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열린책들 세계문학 54
볼테르 지음, 이봉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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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묵은 책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볼테르라는 '고색창연한' 이름도 그렇고, '캉디드'라는 아주 고전적인(?) 책 제목도 그렇다. 오랫동안 낡은 서가 어딘가에 처박혀 있음직한 책. 새삼 이 책을 들춰 읽게 된 까닭은 얼마 전에 번스타인의 '캔디드(candide)'가 무대에 올랐던 것 때문인데, 그게 이 묵은 책을 내게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서가 어딘가에 범우사판이 분명히 꽂혀 있었는데, 도무지 찾을 길이 없어 열린책들 판을 사서 읽었다. 이 책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았으나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캉디드'는 내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이었던 것이다. 원래 자신이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없는 법이 아니던가. 


이솝우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이 세상은 최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쯔의 세계관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순진한 청년 캉디드'의 좌충우돌, 종횡무진 모험기인데, 그의 모험담은 우화적인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당대의 종교, 권력, 전쟁에 대한 풍자적 비판이 아주 유머러스한 문체와 스토리 속에 녹아 있다. 주인공 캉디드는 퀴네공드와 키스를 한 '죄'로 귀족의 성에서 쫓겨나 불가리아, 포르투갈, 남미, 페루의 엘도라도, 프랑스, 네덜란드, 베네치아,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을 전전하며 죽다 살아나거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거나 기인을 만나거나 죽었던 스승과 옛 애인을 만난다. 우연과 기연(奇然)이 뒤죽박죽으로 반복되는 소설. 볼테르는 엄숙하거나 자못 진지한 체하는 사상가가 아니라 유쾌한 악동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삶의 아이러니, 곧 이 세계가 최선의 세계라는 순진한 믿음이 배반당하는 과정에 있다. 최선의 세계가 아니라 최악의 세계이거나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한 바다. 볼테르의 풍자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이 스토리가 순진한 믿음을 배반하는 교회를 비롯한 당대의 제도와 관습, 부당한 권력과 인간이 가진 사악한 이기심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추악한 세계이므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한다"는 것, "인간은 놀기 위해 태어나기 않고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소박한 근면의 세계. 캉디드와 그의 무리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작은 마을에 정착해 농사를 짓는 이유다. 


캉디드의 거창한 모험 치고는 결말이 너무나 단순한데, 어쨌든 천상의 하늘을 바라보지 말고 네 주변의 땅이나 갈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라는 게 그의 전언이다. 미인이었던 퀴네공드는 늙고 보니 추녀가 되어 있었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 철학자는 터키의 한 농부만도 못한 인식을 갖고 있다. 내가 주목한 것 중의 하나는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761년의 세계상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이다. 남미를 비롯한 신대륙에 대한 경이와 환상(엘도라도), 대항해 시대를 거쳐온 유럽인들의 지리적 인식이 주인공의 모험을 통해 드러난다. 이 길지 않은 작품에 지구의 반 이상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볼테르의 합리주의는 이 전지구적 인식에 근거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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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 검은 유혹, 맛의 디아스포라
유중하 지음 / 섬앤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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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에 갔다가 유중하 선생의 책 <짜장면>이 있어 냉큼 사서 아주 재밌게 읽고 있다. '검은 유혹, 맛의 디아스포라'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읽은 게 <삼국지> 밖에 없어서 중문과에 갔다"던 유 교수님의 '썰의 수준'을 알고 있는지라, 그 썰이 과연 짜장면에도 통할 것인가 궁금했던 것. 과연 유 교수님의 썰은 깊고도 중후하고 박람이고 강기이며, 중국집 식탁이라는 '구체적 실감'과 동아시아론이라는 '추상적 담론'을 넘나드는 진경이다.

