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士와 茶道

일본의 무사들은 왜 다도에 심취하였을까? 무사에게 중요한 것은 찻잔이 아니라 칼이었다. 칼은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야 했으며, 자신의 몸과 일체가 되어야만 했다. 무사에게 칼은 권위의 상징인 동시에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였다. 칼을 허리에 찬다는 것은 지배자가 되는 것인 동시에 자신보다 높은 자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의미였다. 즉 칼은 권리와 의무의 상징인 셈이었다. 반면 칼을 차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은 의무만이 존재했다. 무사들은 다도를 즐기며 특히 표면이 거친 조선의 막사발 찻잔을 선호하였다. 그들이 조선의 막사발 찻잔을 선호한 것은 칼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디일까? 물론 날이 선 칼날이 가장 중요하다. 칼날이 없는 칼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사에게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어디였을까? 손잡이가 아닐까. 칼을 쥐고 베고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칼을 잡아야만 한다. 이 손잡이는 무사들이 특히 신경을 쓴 부분이다. 무사들은 손잡이가 땀에 절어 미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가죽을 촘촘히 감기도 하였지만 가장 선호한 것은 거칠은 상어 껍질이었다. 사포-말 그대로 상어 껍질-를 감고 그 위에 장식을 한 손잡이는 쉽게 미끄러지지 않으면서도 미학적인 면이 뛰어났다. 무사들은 칼을 뽑으면 가장 먼저 상어 껍질의 질감을 손바닥으로 느꼈다. 그 감각을 상실한다는 것은 자신이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무사들은 다도를 즐기며 거친 표면의 조선 막사발 찻잔을 손으로 감싸고 칼에서 느꼈던 감각을 음미하였다. 즉 다도는 냉혹한 칼잡이 세계의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긴장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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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오해 한가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언제부터 우리가 영화속에서 익숙해진 모습으로 역사 속에 등장할까? 학자들은 대략 18세기에 북아메리카를 무대로 잉글랜드, 프랑스, 에스파냐가 각축을 벌이면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인디언들을 근대적 무기로 무장시키면서부터라고 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인디언들에게 근대적 무기인 소총이 흘러들어간 것은 백인들 특히 모피상들의 탐욕 때문이었다고 한다. 모피와 연결된 인디언 사회는 모피무역과 깊이 연결되면서 유럽의 주변부 무역지대로 편입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 결과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의 전통적인 복장은 백인사회의 복장과 혼합되었으며, 혈통 역시 백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혼혈인들은 중간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백인사회와 인디언 사회를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들 혼혈 인디안을 통해 인디안 사회는 근대적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들의 잊혀져가는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인디언 사회는 우리가 일괄적으로 수렵사회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다양한 전통과 문화 그리고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북미 대륙은 대한민국과 같은 국가가 50개 이상이 존재하는 거대한 땅이라는 점이다. 이 거대한 땅에 흩어져 생활하였던 인디언들의 문화는 일괄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흔히 영미의 역사학자들은 인디언들이 야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에스파냐의 잔인한 통치의 결과라고 말하곤 한다.  인디언들은 에스파냐의 잔인한 박해를 피해 남서부 건조지역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고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백인을 습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인디언들이 넓은 평원을 버리고 척박한 남서부지역으로 몰려든 것은 백인이주민들의 서진에 의한 결과라는 점이다.

인디언들의 삶은 수렵과 농경이 가미된 다양한 사회였다. 수렵은 자신들이 소비할 수 있는 최소의 범위내에서만 시행되었다. 하지만 이런 인디언적인 미덕은 백인 산업사회의 주변부 지역으로 편입되면서 백인들의 공격적인 행위 앞에서 무력화되고 말았다. 개척시대 서부의 한 기록을 보면 백인 사냥꾼 한 명이 잡은 들소의 양이 5명의 인디언이 사냥한 양보다 훨씬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인디언 사회는 이런 백인들의 공격적인 공세 앞에서 점차 무력화되었고, 그 과정이 심화되면서 영화속의 인디언의 모습을 강요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화속의 인디언의 모습은 자신들이 원해서 된 모습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강요된 박제화된 극히 제한된 이미지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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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체제 예술"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체제의 예술이라는 익숙한 시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아웃사이더의 예술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작품들의 흐릿한 흑백사진을 보면 거칠고, 투박하며, 단순명료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런 그림과 조각을 한동안 바라보면 거기에서 어떤 힘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라는 실체이다.

