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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리는 세계 -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
프랜씨스 무어 라페 외 지음, 허남혁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평점 :
전세계에는 8억명이 만성적인 굶주림의 상태에 놓여 있다. 만성 기아 때문에 매일 다섯살 아래 어린이 3만4천명이 죽음으로 내몰린다고 한다. 1년이면 1천2백만명으로 2차대전에서 죽은 사람보다 더 많다. 굶주림을 ‘숫자’로만 이해하게 될 때, 해결방법도 역시 숫자다. 식량 원조량이 몇t, 경제원조 금액이 얼마라는 식이다. ‘굶주리는 세계’의 저자들은 “굶주림을 가장 고통스러운 인간감정에 직면한 사람들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굶주림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힘을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TV화면에서 국제 기아문제에 대해 보도할라치면 늘 아프리카를 다루곤 한다. 과연 거기에서만 굶주림이 문제될까. 비만이 심각한 사회적 질병이 되고 있는 미국에서 어린이 8.5%가 굶주리고 있고, 20.1%는 굶주림의 위협에 처해 있다. 북한에서는 1995년부터 굶주림으로 2백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먹을 것이 남아 돈다는 한국에서도 결식아동이 16만명을 헤아린다. 전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 중 4분의 1이 아프리카에 있을 뿐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세계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루 3천5백칼로리를 공급할 수 있는 곡물을 생산한다. 전세계인을 비만하게 만들고 남을 정도다. 그런데 왜 기아사태는 계속 속출하는가.
미국의 비영리 식량문제 연구센터인 ‘식량과 발전문제정책연구소’의 연구원 네명이 집필한 이 책은 굶주림에 관한 잘못된 신화를 까발린다. 세계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상태다, 자연재해로 식량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인구 폭증이 주요 원인이다는 등의 ‘상식’말이다. 그래서 언제나 생산증대를 위한 녹색혁명과 자유무역만이 최선의 대안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허구다. 이 책의 주요 부분은 이 잘못된 신화 12가지를 낱낱이 해부하는데 할애되고 있다.
식량부족이 심각한 나라들도 충분한 곡물을 생산하고 있지만 대부분 선진국으로 수출하다 보니 국내에서는 항상 배를 곯게 된다. 인구가 많아서 식량이 부족해진다고 하지만 나이지리아·브라질·볼리비아 등 인구밀도도 적고 식량자원도 풍부한 나라들에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생각하는 굶주림의 근본원인은 “식량과 토지의 부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에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기술과 자본에 근거한 녹색혁명은 오히려 식량불평등을 가중시킬 뿐이다. 제3세계에서는 수출이 늘어도 굶주림은 지속되고 수출에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일 뿐이다.
이 책의 서문은 세계무역기구(WTO) 5차 각료회의에 항거해 자살한 고 이경해씨에 대한 조사로 시작된다. 저자들은 아무리 가난한 나라들도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는 만큼 기아에서 벗어날 ‘희망’이 있다고 역설한다. 다국적 기업과 이들에 의한 식량식민체제에 기생하는 세력이 문제일 뿐이다. 결국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