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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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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흔히 베일에 싸였다라고 표현한다. 비밀스러움에 대한 비유이다.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의 원제는 The Painted Veil, 퍼시 비시 셀리(Percy Bysshe Shelley)의 시 첫 구절에서 따왔다.

 

Lift not the painted veil which those who live

Call Life: () 일러두기

 

책 도입부에는 오색의 베일, 살아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라고 쓰여 있다. 오색 역시 많은 색에 대한 비유로, 인생의 비밀스러운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님을 말한다. 우리는 painted veil을 쉽게 파악할 수 없다. 아니, 우리는 그 베일을 통해서 세상을 판단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베일은 인생을 가리는 베일이 무엇인지 찾는 여정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여성인 키티는 자신의 욕망에 부합하는 상대 홍콩 총독부 차관보 찰스와 불륜을 저지르다 자신의 남편 월터에게 들키고, 그 대가로 콜레라로 인한 죽음의 도시 메이탄푸로 함께 간다. 그곳에서 세관원 워딩턴과 그의 만주족 여인, 위험을 무릅쓰고 진심으로 봉사하는 수녀원장과 수녀들, 경이로운 자연경관, 자신이 임신한 사실, 그리고 월터의 환자를 향한 헌신과 그의 죽음을 통해 그녀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한다. 메이탄푸에서 홍콩으로 돌아와 찰스의 유혹에 한 번 더 넘어가지만, 그에 대한 성찰을 통해 내면을 더 공고히 다진다. 어머니를, 아버지를, 동생을 가엾게 여긴다. 더 이상 외면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키티의 베일

 

인간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서 가치관을 형성한다. 가치관은 베일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결정한다. 키티의 베일은 메이탄푸 가기 전과 메이탄푸 도착 후, 그리고 돌아온 후로 나뉜다.

 

메이탄푸 가기 전

 

그래서 앞으로 일이 년 후면 딸의 아름다움도 빛바랠 것이며 젊은 여자들이 계속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딸에게 상기시켰다. 가스틴 부인은 집안에서 말을 에둘러 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곧 결혼 시장에서 값이 떨어질 거라고 딸에게 일침을 가했다. - p.39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남편을 닦달해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려 한 어머니와 그 채근에 지쳐 무기력하게 돈만 벌어오는 역할의 아버지였다. 못생긴 동생 도리스와 비교해 어머니의 후원을 듬뿍 받은 키티는 이기심과 허영심이 가득하게 자랐다. 동생의 결혼 들러리가 되기 싫어 자신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월터와 황급히 결혼해 조급함을 회피하긴 했지만, 허영심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그녀는 월터와의 결혼 생활에 금세 질렸다. 월터는 세균학자로, 사회적 명망이 거의 없는 직업이었고 게다가 내향적인 성격이라 키티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행동에도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찰스는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단숨에 사랑에 빠졌다. 키티에게 있어 남자의 위신은 곧 자신의 체면이었고, 결혼은 그것을 이룰 수단이었다. 월터는 그에 부합하지 못했고, 찰스는 딱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월터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가끔 그가 그녀를 사랑하도록 그녀가 허용하기만 한다면 어떤 모욕이라도 감내할 각오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찰스를 향해 느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쭐함이 전율처럼 그녀의 몸에 퍼지는 동시에 그렇게 굴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남자에 대한 희미한 혐오감 또한 솟아났다. - p.82

 

이기심에서 발로한 가치관은 모든 기준을 자신에게 맞추기 마련이다. 키티와 찰스의 불륜을 알게 된 월터는 그에 대한 대가로 그녀에게 메이탄푸로 같이 가기를 제안한다. 그곳은 콜레라로 인해 죽음이 만연한 도시였다. 키티가 당연히 거절하자 그는 한 가지 조건을 단다. 키티가 찰스의 이혼 서류를 가져오면 자신도 그녀와 이혼하고 메이탄푸에는 혼자 가겠다는 것이다. 자살 행위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키티는 찰스에게 급히 달려가 모든 사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배신감이었다. 키티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찰스는 이혼하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의 아내 도로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키티는 체념하고 월터와 메이탄푸로 떠난다. 그러면서도 찰스에 대한 애정은 접히지 않았다.

