 고장 부드바이스-현재의 지명은부데조비키-일까? 아니면 영화 새벽의 7인에서 보여준 꺽일 수 없는 장열한 모습일까? 그렇지 않으면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만든 <고백>이란 영화의 무기력함일까?


여기에는 한 사람으로 대표되는 한 민족의 저항이 담겨져 있다. 나치라는 거대한 악에 대항한   왜소한 인간의 모습이 결코 약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독재자 요십 비싸리오노비치 스탈린은 그의 비서인 삐아따꼬쁘 돔무에게 물었다. <동지, 당신은 1개 사단의 병력과 탱크와 전함, 비행기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가? > 삐아따꼬쁘는 <서기장 동지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비싸리오노비치동지가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개인은 체제의 무게를 온 몸으로 저항하기에는 너무 무력하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왜 역사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은 체제의 무게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했는가? 그것은 가장 단순한 단어 때문이다.

<자유.>

물리적 강제력은 신발 속의 발가락을 움직이게 하는 두뇌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라고 정의한 훨씬 전부터 절대권력에 대한 저항은 있었다. 율리우스 푸치크 역시 자신이 왜 거대한 절대권력에 저항하고 투쟁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나치즘의 유해함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방관자일 수 없는 무대의 주연이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것은 온실속에서 비판하는 나약한 자유가 아니다. 광야에서 울부짖는 투쟁의 자유인 것이다.  율리우스 푸치크의 영혼 앞에 그가 추구한 혁명은 이미 스러졌지만 인간 내면의 혁명은 계속 되고 있다는 말을 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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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먹는 사람들
마이클 크라이튼 지음, 노영숙 옮김 / 큰나무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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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임으로해서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허구인지 읽는 사람을 끊임없이 지적인 세계로 끌어들인다. 클라이튼은 의사 출신의 작가 답게 이 방면에 해박한 현대지식을 가지고 창작의 세계를 넓혀간다. 그가 원하는 세계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이 행복해지느냐가 아니라 과학의 과신으로 몰락하는 인간을 즐겨 다루는 것 같다. 이것은 어쩌면 환자를 다루는 의사의 입장에서 본 생명의 경외감에서 나온 결론은 아닌지...


<시체를 먹는 사람들>에서 주인공은 이븐 파들란이란 아주 먼 시대에 살았던 아랍의 역사가이다. 실제로 이븐 파들란의 저서는 중세 초기의 볼가강 유역에서 살고있던 루스인들의 생활상을 아는데 무척 귀중한 사료라고 한다. 그래서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이 책에서 인용된 이븐 파들란의 글을 찾아 볼 수 있었다. 크라이튼은 파들란의 글을 아주 충실하게 인용하면서 소설의 영역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가 묘사하는 북구의 세계는 콩고에서 보여준 지리적 해박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븐 파들란이 자신의 역사에서 판단을 유보한 곳에 클라이튼은 자신의 상상력을 끼워 맞춤으로서 우리를 다시 소설의 세계로 끌어 내린다. 클라이튼은 쥬라기 공원을 쓴 작가 답게 이븐 파들란의 기록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는 보이지 않는 웬돌이란 이름의 종족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들을 묘사한 모습을 보면 그들은 유럽에서 이미 흔적을 감추었어야만 하는 네안데르탈인의 후손같은 인상을 준다. 역사는 크로마뇽인에게 패한 네인데르탈인은 일거에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지만 클라이튼은 이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북구의 안개 속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새로운 침입자와 대치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들은 원시사회의 유습으로 모계 중심의 사회를 꾸려가고 있다.


북쪽의 인간들인 노르만 혹은 바이킹에 의해 북유럽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네안데르탈인(?)이 멸족되었다는 상상은 가히 기발하다하겠다. 정말 네안데르탈인들은 이븐 파들란이 여행했을 당시까지 살아있었을까? 고대 그리스 원주민들이 말을 타고 침입해온 이방인을 보고 켄타우로스란 신화속의 존재를 상상했듯이 마이클 크라이튼이 이븐 파들란을 만나 네안데르탈인을 상상했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닌 것 같다. 아니면 실제로 이븐 파들란은 이들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 추측의 유보가 이 책의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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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혁명사 한길신인문총서 8
백종국 지음 / 한길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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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절 재미있게 불렀던 노래가 있다. 바로 <라 쿠카라차>란 노래이다. 전석환의 노래의 메아리란 음악집에 실려있어 즐겨 부르던 노래... 한글 번역의 시작은 이러했다.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마을 지나 소꿉놀이 어린이도 우물가의 처녀도.....>. 아주 경쾌하고 번역된 가사도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번역가사 밑에 적혀있던 스페인어 도 이런 뜻인줄 알았다.  <우나 코싸 메달리싸 판쵸빌라신카미싸....>