인간은 진보와 변혁을 소망한다. 하지만 그것의 중심은 언제나 인간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진보라는 이름의 기계적 사회는 메트로폴리스와 같은 황폐함 혹은 모던 타임즈와 같은 인간성 상실의 세계를 보여줄 뿐이다. 진보란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공동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피카소는 예술에서 발전이란 것을 "예술 그 자체가 발전하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상상력이 변화하고, 그와함께 인간의 표현능력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예술가는 두 장의 거울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사람들은 한편의 거울에 무한히 반복되는 상을 과거의 작품이라고 부르고, 다른 한편에 비친 상을 미래의 작품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피카소는 사람들은 그것이 모두 같은 그림이고 단지 차원이 다를 뿐이라는 생각을 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카소는 자신이 사용한 여러 방법을 발전이라든가 색다른 회화이념의 한 단계로 생각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피카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작품은 모두 현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이런 사고 방식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자신의 선배인 고야의 작품에서 또 다시 만날 수 있다. 고야의 작품집 "카프리치오(마음내키는대로)" 연작 시리즈가 그것이다. 고야는 이 연작집 가운데 23번째 작품인 '이 오욕!'이라는 작품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작품은 참회복을 입고 오욕의 상징인 삼각뿔 모자를 쓴 창녀가 목을 늘어뜨리고 종교재판관의 판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야는 이 작품에 "빵과 버터를 위해서 열심히 사회에 봉사하는 용감한 여자를 이렇게 취급하다니, 치욕이다!"라는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이 주석이 종교재판관들의 심사를 건드렸고, 고야는 심문관에게 질문을 받았다. "누가 이 여자를 나쁘게 취급하고 있다는 것인가? 종교재판소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인가?" 고야는 "숙명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재판관은 "숙명이란 뭔가?" 하고 재차 질문하자, 고야는 심사숙고 끝에 "데몬Demon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저자는 여기서 데몬이란 악마가 아니고 인간의 내면 속에 내재하면서 인간의 운명을 거부할 수 없도록 지배하는 영, 즉 선과 악을 초월하여 부정도 긍정도 소용없이 인간을 휩쓸려가게 하는 거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힘을 의미한다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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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quarter

쿼터는 일반적으로 1/4을 의미하지만, 둠즈데이 북에서는 펄롱furlong으로 사용된다. 펄롱은 1마일의 1/8이다. 1마일mile이 대략 1.609㎞이므로 펄롱은 200m 정도가 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쿼터나 펄롱 모두 현재의 10진법 체계에서의 1/4나 1/8이 아니라 모두 60진법 혹은 12진법의 1/4, 1/8이라는 점이다.

펄롱은 고대 영어 풀랑furlang에서 유래되었는데 풀랑은 밭고랑의 길이를 뜻한다. 이 플랑의 길이는 대략 농부가 쟁기로 한번 밀고 가서 되돌아오는 거리의 반(약 201.17m)에 해당된다. 


2. rod

라틴어 비르가virga에 해당된다. 로드는 라틴어 비르가타virgata-영어로는 버게이트virgate-에서 유래된 것으로 기록에서는 보통 ‘v’ 혹은 ‘virg’로 표시된다. Virga나 Virgata는 어근의 의미가 같다. Virga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권위의 표시로 가지고 다니던 버드나무 다발로 묶은 막대기-fasces-를 의미한다.

로드는 1에이커-대략 4046.8㎡-의 1/4-약 1011.70㎡-을 의미하고, 버게이트는 하이드hide-60에서 120acre-의 1/4-15에서 30acre-을 뜻한다.

로드는 길이의 단위일 때는 5.5야드(약 5.03m)이고, 면적의 단위일 때는 버게이트virgate(1/4 하이드hide약15에서 30acre)라고 부른다. 1acre는 대략 가로와 세로가 64m가량 된다.