 

메이탄푸 도착 후

 

메이탄푸에서 키티는 해 뜨기 직전의 경관으로부터 경이로움을 경험하고, 처음으로 시체를 보고,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예컨대 세관원으로 있는 워딩턴과 가문을 뒤로하고 수녀가 되어 자발적으로 죽음의 땅에 온 수녀원장과 그녀를 따르는 수녀들, 역시 가문을 버리고 워딩턴에게 헌신하는 만주족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이 월터의 환자를 향한 헌신을 극찬하면서 키티의 가치관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키티는 모든 인류가 저 강물의 물방울들처럼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서로에게 너무나 가까우면서도 여전히 머나먼 타인처럼, 이름 없는 강줄기를 이루어, 그렇게 계속 흘러흘러, 바다로 가는구나. 모든 것이 덧없고 아무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 사소한 문제에 터무니없이 집착하고 그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인간이 너무나 딱했다. - p.205

 

경이로운 자연과 목격한 죽음 앞에서 그녀는 그들의 감정싸움이 덧없게 느껴졌다. 월터와 화해하고 싶었지만, 그가 받아들이리라고 생각이 들지 않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의 임신에 대해 월터가 자신의 아이냐고 물었을 때, 키티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지만 모르겠다고 말했다. 더 이상 자신의 이기심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월터에게 용서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를 이해했다. 그가 그녀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p.183) 월터가 콜레라로 인해 숨을 거두자 워딩턴과 수녀원장의 제안으로 메이탄푸를 떠난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녀가 깨달은 것은 남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때론 필요하지만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는 언제나 비열한 짓이라는 점이었다. - p.282

 

메이탄푸 떠난 후

 

과거는 끝났다. 죽은 자는 죽은 채로 묻어 두자. 너무 무정한 걸까?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동정심과 인간애를 배웠기를 바랐다. 어떤 미래가 그녀의 몫으로 준비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것이 닥쳐오든 밝고 낙천적인 기백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자신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 p.329

 

홍콩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키티는 찰스의 아내 도로시 타운센드를 만난다. 불편한 마음에 도로시의 호의를 거절하려 하지만, 그녀의 간곡한 요청에 마지못해 도로시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키티와 찰스는 재회한다. 그녀는 찰스를 멀리 대하려 하지만 그의 집요함에 또다시 굴복한 자신을 책망한다. 스스로를 돼지라고 하면서. 다음 날 키티는 홍콩을 떠날 채비를 하며 찰스에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다. 당신은 정말이지 허영 덩어리에다가 바보천치, 내 인생에 닥친 커다란 불운이에요.”(p.312) 영국으로 가는 도중 키티는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는다. 집에 도착해 바라본 죽은 어머니에게서 그녀는 깊은 애정은 느끼지 못하고 무가치한 것에 집착한 당신을 불쌍하게 여긴다. 자신에게 안겨 울음을 터뜨리는 동생을 못생겼다는 이유로 등한시한 과거를 미안해한다. 그리고 드디어 어머니에게서 해방된 아버지의 체념 어린 태도에서 가슴 시림을 느낀다. 그녀는 지방 법관으로 발령된 아버지와 동행하기를 희망한다.

 

그녀는 딸이 태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딸이 저지르지 않도록 키우고 싶어 한다. 그저 어떤 남자의 연인으로서의 여자가 아닌 스스로의 주인으로서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여인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키티는 과거를 묻고 희망과 용기로 나아가기를 결심한다. 그녀가 저지른 잘못과 어리석은 짓들과 그녀가 겪은 불행이 아마도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닐 것(p.329)이기 때문이다.

 

키티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자신이 가진 베일을 걸쳐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선은 사상이 될 수도, 편견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을 걷어내는 건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베일의 종류를 바꿀 수는 있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내면을 살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성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언제나 누구든 실수하고 잘못하고 오해할 수 있다. 여기서 반성하지 않는다면 과거는 다시 그렇게 행동하는 베일이 될 것이고, 반성한다면 그런 행동을 지양하는 베일이 생길 것이다. 아니, 적어도 나의 내면에 베일을 씌우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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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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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왜 살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딱 떨어지는 대답은 하지 못한다. 대신 자신 있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아직 방황 중입니다!”

  

2018722일부터 2019131일까지. 하루 16시간씩 게임에 빠져 지냈던 날들이다. 6개월 동안 책 한 글자 들여다보지 않았고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오롯이 게임만 했다. 중독끈(?)이 짧아 게임중독자였다고 고백하기엔 현역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인다. 그 언저리에서 빙빙 돌았다고 해야겠다. (그래도 당시 게임 내의 엔드 컨텐츠를 거의 다 이뤘다.)

  

어디선가 한심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삶을 왜 살았는가 하면 살아야 하는 목적은 모르겠고 살고는 싶었는데 그때 나를 살리는 것은 게임이었다.’ 굉장히 단순하고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그런 경험을 가지고 정유정 작가의 진이, 지니를 보니 아직 고민 중인 내 방황에 얼마간 길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주인공은 셋이다. 젊은 부랑자 김민주와 영장류 사육사 이진이, 그리고 보노보 지니. 진이는 화재가 난 불법 사육장에서 구조대를 치고 도망간 지니를 구한다 돌아가던 길에 사고를 당하고 지니의 몸에 진이의 영혼이 들어간다. 사고 현장 근처 산골짜기 정자에서 노숙하던 민주와 우연히 맞닥뜨리면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사흘간의 여정을 그린다.