이 노래의 번역만큼이나 우리에게 잘못 알려진 역사가 있다면 그것은 멕시코 혁명과 스페인 내란일 것이다. 특히 멕시코 혁명은 부의 분배, 농민의 항거, 혁명, 피라는 단어가 혼합되어 있어 60년대 이후 80년대까지 우리가 접근하기 쉽지 않은 역사의 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멕시코 혁명은 단기간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1910년에 시작되어 1940년-2차세계대전으로 멕시코를 안정시킬 필요에 의해 미국의 양보의 결과-종결된 혁명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혁명이 30년이나 지속된 것은 세계 역사에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이다.

 멕시코 혁명은 1910년에 시작하여 1940년에 종결되면서 에밀리아노 자파타, 판쵸 비야, 우에르따, 카란사, 오브레곤...등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그 수많은 혁명의 주.조연들은 죽거나 통치자로 변모한다. 산 자는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지만 죽은 자는 민중의 입과 기억을 통해 신화가 됨으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공평하게 만든다.  미국 영화 <프로페셔널>이나 <와일드 번치>에 묘사된 멕시코 혁명의 잔인함은 미국의 이웃국가에 대한 경멸감인지도 모른다. 헐리우드에 의한 멕시코 혁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가벼움은 멕시코 혁명 자체를 가볍게 바라보는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멕시코 혁명은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쿠바의 공산화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미국은 멕시코 혁명의 본줄기를 돌려놓기 위해 끊임없이 공작하여 마침내  미완의 혁명으로 만들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그럼에도 멕시코는 끊임없이 1910년의 정신으로 되돌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1910년의 정신이 멕시코에서 완전하게 실현되는 날 미국은 진정한 이웃, 대등한 이웃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리오 그란데 이남에 강력한 이웃을 두는 것을  결코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그 장구한 과정의 혁명을 아주 일목요연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은 판쵸 비야나 에밀리아노 자파타와 같은 혁명의 주역들을 통해 바라보는 멕시코 혁명과는 또 다른 매력을 안겨준다. 전기물이 거대한 혁명이라는 바다 속의 물결과 같은 것이라면 이책은 전체 바다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멕시코 혁명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아주 중요한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멕시코 민요 '라쿠카라차'는 바퀴벌레란 뜻이다.  그 노래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어떤 것이 나를 웃음짓게 해요. 셔츠 벗은 판쵸 비야, 비야파가 오니

카란사파가 가네요

바퀴벌레, 바퀴벌레, 이젠 걸을 수가 없어요. 왜냐고요, 불태울 휘발유가 없기 때문이죠.

반대파에 대한 시각이 바퀴벌레에 머물러 있고, 그것을 휘발유로 불 태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혁명의 잔인함.  혁명의 낭만성과 광폭함이 압축된 노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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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러시아 문화
랴쁘체프 지음 / 계명대학교출판부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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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의 북방정책이 시들해져 갈 무렵 한국에서는 러시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한국이 러시아를 보는 시각은 몰락한 부자, 혹은 은퇴한 왕년의 주먹을 보듯 측은한 시선이 주를 이루었다. 이때 러시아의 극우파 지도자였던 지리노프스키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을 읽게 되었다. 그의 요지는 간단했다. 지금의 러시아를 보지 말고 미래의 러시아를 보아 달라고, 그리고 지금의 한국민들의 시각이 러시아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와 한국의 역사적인 배경도 언급하면서 두 나라 국민은 충분히 함께 국제사회에서 동료로서 친구로서 나아갈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물론 그는 글의 마지막에 경고도 잊지 않았다. <지금 러시아는 힘이 없지만 그래도 한국이 통일을 이루는데 충분히 방해는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극우파 지도자였던 지리노프스키가 하고 싶었던 말은 마지막의 이 말이었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러시아란 나라의 실체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볼 수 없었다.  당시 지리노프스키는 신문에 의하면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닌 광기의 정당 지도자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가 보낸온 논리 정연한 글은 약간 충격으로 다가왔다. 글만으로 판단할 때 그는 결코 광기의 지도자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아주 대단한 정당의 당수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그를 히틀러와 유사한 광기를 가진 지도자라고 무시하는 세평과 논리정연한 글 사이의 간극은 러시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게 하였다.   

