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다 고코의 요리와 인생 이야기 - 세계 6대륙 30개국의 맛을 찾아 떠난
시노다 고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이마고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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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문화다. 이 ‘진부한’ 문장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곽재구의 시는 어떨까. “김치찌개 하나 둘러 앉아/저녁식사를 하는 식구들의 모습속에는/하루의 피곤과 침침한 불빛을 넘어서는/어떤 보이지 않는 힘 같은 것이 들어있다. /실한 비계 한 점 아들의 숟가락에 올려 주며/야근 준비는 다 되었니 어머니가 묻고/아버지가 고추잎을 닮은 딸 아이에게/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지 그렇게 얘기할 때/이 따뜻하고 푹신한 서정의 힘 앞에서/어둠은 우리들의 마음과 함께 흔들린다. ”(‘김치찌개 평화론’)

한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김치찌개’보다 더 실감나는 한국의 서민문화가 있을까. 일본 여성 시노다 고코는 이를테면 세계 각지의 ‘김치찌개’를 맛보며 다니는 이색적인 여행가다. ‘시노다 고코의 요리와 인생이야기’는 세계 6대륙 30개국을 떠돌며 그 지역의 풍토와 음식에 대해 풀어놓는 독특한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미식가의 한가한 음식기행이거나 요리를 테마로 한 여행가이드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유명한 음식을 먹기 위해 여행하는 식도락가가 아니라 그곳의 소박한 밥상을 통해 삶과 문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일 뿐이다. “세계를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음식을 통해 세계를 음미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믿음이다. 홍콩에서 자란 일본인으로 여러 나라에서 생활했던 저자는 유명 여행지가 아닌 곳을 음식기행지로 택했다. 아일랜드의 땅끝에서부터 모스크바의 서민가정, 아프리카 사막과 베이징의 거리를 두루 쏘다녔다.

그녀가 알려주는 맛과 인생의 목록은 참으로 다양하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저자는 화이트 아스파라거스의 네덜란드 소스를 맛봤다. 하지만 그 요리를 알려준 독일 아가씨는 교통사고로 죽고 그녀의 아버지와 저자만이 남아 다시 그 요리를 만들지만 거기에 스민 그리움의 맛은 좀처럼 느낄 수 없었다. 영국신사의 집에 초대된 저자는 화려한 성찬이 아닌 귀족의 어린 딸이 사온 크럼펫을 맛보며 무너져 가는 귀족사회의 모습을 실감한다.

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족에게 대접받은 연록색의 박하차 맛은 신기루 같았다. 그 부족의 천막을 다시 찾으려 했지만 이미 사막 저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비즈니스맨이 득시글거리는 뉴욕은 어떤가. 뉴욕의 점심시간에 그녀는 “마치 수류탄처럼 보이는 베이글”을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마우스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뉴요커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본다.

그녀가 한국에 온다면 어떤 반응일까. 한국인들은 허겁지겁 점심을 먹고 손에 손에 자판기 커피잔을 들고 일터로 향한다. 아프리카나 유럽보다는 뉴욕의 비즈니스맨에 가까운 풍경이다. 물론 저녁시간에 김치찌개 앞에 둘러앉아 온기를 나누는 가족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직업의 다른 말은 밥벌이다. 저자가 음식을 통해 말하려는 것도 그것일 터다. 세계인들이 한그릇 밥을 마련하기 위해 들이는 땀과 눈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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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 먹다 - 전희식의 귀농일기
전희식 지음 / 역사넷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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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물 수입 개방으로 위기에 몰린 농민들의 처지는 절박하기 그지없다. 농민들은 정든 고향과 논밭을 등지고 있지만 도시의 한 켠에서는 조용한 귀농행렬이 이어진다. 8년 전 처자식을 이끌고 전북 완주에 내려간 전희식 씨도 그 중 한사람이다. 그는 “땅과 자연에 가까이 가는 생활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귀농해 고추를 심고 감자를 키우며 살고 있다. 이웃들과 품앗이 노동을 통해 손수 집을 짓기도 했다. 그가 펴낸 ‘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다’는 틈틈이 써왔던 귀농일기를 모은 것이다.