 

각자 삶에 대한 방식: 민주

  

나는 그따위로 살지 않았다. 시험에 떨어졌다는 건 결과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근거는 아니었다. 빈둥대는 걸로 보여도 묵묵히 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뭘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할 일의 대부분을 차지하긴 했지만. - p.37

 

민주는 자신의 의지대로 성장하지 않았다. 초중학교는 교육청에서, 고등학교는 중학교 성적이, 대학은 수능성적이 일러주는 곳으로 다녔다. 대학 졸업 후에는 아버지가 원한 언론사, 어머니가 바란 대기업, 차선책이라던 공기업까지 다 떨어지고 공무원 시험마저 3년째 낙방했다. 아버지에게서 개자식이나 간장 종지라는 말을 들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어도 애물단지 취급을 받은 민주는 나아갈 방향을 잃었다. 참다못한 가족이 그에게 집에서 나가주길 요구했다. 집을 떠나 고시텔 생활을 하다가 그마저도 방세를 낼 수 없게 되자 부랑자 생활을 하던 끝에 무곡으로 향했다. 무곡의 망아산을 올라 도착한 영장류센터에서 민주는 이진이를 처음 본다. 그녀에 대한 첫느낌은 다정한 그녀였다. 이 감정이 남아 보노보에 빙의된 진이를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비록 처음에는 돈을 요구했지만). 살고는 싶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민주에게 진이는 목적을 제공해주었다.

 

고른 물건들을 쟁반에 담고 카운터로 향하자 간장 종지가 재잘대기 시작했다. 괜한 일로 신세 망치지 마.

안다. 멈춰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일단 시작하면 돌이키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비루하나마 사회적 궤도 안을 맴돌던 내 삶이 완전히 전복되리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 끈질기게 울리는 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동어반복적이고, 자기증폭적인 소리였다.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야. - p.271

 

각자 삶에 대한 방식: 진이

 

모퉁이를 하나 돌면 지금보다 나은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나는 철석같이 믿었다. 그 믿음은 내 삶을 지탱해온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금 가장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바로 신앙을 버리는 짓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자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 p.303

  

진이는 앞만 보고 살아왔다. 삶이란 길이 여러 모퉁이를 꺾어야 한다면, 그녀는 모퉁이 너머를 미리 추측하지 않았다. 낙관적인 결론이 있으리라 여기며 굳건히 걸었다. 빚을 남기고 죽은 아버지 대신 홀로 진이를 강하게 키운 어머니가 가르친 방식이었다.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 전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살아 있는 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 p.293

 

그래서 죽음에 가까운 사고를 겪으면서도 그녀는 지니 안에 있으면서도 살기 위해 바둥거렸다. 민주에게 무리하면서까지 자신의 본체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한 이유였다. 하지만 지니의 기억을 훑으며, 그것도 자신이 킨샤사에서 못 본 척 도망친 밀렵된 보노보가 지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죽어가는 자신이 살아 있는 지니의 삶에 침범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침입자 주제에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간절한 것에 대해서.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진이는 지니에게 삶을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각자 삶에 대한 방식: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언젠가 죽는다라는 명제 빼곤 정해져 있는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마저도 정확한 시일을 모르니 아주 확실한 미래도 아니다. 이런 태도가 예전에는 이상한 사상을 심어주었다. ‘어차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대충 살아야지’,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을 노려보자같은 중2병 사상. 부끄럽게도 게임 열심히 하던 시기까지 가지고 있었다.

  

게임 시간을 독서 시간으로 치환하면서부터는 운명을 믿지 않는 태도는 같으나 다른 사상이 심겼다. ‘정해진 것은 없으니 내가 꾸릴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이루었고, 지금의 선택이 나중의 나를 만든다.’ 방황하고 있어도 건강한 삶을 지낸다는 자부심이 있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린 게 어딘가 싶기도 하고.

  

정유정 작가는 진이, 지니를 통해 나에게 일단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위로해주었다. 민주가 박탈감과 무기력을 겪었으면서도 살아 있었기에 진이와 지니를 만났던 것처럼, 진이가 지니를 통해 생명을 유지했기에 죽음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삶의 의미를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의 답을 구가하는 만큼이나 어렵다. 하지만 방향은 확실하다. 살아야 한다. 살아 있어야 한다. 사춘기 때의 혼란도, 대학 시절에 겪은 우울증도, 몇 달 전까지의 게임 중독도 지금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요즘 나의 방황도 살아 있다면 인생의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다른 생각 하나

  

개인적으로 사는 것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것살아내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것’. 뭐가 낫고 뭐가 별로의 문제는 아니다. 각자의 지향점이 아닐까.