중세 러시아 문화를 읽으며 러시아를 다시 반추해 보았다.  한 나라의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으로 역사를 읽어보는 것만큼 현명한 것은 없다고 느낀다. 러시아 중세의 문화사를 읽어보면 러시아가 역시 만만한 나라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의 중세는 11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장대한 시간이다. 이 시기는 우리의 역사에서는 고려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시간이다. 그 당시 우리의 역사와 비교해 가면서 이 책을 읽는 재미도 제법 솔솔하였다. 그들도 우리만큼 역사가 깊고 자신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는 문화민족임이 책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상호존중적인 접근과 이해는 러시아를 우리의 아주 가까운 이웃으로 만들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문화적 역사적 상호존중이 깨질 때 우리는 북방에 아주 적대적인 강대국을 두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미치자 현재의 러시아와 우리의 관계를 유추해 볼 때 러시아란 나라가 다시 기지개를 펼 때 우리의 위치는 초라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둘러싼 중국, 러시아를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이들을 제대로 알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북방정책 이후의 일이다. 아직 20년이 흐르지 않았다. 지금 경제적 협력이 미미한 러시아를 이해하는 방법은 문화와 역사로 접근하는 방식밖에는 없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이들 나라를 덩치만 큰 별볼일 없는 국가로 경시할지도 모른다. 상대를 모르고 무시하는 것은 자멸의 지름길일 뿐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 우리는 인도와 브라질,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도 90년대 이후 러시아와 중국에게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 돌아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두루 두루 떠오른 생각을 두서없이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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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4-05-28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불어닥치는 중국열풍을 보면 90년대의 맹목적인 러시아열풍을 보는 것 같아 좀 씁쓸합니다. 한국인의 얄팍함 때문에 말입니다.
어쨌든 러시아는 무시할 수 없는 잠재력의 대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중세로의 초대
호르스트 푸어만 지음, 안인희 옮김 / 이마고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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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란 단어를 입속으로 되뇌일때 마다 느끼는 것은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든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맛을 본다면 분명 쓴 맛일 것이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신맛일 것이고, 스콜라철학의 시점으로 본다면 단맛일지도 모른다. 이런 여러가지 맛이 뒤섞인 중세를 통속적인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암흑의 시대'라는 매운맛으로 통일된다. 입안이 일단 매운맛으로 도배되면 다른 맛을 느낄 수 없다. 이 책은 우리의 입에 범벅이 되어있는 매운맛을 씻어내는 미네랄 워터와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중세를 바라볼 때 종교적인 편향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제일감이다. 일단 편향된 시각을 갖게되면 탄광속에서 일생동안 석탄마차를 끌었던 포니처럼 사물을 보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한 예로 보편적이란 뜻의 가톨릭을 구교-낡은 종교-라고 부르고, 항의하는 사람이란 의미의 프로테스탄트를 신교-새로운 종교-라고 거침없이 부르면서 가톨릭이 지배한 중세를 고정된 시각에서 단정할 때 중세의 이미지는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때 중세는 단절된 위치에 있는 중간적인 역사가 아니라 고전적인 인간중심의 헬레니즘문명과 인본주의의 근대 르네상스 사이에 위치한 신의 왕국이었다. 신과 함께 존재한다는 중세인들의 감각은 현재의 우리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적이라고 부르지만 중세인들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종교가 일상적인 사람들과 비지니스가 일반적인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중세는 알면 알수록 우리를 빠져나가지 못하게하는 마력이 있다. 이 책의 매력은 중세시대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한 독일지역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중심의 중세에 익숙한 독자들은 약간 생소할지 모르지만 중세의 시작이 메르센, 베르뒹 조약으로 동프랑크, 서프랑크,이탈리아로 나눠지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이 책의 제목 그대로 중세로의 초대를 받아들이려 한다면 우리의 감각을 잠시 신의 의지에 맡겨보는것이 현명할 지도 모른다. 물질이 풍부한 현 시점에서 중세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인터넷과 전문서적이 범람하는 현대에 기적과 은총을 이해하고 인정하기란 힘이들지도 모른다. 가톨릭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중세의 종교적인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데 힘이 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모든 것을 감수하고 중세로의 초대를 받아들이려 한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족:중세를 좀 더 알고 싶다면 사상적인 측면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세철학사를 읽어봄이 어떠할지...서광사의 중세철학 이야기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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