도시인의 귀농행렬은 몇 년 전부터 유행하던 ‘느림의 미학’과 무관하지 않을 터다. 도시의 숨막히는 공기를 행복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귀농을 꿈꿔보지 않은 도시인들이 과연 있으랴. 퇴직 후 시골에 내려가 손수 농사를 짓는 조용한 전원생활을 생각해보지 않은 도시인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전씨의 귀농일기를 펼쳐보면 ‘낭만적 전원생활’은 허무맹랑한 몽상이다. 낭만을 안고 귀농하는 사람들은 “농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시골을 망쳐놓는 사람들”이라는 게 전씨의 생각이다. 그에게 귀농이란 ‘업종 전환’이 아니라 ‘삶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전씨는 부인과 실상사의 작은 학교에 다니는 큰 딸 새날이, 초등생인 아들 새들이와 함께 살고 있다. 전씨 부부의 삶도 유별나지만 두 자녀도 그렇다. 새날이는 교사의 일상적인 폭력이 싫어 스스로 대안학교를 택했다. 두 자녀는 부모를 도와 일을 하면서 공부한다. ‘조화로운 삶’의 저자로 잘 알려진 스콧 니어링·헬렌 니어링 부부가 메인주의 시골마을에 정착해 평생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듯이 전씨 가족은 몸과 마음이 하나되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그것이 귀농인으로서 그가 추구하는 삶이다. 자동차와 최신 사양의 컴퓨터, 비어 있는 때가 더 많은 아파트를 갖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 않겠다는 게 전씨 가족의 결심이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부분은 전씨 가족이 손수 지은 황토집 이야기다. 준비에서부터 자연친화적인 재료 모으기, 이웃들과의 품앗이, 온가족이 집짓기에 참여하는 과정 등이 애틋하면서도 감동적이다. 그들의 집은 거대한 기계로 지은 도시의 아파트보다 훨씬 포근해 보인다. 전씨 가족들의 ‘노동’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갔던 옛 조상들의 삶을 일깨워준다. 도시의 인공적 삶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시대에도 인간적 노동을 통한 조화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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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리는 세계 -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
프랜씨스 무어 라페 외 지음, 허남혁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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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는 8억명이 만성적인 굶주림의 상태에 놓여 있다. 만성 기아 때문에 매일 다섯살 아래 어린이 3만4천명이 죽음으로 내몰린다고 한다. 1년이면 1천2백만명으로 2차대전에서 죽은 사람보다 더 많다. 굶주림을 ‘숫자’로만 이해하게 될 때, 해결방법도 역시 숫자다. 식량 원조량이 몇t, 경제원조 금액이 얼마라는 식이다. ‘굶주리는 세계’의 저자들은 “굶주림을 가장 고통스러운 인간감정에 직면한 사람들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굶주림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힘을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TV화면에서 국제 기아문제에 대해 보도할라치면 늘 아프리카를 다루곤 한다. 과연 거기에서만 굶주림이 문제될까. 비만이 심각한 사회적 질병이 되고 있는 미국에서 어린이 8.5%가 굶주리고 있고, 20.1%는 굶주림의 위협에 처해 있다. 북한에서는 1995년부터 굶주림으로 2백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먹을 것이 남아 돈다는 한국에서도 결식아동이 16만명을 헤아린다. 전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 중 4분의 1이 아프리카에 있을 뿐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세계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루 3천5백칼로리를 공급할 수 있는 곡물을 생산한다. 전세계인을 비만하게 만들고 남을 정도다. 그런데 왜 기아사태는 계속 속출하는가.