3. sester

라틴어 섹스타리움sextarium에서 온 말이다. 섹스타리움은 1/6을 의미한다. 이 단위가 용량으로 사용될 때는 1/6 콘지우스congius(약 3.25ℓ)이고, 곡식 들이로 사용될 때는 모디우스modius(약 7ℓ)의 1/16 이다.

이 도량 단위는 변화가 심해 잘 사용되지 않았지만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에서 왕실과 전국의 표준량으로 인용되기 시작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세스테르는 둠즈데이북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용량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세스테르에는 큰 세스테르와 작은 세스테르가 있었다. 이 세스테르 단위를 사용하는 것으로는 보리, 밀가루, 꿀, 귀리, 라이, 소금, 밀과 포도주 등이 있다.

세스테르는 1/6 콘지우스일 때는 541그램 정도 이고, 1/16 모디우스일 때는 437그램이다.


4. stick

고대 영어 stician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은 ‘찌르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위는 일반적으로 영주에게 뱀장어를 바칠 때 사용하였다. 25마리의 뱀장어가 1스틱이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두름’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계산으로 한 두름은 열 마리씩 엮어서 두 줄이 된다.

장어는 중세 민물 생선 가운데 귀족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장어는 비타민 A가 풍부하여 보양식품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1세는 장어를 과식하여 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인기 있던 식품이었다.


5. hoccus

이 단어의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둠즈데이 북에서는 이 단어를 제염소製鹽所와 연관 지어 사용하고 있다.

잉글랜드의 염전鹽田은 동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잉글랜드 동부의 기후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기후를 보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습기 많은 기후와 구별되었다. 그래서 잉글랜드에서 동부의 이스트 앙글리아East Anglia지역에 염전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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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을 찾아서 1 이산의 책 40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김우영.강인황.허형주.이정 옮김 / 이산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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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구인들이 일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알 수 있는 한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서구인들은 이제 일본에 관해 일천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저술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서구인들이 일본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는 근대 일본의 시작을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이묘들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로 보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일본을 누가 지배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이 그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사실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모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지만 당시 지정학적인 열악함으로 인해 변방 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은 조선과 전쟁을 벌여 중심부의 문화를 직접 접할 수 있는 기능공들을 대량으로 납치함으로서 비로서 주변부 국가의 열세를 딛고 자신들만의 기술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 지배의 차원을 떠나 이미 태동하고 있떤 근대적 혜택을 누가 차지하는가하는 문제와도 깊이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쿠가와나 미쓰나리 그 어느 누가 일본을 지배하였다 하더라도 임진왜란을 통해 획득한 기술적 노하우를 이용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만큼 당시 일본은 주변부 국가로서의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물론 그 방법이 전쟁을 통한 방법이었지만....

이렇게 근대를 시작한 일본은 그 태생의 범죄성으로 인해 언제나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는데 있어 무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본의 모순은 자신들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 국가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일본의 상황인식은 결국 자신의 몰락과 주변 국가의 고통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 책은 일본이라는 주제를 감상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 사실을 통해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의 문명을 독자적인 것으로 기술함으로서 한국의 기여도가 과소평가되는 것이 거슬리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문명과 문화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공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객관적인 사실도 인정해야만 한다는 점도 알게해 준다. 그리고 서구인들에게 일본은 이미 하나의 독자적인 문명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점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서구인들의 역사적 관점에 우리의 역사적 입장은 초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서구인들의  이런 일본관은 자료의 선택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례로 일본이 중국과 한국의 문화전파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기 위해 나카사키와 유럽인들을 강조하지만 대마도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한국측의 자료는 거의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그리고 설사 한국측 자료가 이용되었다하더라도 일본에 의해 한번 걸러진 자료를 이용함으로서 문화적 전수관계를 모호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런 모호한 점은 각각의 다른 부분에서 모순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 책은 현대 일본을 이해하는 훌륭한 길잡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사고가 어떻게 시작되어 완성되었으며, 이런 사고 방식이 현대 일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본적인 실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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