  

살아가는 것은 세상 흐름에 삶을 맡긴다. 위험이나 두려움에 얽히지 않고 무난함이 목적이다. 보통 평범하게, 라고 말하는 그것. 하지만 발전만큼 어려운 게 유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쉽지 않은 인생이다. ‘살아내는 것은 극복하는 삶이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의 반대를 극복하고, 기존을 극복한다. 창발성이 필요한 태도라 역시 쉽지 않다. 나는 사실 이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현재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선을 넘어가기 위해 나름의 고군분투를 하고 있다. 이 역시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살아 있는 게 뭐가 어려워?’하겠지만, 그래, 일부한테는 쉬울 수 있겠다. 하지만 민주 같은 입장이라면, 우울증을 겪고 있다면, 나처럼 방황하고 있다면? 지니의 삶을 진이가 훔칠 수 없는 것처럼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폄하하면 안 된다. 그에게 그 삶이 최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든 걸 용인하며 살 수는 없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에야.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폄하하는 부류는 욕먹어도 싸다. 반성하지 않는 무례함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정유정하면 서스펜스 스릴러의 몰입도와 문장력이 대표적이다. 그녀의 전작들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이 그랬다(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는 아직 안 읽어봐서 모르겠다). 이번 소설은 다른 장르다. 띠지에도 나왔듯이 따스하고, 다정하고, 뭉클한내용이다. 그래서 방심했다. 만약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정유정 작가가 감동물이라고? 서스펜스와 스릴은 느낄 수 없겠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 당장 갖다 버려도 좋다. 그녀의 문장력은 이미 장르를 초월했으니까.

  

지승호 작가와 정유정 작가의 인터뷰집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까지 읽고 나면 그녀의 작품에 대해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 동시에 이런 필력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진이, 지니독서는 정유정 작가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P.S 한기준이 나와서 반가웠다. 28을 읽으면 한기준의 태도가 확 이해가 간다. 그러니 그녀의 작품은 전부 읽자.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은 조만간 읽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나는 그따위로 살지 않았다. 시험에 떨어졌다는 건 결과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근거는 아니었다. 빈둥대는 걸로 보여도 묵묵히 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뭘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할 일의 대부분을 차지하긴 했지만. - p.37 - P37

고른 물건들을 쟁반에 담고 카운터로 향하자 간장 종지가 재잘대기 시작했다. 괜한 일로 신세 망치지 마.

안다. 멈춰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일단 시작하면 돌이키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비루하나마 사회적 궤도 안을 맴돌던 내 삶이 완전히 전복되리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 끈질기게 울리는 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동어반복적이고, 자기증폭적인 소리였다.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야. - p.271
- P271

모퉁이를 하나 돌면 지금보다 나은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나는 철석같이 믿었다. 그 믿음은 내 삶을 지탱해온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금 가장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바로 신앙을 버리는 짓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자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 p.303 - P303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 전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살아 있는 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 p.293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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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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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대소설의 시대11장을 읽고 난 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내가 뱉고 내가 놀라 책에 기록해 두었다. 김탁환 작가의 존재만 알았지, 이전의 책은 읽어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유명할수록 읽어야 하지만, 오히려 유명세 때문에 읽지 않고도 읽은 느낌을 받았다. , 죄송합니다. 변명입니다. 아무튼 처음 읽은 김탁환 작가의 소설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더 재밌게 읽었는지 모른다.

 

제목만 봤을 때는 소설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느낌을 받았다. 백탑파 시리즈를 모르니 그럴 수밖에……. 다 읽은 지금, 이 느낌이 크게 엇나가진 않았다. 정조대왕 때를 배경으로 산해인연록이라는 대소설에 얽힌 사건을 의금부 도사 이명방의 시점으로 풀어가는 내용이다.