미국의 비영리 식량문제 연구센터인 ‘식량과 발전문제정책연구소’의 연구원 네명이 집필한 이 책은 굶주림에 관한 잘못된 신화를 까발린다. 세계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상태다, 자연재해로 식량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인구 폭증이 주요 원인이다는 등의 ‘상식’말이다. 그래서 언제나 생산증대를 위한 녹색혁명과 자유무역만이 최선의 대안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허구다. 이 책의 주요 부분은 이 잘못된 신화 12가지를 낱낱이 해부하는데 할애되고 있다.

식량부족이 심각한 나라들도 충분한 곡물을 생산하고 있지만 대부분 선진국으로 수출하다 보니 국내에서는 항상 배를 곯게 된다. 인구가 많아서 식량이 부족해진다고 하지만 나이지리아·브라질·볼리비아 등 인구밀도도 적고 식량자원도 풍부한 나라들에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생각하는 굶주림의 근본원인은 “식량과 토지의 부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에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기술과 자본에 근거한 녹색혁명은 오히려 식량불평등을 가중시킬 뿐이다. 제3세계에서는 수출이 늘어도 굶주림은 지속되고 수출에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일 뿐이다.

이 책의 서문은 세계무역기구(WTO) 5차 각료회의에 항거해 자살한 고 이경해씨에 대한 조사로 시작된다. 저자들은 아무리 가난한 나라들도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는 만큼 기아에서 벗어날 ‘희망’이 있다고 역설한다. 다국적 기업과 이들에 의한 식량식민체제에 기생하는 세력이 문제일 뿐이다. 결국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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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거 정치 - 이념, 지역, 세대와 미디어
강원택 지음 / 푸른길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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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학자 그레고리 핸더슨이 1960년대 후반 펴낸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는 한국 정치에 관한 고전이다. 그는 한국 정치에 대해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향해 어지럽게 돌아가는 소용돌이라고 말한다. 핸더슨의 비유는 특히 한국의 선거정치에 꼭 들어맞는다. 정치권력의 획득이라는 목표 아래 한국 정치에서는 선거 때마다 주기적으로 ‘권력을 향한 소용돌이’가 반복된다. 좋게 말하면 ‘활력’이고 나쁘게 말하면 ‘불안정성’이다. ‘바람’이 몰아치더니 역풍이 불고, 종국에는 군웅할거하던 후보들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한국의 선거정치’는 한국 정치의 지형도를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는 책이다. 그는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시작해 2002년 말의 대선에 이르기까지 10년간 한국 사회가 치러낸 선거를 ‘실증적으로’ 분석해내고 있다. 그는 선거에서 소용돌이를 이루는 네 꼭지점을 이념과 지역, 세대와 미디어라고 말한다. 이 네가지 변수가 선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면서 변해왔는지를 선거 전후에 발표된 각종 여론조사와 통계들을 근거로 상세히 살피고 있는 저작이다.  


한국 정치에서 ‘지역주의’가 확연히 제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1987년 대선이다. 1노3김이라는 지역의 맹주들이 출현했던 당시 선거는 그 이후의 선거를 가늠하는 ‘초석’이 됐다. 저자 역시 ‘지역변수’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다른 중요한 변인들도 존재한다. 특히 서구의 선거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이념’은 한국에서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나 2002년 선거를 거치면서 지역 못지 않은 중요한 변수임이 증명됐다.