말하자면, '먹방' 수준의 음식 평도 아니요, 한때 유행하던 'xx의 역사' 운운하는 지엽말단의 미시사도 아니다. 라면과 짬뽕, 짜장면으로 얽힌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교류와 교섭, 문화의 뒤섞임과 재탄생, 창비류의 '동아시아담론'의 미시적 확장이다. 그런데 그것이 본인의 식도락을 넘어선 인천, 연태, 베이징의 현장탐구로 세심하게 뒷받침되고, 유쾌한 썰로 풀어내니 재미가 없을 수 없다. 동아시아론이 <세까이>와 <창비>의 심심한 탁자에서 벗어나 일상의 감각으로 생생한 제 몸을 얻은 형국.

아편에 절은 청조 말의 중국이 인삼이 귀해지자 바다의 인삼인 '해삼'을 발견했다는 썰이나 북경식 짜장면+울면이 한국에 와서 한국식 짜장면으로 탄생했다는 대담한 가설이나 동아시아 해상네트워크가 이들 3국의 식탁을 변용시켰다는 것이나 한국최초의 중국집 '공화춘'이 손문의 신해혁명과 광둥, 복건, 상해, 옌타이, 인천, 나가사키, 고베로 이어지는 동북아 화교 네트워크의 산물이라거나 하는 주장 등등, 중국집 빼갈 마시며 풀어놓을만한 썰들이 아주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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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밤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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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책을 샅샅이 뒤져 읽는 터라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이숲의 올빼미)와 <환상의 밤>를 경기도 모서점에서 발견했을 때 반갑기 그지 없었다. 한때의 박완서가 그랬듯이 내게 츠바이크는 책읽기기가 지루해졌을 때마다 찾게 되는 작가다. <크리스티네>는 1차 대전으로 급격하게 몰락한 오스트리아의 시골마을 우체국에서 일하는 '아가씨'의 이야기다. 부유한 미국인이 된 이모의 초대로 스위스의 유명 관광지 호텔에 초대받은 그녀가 '상류층 문화'에 눈뜨게 되고 급기야는 우체국 예금의 횡령을 모의하게 된다는 스토리. 이 아가씨의 초라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인식과 신분상승에의 욕망을 맛깔스럽게 묘사하는데, 그 과정은 드라마틱하고 리얼하다. 프로이드와 동시대를 산 심리소설의 대가가 쓴 작품답다. 다만, 촌스럽고 천박해보이는 표지 디자인은 불만이다. 이 정도 소설이면 대접을 제대로 해줘야 할 것인데, 싸게 만든 티가 심하게 난다. 


<환상의 밤> 역시 츠바이크의 심리에 대한 묘사가 오롯한 작품이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소설을 보는 듯한, 부르주아/귀족주의 문화의 공존과 음습하고 저열한 욕망이 병행하는 비엔나의 윤리적 이중성을 개인의 심리적 변화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이야기. 귀족주의적 세련 저 너머에 숨은 '욕망'이 껍데기를 벗고 드러나는 과정은 해방에의 충일감 같은 심정으로 표현된다. 꼭 동여맨 코르셋과 단추를 모두 채운 비엔나 귀족 수트의 아랫도리에 숨겨진 욕망. 츠바이크가 비엔나의 이중성을 비판하려 했다기 보다는, 당대의 억압적 분위기를 욕망의 해방과정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두 책 모두, 그의 작품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영화적 서사로 풀어낼 수 있을 만큼, 잘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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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1-0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사이님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모든사이 2019-01-08 16:56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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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알게 된 작가였다. 뒤틀린 욕망과 서늘한 반전을 보여주었던 영화 <어톤먼트>와 젊은 날의 실수로 평생의 사랑과 행복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청춘들의 이야기 <체실 비치에서>. 공교롭게도 두 영화에는 외모에서부터 심리적 복합성을 드러내는 시얼샤 로넌이 작가의 퍼소나처럼 등장한다. 그의 작품은 묘사보다는 서술이 도드라지는데, 이 서사적 기술은 치밀하고도 정교하며, 차가울 정도로 가차없다. ‘하드 보일드의 원조쯤 되는 토마스 하디의 계보를 잇는 영국 소설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하여간, 뒤늦게 발견한 이 현대 영국작가의 작품을 내리 읽기로 하고 첫 장편으로 <이노센트>를 골랐다. 영화로 만들어진 <속죄><체실 비치>는 다음에 읽을 참이다.