  

이명방과 규장각 서리 김진은 대작가 임두를 찾아간다. 임두를 후원하는 혜경궁과 의빈의 요구 때문이었다. 산해인연록199권에서 다섯 달째 진전이 없으니 원인을 알아오라고 했다. 임두를 만난 둘은 작가의 잃어버린 수첩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장소를 추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진은 소설의 진전 없음이 꼭 수첩 때문만은 아니라고 여겼다. 임두가 매병(치매)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정황을 확실히 하려고 하는 와중에 대작가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것도 200권의 절반만 집필한 채. 이대로 미완 되면 안 된다는 의빈의 말에 김진은 임두의 두 제자, 수문과 경문에게 기회를 주자고 제안했다. 옆에서 보고 배웠으니 내용도 꿰고 있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다. 제자들은 15일 동안 궁궐에서 두문불출하며 집필에 매진했다. 그러나 실력은 엉망진창. 실망한 의빈에게 김진은 한 번의 기회로는 아쉬우니 다시 기회를 요청했다. 그렇게 얻어낸 한 달을 얻어 둘에게 제안하자, 수문과 경문은 기겁했다. 사흘만 쉬게 해달라고. 김진은 단칼에 잘라낸 후 결정을 위한 하루 말미를 주었다. 그의 의도는 두 제자의 감시였다. 이미 둘 중 하나가 임두의 행방을 아는 범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명방에게는 경문을, 야뇌 백동수에게는 수문을 미행하도록 부탁했다. 미행의 결과로 규장각 서리 화광 김진은 산해인연록사건을 풀어낸다.

  

김탁환의 백탑파 시리즈는 조선 후기 버전의 셜록 홈즈다. 추리 장르의 요소를 갖기에 줄거리를 다 풀어낼 수 없다. 읽는 재미를 망칠 순 없지. 저 줄거리마저 스포라면……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임두에 대해

 

조선 후기는 전기에 비해 신분의식이 약해지고 있었다. 특히 정조 때에는 서얼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기에 파격적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그래도 조선은 조선이다. 유교의 국가였고 남성 중심 사회였다. 당연히 여성에 대한 선입관이 만연했을 터이다. 그 와중에 작중 인기 넘치는 대소설 산해인연록23년간 지은 대작가 임두는 여자이다. 여자 이름 치고 임두는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나 역시 이명방처럼 당연히남자겠거니 했다. 디귿 발음이 주는 닫힌 느낌 때문에. 나의 편견은 여자의 이름은 부드러워야 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임두의 집필실을 둘러보던 이명방이 작가를 보고 놀란 마음을 김진에게 털어놓을 때 공감이 되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김진의 말에 곧바로 수긍했다.

  

선입견을 주기 싫어서였네. 소설의 기준이 중요하지, 소설가가 서생인가 노파인가를 먼저 알 필욘 없어. 자네가 계속 산해인연록은 연경에 다녀온 서생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기에, 직접 임 작가님을 만나 보기 전까진 말을 아꼈다네. 원한다면 집필에 여념이 없는 여인들을 이제부터라도 소개해 주지.” - 1p.43

  

임두 역시 여자임을 안 밝혔던 것은 아니다. 밝혔던 적이 있으나 맹비난을 받았던 기억이 있기에, 인생의 역작 산해인연록만큼은 그런 대우를 받게 하기 싫어 남자 같은 필명을 사용한 것이다. 이 말을 들으니 작고하신 박경리 선생에 대해 김영하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알쓸신잡 통영편에서 한 이야기였는데, ‘여류작가라는 칭호는 멸칭(蔑稱)이다. 작가에 남녀노소가 있을 리 없건만 사회적 통념은 작가를 남성의 전유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박경리 선생은 여류작가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하셨다고. 작가뿐일까. 직업에서의 성()은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추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남자의 세상, 여자의 세상이 아니라 인간의 세상이다. 인본주의적 관점을 벗어나지 않도록 내 자신을 경계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래야 덜 나쁜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임두라는 이름을 보고 남자라고 생각했던 편견에 대해 임두는 한마디 한다.

 

이름을 놓고 소설 찾지 말고, 소설 읽은 뒤 이름을 가늠해 봐. 이름은 한낱 허깨비니까.” - 1p.127

 

비평하는 사람 중에는 소설과 작가는 떼려야 뗄 수 없다고도 하고, 사회와도 연결되어있다고도 하고, 소설 그 자체만으로 판단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문학은 문학으로써 먼저 즐기면 좋겠다는 쪽이다. 판단은 임두의 말대로 소설 읽은 뒤에 하면 된다. 왜냐, 읽고 나면 분명 무슨 느낌이나 여운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작가 때문인지, 사회 때문인지, 소설 속 사건 때문인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문학을 읽는 매력이지 않을까.

 

※조선의 여인들

  

참담한 심정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지. 모름지기 소설은 한가한 나날의 심심풀이지만, 뜻밖에도 슬픔을 견디는 버팀목이 되기도 하니까. 이야기를 주고받을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가장 끔찍한 선택은 피하는 법이지.” - 1p.82

 

자궁(慈宮, 혜경궁)은 자신의 필사 궁녀였다가 후궁으로 올라온 의빈을 통해 임두를 후원했다. 산해인연록의 창화 공주를 죽이지 말 것이라는 하나의 조건을 걸고.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이다. 남편을 잃은 심정과 아들의 위태로운 목숨에 대한 걱정을 달래기 위해서 그런 조건을 내건 듯했다. 조선의 여인상은 정숙하고 정절을 지키는 게 최고의 덕이었다. 궁에서 생활하며 왕의 어머니는 오죽했을까. 심정을 대놓고 토로할 상황도 위치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를 위로할 방책은 소설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짧은 소설이 아니라 기나긴 슬픔을 달랠 만큼의 길이인 대소설 말이다.