하지만 서구 정치에서 이념이 경제적 가치의 배분 문제에서 대립적 양상을 보이는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대북관이나 반공이념을 둘러싼 태도가 문제시된다. 흥미로운 것은 ‘세대’와 ‘미디어’를 또다른 변인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요소는 97년 대선, 2002년 대선 등을 거치면서 특히 도드라졌다. 여론조사와 인터넷의 영향에 대한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여론조사 결과가 쏟아지면서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고, 인터넷은 정치적 의사소통과 여론 형성에 매우 효과적인 도구가 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세대’와 ‘미디어’를 적절히 활용해 승리를 거둔 대표적 케이스다. 지역주의가 가장 위력적이었을 때 유권자들은 새로운 출구로서 제3당, 무소속 후보, 제3후보에 대한 지향을 드러낸다. 저자는 한국 정치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질서를 또렷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지난 선거를 통해 나타난 한국 정치와 유권자들의 의식을 추적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실증성은 이 책을 따분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향후 선거의 양상과 그로 인해 형성될 정치 지형도를 읽어내는 데는 매우 유용한 참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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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드샤 칸 역사 인물 찾기 14
에크나스 에아스와란 지음, 김문호 옮김 / 실천문학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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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과 옛 인도의 국경부근에는 파탄족이라는 부족이 살고 있었다. 그 일대에 거주하는 부족 가운데 가장 호전적인 집단이다. 그들은 ‘바달’이라 불리는 복수의 의무를 대를 이어 수행한다. 그 때문에 파탄족 남성들의 평균 수명은 서른을 넘기지 못했다. 잔인한 연쇄 복수극의 ‘전통’을 끊은 사람은 한세기 전 출현했던 비폭력적인 이슬람 전사 바드샤 칸이다. 칸은 무슬림의 교리를 충실히 이행한 인물이면서도 이슬람 세계에 비폭력의 전통을 세운 ‘이슬람 세계의 간디’다.

이 책 ‘바드샤 칸’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동명의 인물에 대한 평전이다. ‘칸’은 마을의 지도자, ‘바드샤’는 왕을 뜻한다. 가장 호전적인 지역을 가장 평화로운 곳으로 만든 그는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칸중에서도 왕’(바드샤 칸)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인도가 영국 통치 하에 놓여 있었을 때 그는 영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 인도 내부에 만연한 폭력을 일소했으며, 가장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영국인들을 몰아냈다. 칸과 간디는 평생의 동지이면서 그들의 신조인 ‘섬김과 자유’를 실천했던 사람들이었다.

그의 비폭력 저항은 세계 최초의 비폭력 군대인 ‘쿠다이 키드마트가르’(신의 종들)를 통해 이뤄졌다. 그들이 수행한 전쟁은 이렇다. “앞에 있던 사람이 총을 맞아 부상을 입어 쓰러지면, 뒤에 있던 사람이 가슴을 풀어헤치고 앞으로 나와 총탄을 막고 나섰다. 어떤 사람은 몸에 총탄을 스물한 발이나 맞았는데, 사람들은 겁에 질리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결국 그곳에는 부상당하고 죽어가는 자들의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 칸은 독립에 앞서 중요한 것은 자기 민족 내부의 폭력성이라고 생각해 이런 비폭력 군대를 구상했다. 페샤와르에서 영국인들이 대학살을 자행한 뒤 이 군대의 ‘군인’은 1천명에서 8만명으로 오히려 늘어났다.

바드샤 칸의 생애와 최근 매일이다시피 벌어지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이슬람 전사들의‘자살테러’는 사뭇 대조적이다. 테러의 폭력성 이전에 그 사태를 불러온 이스라엘과 미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의 문제점을 먼저 지적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혹은 무슬림들을 오로지 ‘테러리스트’의 모습으로만 비추는 서구의 ‘미디어 제국’이 우리에게 허깨비를 보여주는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이슬람 세계에 ‘위대한 평화주의자’가 존재했었음을 일깨워준다.

간디가 암살되었듯이 칸의 말년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파키스탄과 분리됐고, 칸은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지만 군사 쿠데타로 결국 아프가니스탄에 망명해야 했다. 그가 1988년 98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 내전 중이던 파탄족은 애도를 위해 하룻동안 전쟁중지를 선언했다. 저자는 “폭력없는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인류를 한걸음 더 발전시켜 나갈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쓰고 있다. 이 ‘하 수상한’ 시절에 바드샤 칸의 생애를 가장 먼저 되새겨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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