 

작가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간략한 소개가 나온다. “‘베를린 터널’, 작전명 골드는 CIAM16의 합동작전으로, 19564월까지 일년이 조금 못되는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CIA 지국장이었던 윌리엄 하비가 책임자였다. 19554월부터 플라타넨 길 26번지에 거주하도 있던 조지 블레이크는 작전 기획위원회 서기로 일하던 1953년에 이미 작전을 누설했다고 추정된다.” 이 냉전 하의 조그만 사건, ‘베를린 터널사건은 이 소설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베를린이 마악 동과 서로 나뉜 시기, 서방 연합군측인 영국과 미국은 동쪽의 소련 점령 지역 아래로 터널을 뚫어 동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통신을 도청하려 한다. 이언 매큐언은 이 에피소드에 로맨스와 살인, 배신과 회한을 버무려 한편의 잘 빚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이 소설은 냉전 시대의 스파이 소설이면서, 로맨스 소설이면서, 치정과 살인에 얽힌 엽기적 스토리이면서, ‘순진한 한 영국인의 뼈아픈 회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이 소설은 영화화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에 따른 흥행요소를 두루 갖춘 소설처럼 보인다. 그의 소설들이 계속 영화로 만들어지고 일정한 성공을 가져다준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일 것이다. 단단하게 서술된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들이 가진 극적인 재미들, 주인공들의 감정을 섬세하고 정교하게 드러내는 장치들, “두꺼운 타탄체크 스커트와 빨간 미제 캐시미어 스웨터 차림과 같은 정확한(아니 차라리 사실의 나열과 같은) 문장들. 이언 매큐언은 이름 모를 꽃들이라거나 따스해보이는 자켓따위의 두루뭉수리한 서술을 하지 않는다.

 

나이든 탓인가. 주인공 레너드 마넘과 마리아가 약혼을 하던 날 밤, 우연히 저지르게 된 마리아 전 남편 오토의 살해와 시체 유기장면은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우연한 충돌과 그에 따른 구두주걱으로의 살인, 사체를 유기하기 위해 토막을 내고 그걸 베를린 터널로 운반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언 매큐언의 서술은 끔찍할 정도로 냉정하다. 토막내기라는 행위의 급박함과 심리적 요동은 무정한 서술과 병치되어 효과가 배가되는데, 이를 이끌어나가는 솜씨는 과연, 대가의 그것이었다. 그가 창조한 인물의 다급한 심리와는 정반대로 그의 서술은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일상의 베를린을 서술하고 묘사한다.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소설가라야 가능한 일이다.

 

이노센트는 사실 역설적이다. 레너드 마넘이 순진하게냉전적 대결의 한복판에 서게 되고, 로맨스와 배신의 한 가운데에서 자신의 순정을 배반당한다는 의미일 것인데, 그의 비극은 연인 마리아가 배신했다고 믿는 또 한번의 순진함에 있다. 그녀의 진실은 배반이 아니었고, 정작 배반은 그의 순진한 오해가 낳은 참사였던 것. 이언 매큐언은 마치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서처럼 극적인 사건들의 시간이 지난 뒤, 먼 시간이 지난 뒤의 에필로그에서 사태의 진상을 후술한다. 심리적 시간의 지속과 그것을 급격하게 단절시키며 과거를 정반대로 재생하는 현재. 이 작가가 뒤늦은 후회와 가련한 회상에 능한 작가라는 사실을 에필로그를 통해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줄리안 반즈, 가즈오 이시구로 이후 가장 즐겨찾게 될 것 같은 영국 소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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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익명의 여인 지음, 염정용 옮김 / 마티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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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떠올렸던 것은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였다. 두 책 모두 2차 대전과 그 전쟁을 몸으로 겪었던 여자들의 이야기다. 전장에서 죽어간 것은 주로 전투병인 '남자'들이었지만, 그 전쟁의 후과를 가장 잔인하게 겪은 존재들은 여자들이었다. 특히 '패전국'의 여자들이 그러했다. 아마도 고대의 전쟁 이후로 모든 전쟁의 양상은 그러했을 것이다. 전쟁이 아니어도 제국의 지배하에 놓인 식민지의 여성들은 제국-식민 체제하의 최말단 '내부식민지'로서 이중적 억압과 폭력 속에 놓여 있었다. 스베틀라나의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주로 '민중'이라면, 이 책의 저자는 지식인 여성이다. 그녀는 독일의 패전과 전후의 상황을 섬세하게 관찰하며, 예민한 자의식으로 러시아 병사들에게 '그짓'을 당한 자신의 경험을 성찰적으로 드러낸다. 