  

“() 이 나라 이 동네 이 가문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매순간 주어진 예법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각종 차이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여인들을 담고 있는 소설 또한 소중하다네. 크고 강하다고 멋지고 작고 약하다고 시시한 게 아니란 걸세.()” - 1p.46

  

꽉 막힌 예법에 숨통을 틔워주는 소설들은 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자신을 소설 속 주인공의 삶과 죽음에 이입하면서 잠시나마 해방을 느낀다. 그렇게 삶이 이어진다.

  

끝이라 체념한 순간, 이어지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인생 하나는 소설. 소설이 끝나도, 그 소설을 쓴 작가와 그 소설을 읽은 독자의 인생은 이어진다. 그리고 가끔은 소설이 끝난 뒤 새로운 소설이 이어지기도 한다. - 2p.157

  

대소설의 시대는 각 장()을 차지한 대소설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대소설을 빼면 싱거워진다. 아니,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대소설이 많이 읽힌 시대이기도 하고 대소설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목이 대소설의 시대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소설을 이야기하는 소설인 만큼, 소설을 대하는 자세를 새로 다질 수 있었다. 나에게 소설은 어떤 의미일지, 어떤 위로를 주는지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신난다거나 환호성을 지르는 것 말고, 슬픔은 슬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느끼는 게 진정으로 즐기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내 독서 이력에도 대소설의 시대가 꽃피길 다독이며 이명방이 의빈에게 한 말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읽기 전엔 모르는 것, 그게 바로 소설이 아니옵니까?” - 1p.68

 

P.S 1권의 몇 군데 오류가 있었다.

p. 64, 김진이 김진을 소개한다. ???
p.183, 박제가가 이명방(청전)에게 김진(화광)의 호를 부른다. ???

p. 257, 수문이 김진에게 산해인연록이어쓰기 면접을 보는데 자신과 수문을 언급한다. ???

p.188, 호환(虎患)을 호한이라 오타난 것은 그냥 넘어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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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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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점: 4/5

평 점: 4/5

구매/대여처: 교보문고 구매(오프라인)

  

517일에 있을 도서관 독서회의 2번째 책이다. 아직 편독 습관을 버리지 못한 나는 대부분 비문학 위주로 읽고 문학은 세계문학을 조금씩 읽는다. 우리나라 문학은 읽기가 힘들다. 전해지는 정서가 불편하다고 할까, 답답하다고 할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뉴스만 보면 쓸데없이 분기탱천하던 대학생 시절에 생긴 버릇이 편견을 만들어 놓은 듯하다. 시작부터 자아성찰한 이유는 경애의 마음을 읽을 때 불편한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공감도 많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딘 속도로 밑줄 그어가며 읽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매우 오랫동안 전해진 문구라 때로는 감흥이 안 생긴다. 하지만 돈의 지혜서평에도 썼듯이 인간의 마음은 홀씨와 같아서, 어느 때는 격하게 끄덕거리며 수긍한다. 관계에서 오만 감정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관계에서 상처받기도 하고 위로받기도 한다. 상처도 위로도 받을 관계가 없을 때는 세상이라는 것에 책임을 물리거나 내면의 자아에게 잘못을 탓한다. 어느 면으로 보든 관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관계를 대함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기질과 성격, 성향이다. 기질은 날 때부터 가진 성질, 성격은 환경을 대하는 태도, 성향은 살아가는데 가지는 취향으로 나는 해석하고 있다. 진로를 정할 때 이런 요소를 잘 고려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 좋은 말이다. 내 행복을 위해서는 응당 그래야지. 그러나 쉬운 말은 아니다. 괜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야. 맞춰 살아야지.” 같은 말을 할까. 상수와 경애 역시 마찬가지다.

