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오해 한가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언제부터 우리가 영화속에서 익숙해진 모습으로 역사 속에 등장할까? 학자들은 대략 18세기에 북아메리카를 무대로 잉글랜드, 프랑스, 에스파냐가 각축을 벌이면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인디언들을 근대적 무기로 무장시키면서부터라고 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인디언들에게 근대적 무기인 소총이 흘러들어간 것은 백인들 특히 모피상들의 탐욕 때문이었다고 한다. 모피와 연결된 인디언 사회는 모피무역과 깊이 연결되면서 유럽의 주변부 무역지대로 편입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 결과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의 전통적인 복장은 백인사회의 복장과 혼합되었으며, 혈통 역시 백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혼혈인들은 중간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백인사회와 인디언 사회를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들 혼혈 인디안을 통해 인디안 사회는 근대적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들의 잊혀져가는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인디언 사회는 우리가 일괄적으로 수렵사회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다양한 전통과 문화 그리고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북미 대륙은 대한민국과 같은 국가가 50개 이상이 존재하는 거대한 땅이라는 점이다. 이 거대한 땅에 흩어져 생활하였던 인디언들의 문화는 일괄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흔히 영미의 역사학자들은 인디언들이 야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에스파냐의 잔인한 통치의 결과라고 말하곤 한다. 인디언들은 에스파냐의 잔인한 박해를 피해 남서부 건조지역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고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백인을 습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인디언들이 넓은 평원을 버리고 척박한 남서부지역으로 몰려든 것은 백인이주민들의 서진에 의한 결과라는 점이다.
인디언들의 삶은 수렵과 농경이 가미된 다양한 사회였다. 수렵은 자신들이 소비할 수 있는 최소의 범위내에서만 시행되었다. 하지만 이런 인디언적인 미덕은 백인 산업사회의 주변부 지역으로 편입되면서 백인들의 공격적인 행위 앞에서 무력화되고 말았다. 개척시대 서부의 한 기록을 보면 백인 사냥꾼 한 명이 잡은 들소의 양이 5명의 인디언이 사냥한 양보다 훨씬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인디언 사회는 이런 백인들의 공격적인 공세 앞에서 점차 무력화되었고, 그 과정이 심화되면서 영화속의 인디언의 모습을 강요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화속의 인디언의 모습은 자신들이 원해서 된 모습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강요된 박제화된 극히 제한된 이미지일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