"별안간 국민이 아닌 개인이 되었다."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 포성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쓰여진 문장이다. 이 짧은 문장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진술이다. 국가라는 보호막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공동체에 결속되어 있는 '국민'도 사라졌다. 어제까지 독일의 승리를 떠들던 나치 지도부와 미디어도 없어지고, 쓰라린 패배를 온 몸으로 겪어야 하는 것은 그저 나약한 '개인'일 뿐이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남의 집을 뒤지거나, 추위를 막기 위해 시체에서 신발과 옷을 벗기고, 감자 한알을 두고 서로 아귀다툼을 해야 하는 것은 이제 낱낱의 개별자들이다. 여자들은 정복자들에게 자신의 몸까지 내줘야 한다. 아니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몸'을 빵과 거래해야 한다. 함락직전에도 "구원이 가까워졌으며 승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그분'은 그리스도 만큼이나 믿을만하다고 장담"하는 나치 광신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통 베를린 시민들은 자신의 아내와 딸이 러시아군에 겁탈을 당한 뒤에야 '패전의 현실'을 깨닫는다. 


"나약한 성이 된 남자들. 여자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움튼 일종의 집단적인 환멸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여자들을 지배하던 남자들, 강한 남자를 찬미하던 나치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나아가 '남성'이라는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전쟁에서 남자들은 조국을 위해 죽고 죽일 수 있는 특권이 남자에게만 있다고 주장해왔다. 전쟁은 우리를 변화시켰고 우리는 담대해졌다. 이 전쟁이 끝나면 수많은 패배와 더불어 '남자들'의 패배도 찾아올 것이다."(p.58)


그러니,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군대와 국가의 패배이자 남성성의 패배이기도 하다. 저자의 '애인'이었던 게르타가 나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애인이 쓴 이 일기를 읽고 나서 '겁탈'이라는 말을 듣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듯이 쳐다보더니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떠난다. 이 책이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고 나중에서야 스위스와 독일에서 출간된 것도 이해가 된다. 한국 남자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흥분하고 분노하는 심리의 저변에는 패배한 남성성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한 대목. "러시아 병사가 그녀를 끌어내려 하자 함께 지내던 어떤 남자가 이렇게 외쳤단다. '제발 빨리 따라가요. 당신이 우리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잖아요'" 이를 두고 저자는 "서구 몰락에 대한 간략한 주석"이라고 덧붙인다. 그 몰락한 서구는 '남성성으로서의 서구'다. 러시아 병사들은 동물적 강간을 일삼다가 더 나아가 독일 여성들에게 순정함과 자발적 애정까지 요구한다. "그들은 정복한 향락의 대상에게서 단정함과 순박함과 고귀한 성품까지를 요구한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몰락한 남성성 만이 아니라 폭력의 주체인 남성적 시각 저변의 무의식이 이러하다. 