  

상수는 초식동물 같은 남자다. 섬세하고 예민하며 폭력적인 것들을 싫어한다. 정치 활동으로 강자의 반열에 올랐던 아버지와 학우를 이틀 동안 옥상에 묶어 방치하는 폭력을 행사하고도 당당한 형을 보며 상수의 성격은 이들과 반대이기를 바란다. 아버지의 육식이 너무 강한 욕망 때문이었다면 형은 꿈도 목표도 소중한 것도 없었기에 파괴적으로 생긴 육식이었다. 상수는 그런 형을 생각하며 이렇게 적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 )이 되고 만다라고. 마침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이 되고 만다라고 문장을 완성했다. 상수는 아무것이 되지 않기 위해 움직이지만,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초식동물이 그렇듯이,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고등학생 친구 은총의 죽음, ‘언니는 죄가 없다(언죄다)’ 페이지의 해킹, 호찌민 지사 비리의 당연함. 상수와 세상은 맞물리지 않은 채로 돌아가는 톱니바퀴다.

  

경애는 사냥 능력을 잃은 육식동물처럼 살아간다. 그녀는 자신과 모종의 관계를 형성했던 사람들과 헤어지면서 의욕을 잠재운다. 영화 동호회 또래 친구 E를 죽인 화재는 경애의 학창시절을 잠재웠다.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산주의 갑작스러운 결혼 통보는 경애의 일상을 잠재웠다. 파업할 때는 성희롱을 노조 위원에 고발했지만, 대열을 분열시킨다며 오히려 회사의 프락치로 몰렸다. 결국 경애는 수긍하며 책잡히지 않기 위해 그냥 있는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육식 성향은 어딜 가지 않았다. 눈치 안 보고 행동하며 필요한 말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했다. 덕분에 회사 내의 평가도 좋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상수가 팀원을 내달라고 부장에게 요청했고 상수와 경애는 한팀으로 만난다.

  

아무것이 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초식동물과 사냥을 포기한 육식동물의 조합은 어떠할까. 상수는 경애를 이끌고 싶지만, 경애는 딱딱하게 대답할 뿐이다. 경애가 산주와 헤어졌을 때 언죄다 페이지에 편지를 쓴 적이 있는데, 경애의 회사 아이디와 편지의 아이디가 같음을 알아챈 상수는 더욱 경애에게 마음을 쓰고 싶었다. 경애는 모르는 상태지만. 그러다 둘의 관계가 확장되는 계기를 맞이한다. 영업실적이 안 나오는 상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고위 간부들이 호찌민으로 발령을 냈다. 자르고는 싶지만 상수의 아버지 영향력을 고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경애에게는 가느냐 안 가느냐 선택지 중에서 가는 쪽을 골랐다.

  

호찌민에서 팀으로 일하는 동안 둘은 활동의 시간과 대화가 늘어났다. 그러던 와중에 상수는 언죄다 페이지 해킹 사건으로 회원들의 분노와 경애 편지 유출에 대한 미안함으로 지쳤고, 상수의 은총과 경애의 E가 같은 인물임을 알게 되면서 둘의 유대감은 깊어졌다. 경애는 그런 상수를 도우면서 육식의 본능을 되찾아갔다. 호찌민 지사의 비리를 겨냥한 경애의 발언으로, 경애는 시흥 창고로 재발령된다. 그곳에서 자신을 구하려면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휴가를 낸 뒤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상수 역시 경애를 생각해 언죄다 사건을 피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호찌민 지사 비리 건을 사장에게 가져가는 것까지도. 상수가 회사를 그만뒀어도 은총이 남긴 영화 마음을 통해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사람과 사람이 만드는 관계는 피할 수 없다. 좋게 작용하든 나쁘게 작용하든 언제나 관계 속에서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관계의 상태가 바뀐다. 경애는 친구 E의 죽음에서, 산주와 이별에서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쉽게 잊지 못하고, 회복될 것처럼 마음이 움직일 때면 더욱 웅크렸다. 나는 이런 관계의 상처는 아니지만, 대학 시절 내 진로에 대해 방황하면서 경애처럼 마음을 웅크렸던 기억이 있다. 한 학기 동안 학교를 가지 않았다. 정신건강의학과를 가보진 않아서 우울증이라고 단정은 짓지는 못하지만, 무기력하고 세상 모든 게 싫었다. 그냥 하루 종일 게임만 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간혹 ,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라거나 그래도 학교는 가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고개를 내밀면 뭔지 모를 두려움이 확 밀려오면서 그런 생각을 지웠다. 회복하게 된 계기는 경애에게 경애의 엄마가 불쑥 찾아왔던 것처럼 내 어머니께서 어느 날 불쑥 찾아와 오랜 대화를 한 덕분이었다. 나는 펑펑 울었고, 대학을 졸업하긴 했다.