이 내밀한 일기의 주인공은 오랫동안 익명으로 묻혀 있다가 나중에야 기자출신의 마르타 힐러스라는 여성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녀는 유럽 10개국을 여행했으며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를 할 줄 알고, 공산주의자로 러시아에 머물기도 했으나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전쟁을 맞았다. 그녀는 러시아군의 강제에 의해, 또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내어 준다.(아니 강제당한다) 그녀 주변의 독일 여성들은 나이가 들거나 어리거나 간에 만나면 서로 "너도?"라고 물을 만큼, 러시아군에 의한 집단강간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당시 270만명의 베를린 주민중 200만명이 여성이었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베를린 여성은 거의 없었다. 그녀의 선택. "다른 온갖 늑대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마리 늑대를 불러들여야 해, 장교를. 가능한 계급이 높아야 겠지. 지휘관이든 장성이든, 내가 데려올 수만 있다면." 전후의 혼란기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인 야만의 세월이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한 사망자와 학살자 수를 러시아의 그것과 단순비교했을 때, 베를린의 집단 강간사태는 어쩌면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죽은 러시아 민간인과 군인, 독일의 전격전, 나치친위대가 자행한 동유럽 유대인과 러시아인 학살과 강간은 훨씬 더 광범위했고 피해자도 많았다. 패전 당시 베를린 주민들도 자신들의 겪는 고통이 '인과응보'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 독일인 집에 거칠게 침입한 러시아 병사들은 '아기'를 보자 갑자기 온순해지며 폭력을 멈춘다. 그리곤 독일군이 고향마을에서 아이들을 찔러 죽이고 아이들의 머리를 벽에 내리쳐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군인들도 그곳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야." 독일인들은 그들이 저 '농민'의 자식들인 러시아 병사들보다 더 문화적이며 문명화된 존재라고 인식하지만, 실상 독일 군대(그리고 히틀러를 지지함으로써 암묵적으로 그들의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한 독일인들)의 폭력은 그들의 문화가 추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히틀러의 '대중독재'를 탄생시킨 독일적 특수성, 독일인의 기질들을 드러내는 대목들을 문득문득 보여준다. 스스로 낯설게 하기, 또는 자기 객관화할까. 내가 밑줄을 그은 대목들도 대개 파시즘을 가능케한 독일인의 심성구조를 보여주는 부분들이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질서의 원칙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해 있으며, 우리는 따를 뿐이다." "어떤 남자도 여자-자기부인이든 이웃의 부인이든 상관없이-를 정복자에게 내준다고 해서 체면을 구긴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지배자를 거역해 화나게 만든다고 못마땅해할 것이다." "독일 민족에게는 빨치산 기질이 없다. 우리는 영도와 명령을 필요로 한다.""한 여자를 마주쳤는데, 안마당 구석에서 치마를 까 뒤집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거리낌 없이 볼일을 보았다. 베를린에서, 독일 여자가 드러내놓고 이런 행동을 하다니." 


"베를린 방송이 흘러나왔다. 방송은 거의 언제나 뉴스와 비화, 피비린내나는 사건, 시신발굴, 잔학행위들을 보도했다. 동부지역에 있는 대형 강제수용소들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불태워졌으며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고 했다. 그들의 시신을 태운 재로 비료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모든 것이 두꺼운 장부들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죽음마저 꼼꼼히 기록하다니, 그야말로 착실한 민족이다. 밤늦게 베토벤의 곡이 흘러나왔다. 잊고 있던 음악을 듣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나는 방송을 꺼버렸다. 지금은 들을 수가 없다."(p.275) 


저자는 스스로 유럽 여러 곳을 가보았고, 공산주의, 의회주의, 파시즘을 바로 가까이에서 경험한 지식인 여성이지만, '나찌즘'은 그녀에게조차 내면화되어 있다. 파리 여행 중 뤽상부르 공원에서 만난 한 네덜란드 남자와 로맨스가 펼쳐지려는 순간, 그녀는 그와 함께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군인들처럼' 걷기 시작한다. 그순간 남자는 "아, 총통의 딸이군!"이라 말한다. 자신은 네덜란드인이자 유대인이었던 것. 결국 그들은 다음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녀는 이 에피소드를 두고두고 곱씹는다. 그녀는 나치체제에 대한 찬성여부와 상관없이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비록 원하지 않았다하더라도 나를 둘러싸고 물들였던 공기를 들이 마셨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그녀의 이 도저한 자기고백과 성찰들이 이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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