  

우리는 관계에서 상처받고 관계로부터 위로받는다. 상수가 은총에게, 경애가 E에게, 경애가 언니(상수)에게, 상수가 경애에게 위로받았듯이. 그렇기에 경애의 마음은 경애 한 사람만의 마음이 아니다. 상수의 마음, 은총의 마음, 언죄다 회원들의 마음……. 둘을 위로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모든 관계는 우연으로 시작한다. 인연은 우연으로 시작해 필연으로 가는 과정이다. 우연이 쌓이고 쌓이면 우리가 필연이라고 믿을 만한 사건들이 태어난다. 필연이 단단해지면 우리는 아무것이 아닌 존재가 된다. 최소한 누군가에게는 소중해진다. 여기서 나는 상수의 문장을 비틀어 제목을 지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라고. ‘아무것’, ‘아무것도 아닌 것’. 이 둘 중 어떤 것도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연의 산물들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가족, 친구, 직장동료, 반려동물 등. 그러면 우리는 그들을 위해 뭐라도 하게될 것이다.

  

P.S 우연이 너무 잘 맞아떨어지면 의심이 가기 마련이다. 평점 1점의 부족은 내 의심에서 비롯했다.

 

상수가 말이 빠르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단어를 씹거나 더듬으며 스윙의 리듬을 탔다면,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듣긴 했는데요, 생각해봐야겠는데요, 라고 하는 경애의 말은 정박에 가까웠다. 그 둘이 섞여들면 과연 혼돈의 재즈가 되어 뭔가 독특한 리듬이 흘러나올지도 몰랐다. p.49 - P49

전혀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안녕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행운이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p.62 - P62

사람이 어떤 시기를 통과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했다. 그때도 ‘나아간다’라는 느낌이 가능했던가. ‘견뎌낸다’라는 느낌만 있지 않았나.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듯 기척을 내니까. p.268 - P268

하지만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오늘만 견디는 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수는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고 오늘이 있으면 당연히 내일이 있고 내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해결이 되든 되지 않든 마음을 쓰다가 하루를 닫는 사람이고 싶었다. p.330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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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펭귄클래식 24
가스통 르루 지음, 홍성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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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뮤지컬, 영화, 소설 그 어떤 장르도 접하지 않고 흘려 넘겼다. 매우 유명해서 얼추 들은 줄거리로 내용을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지냈다. 그러나 오래전 명성만으로 샀던 책이 눈에 들어와, 아는 척하더라도 읽고 아는 척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오페라 극장의 지하에 사는 기인이 한 여배우를 사랑해서 벌이는 기묘한 이야기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읽고 나니 오페라의 유령 '에릭'이 안타까웠다. 인간이 악해지기 위해선 편견과 시기, 두 단어만 있으면 될 듯싶다.

 

  줄거리는 앞에서 적은 것처럼 오페라 극장의 지하에 사는 기인 '에릭'이 여배우 '크리스틴 다에'를 사랑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단순히 사랑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고 에릭의 억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에릭의 과거를 안다면 에릭에 대한 감정이 다소 변할 것이다. 작곡, 건설, 함정, 노래 등등 다방면으로 능력이 출중한 에릭의 외모는 추했고, 부모는 에릭을 외면했다. 오히려 에릭의 외모가 받는 멸시를 통해 돈을 벌기도 했으니(추한 외모로 노래를 부르는 에릭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살아 있는 시체'라고 소개해 돈을 벌었다) 에릭의 마음 상태가 어떠했을까.

 

  그나마 에릭에 대한 소문이 페르시아 왕성에 퍼져 성 안으로 들어갔으나, 후에 출중한 능력으로 함정 가득한 비밀 궁전을 만든 에릭이 다른 왕에게 능력을 사용할까 걱정된 페르시아 왕은 에릭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불쌍하게 여긴 페르시아 인이 에릭을 구해준다. 페르시아에서 도망친 에릭은 터키로 가지만 같은 꼴을 또 당하고, 마지막으로 파리의 오페라 극장 지하에 살면서 여러가지 일을 꾸민 것이다.

 

  살인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고, 무엇이 착한 일이고 무엇이 나쁜 일인지에 대한 감각이 없는 에릭이지만, 크리스틴 다에가 진심으로 에릭을 동정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장면에서 에릭의 순수함을 찾을 수 있었다. 성장기 동안 멸시과 편견, 시기가 아니라 사랑으로 보듬어졌다면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전에 읽은 『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도 그렇고 1세기 전에 쓰여진 이 책도 그렇고, 편견에 대한 격강심을 다시금 내 가슴속에 새겨준다. 세잎클로버의 세상에서 네잎클로버란 유전 형성이 잘못되어 태어난 존재다. 하지만 우린 나폴레옹의 일화만 가지고 '행운'이라 여기고 있지 않은가. 여러 불편한 요인을 가졌지만 성공한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선례로 삼아 편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행운' 같은 존재라고 생각을 전환한다면 어떨까 싶다. 내 자신 귀한 줄 알면 다른 사람도 귀한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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