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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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대소설의 시대11장을 읽고 난 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내가 뱉고 내가 놀라 책에 기록해 두었다. 김탁환 작가의 존재만 알았지, 이전의 책은 읽어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유명할수록 읽어야 하지만, 오히려 유명세 때문에 읽지 않고도 읽은 느낌을 받았다. , 죄송합니다. 변명입니다. 아무튼 처음 읽은 김탁환 작가의 소설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더 재밌게 읽었는지 모른다.

 

제목만 봤을 때는 소설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느낌을 받았다. 백탑파 시리즈를 모르니 그럴 수밖에……. 다 읽은 지금, 이 느낌이 크게 엇나가진 않았다. 정조대왕 때를 배경으로 산해인연록이라는 대소설에 얽힌 사건을 의금부 도사 이명방의 시점으로 풀어가는 내용이다.

  

이명방과 규장각 서리 김진은 대작가 임두를 찾아간다. 임두를 후원하는 혜경궁과 의빈의 요구 때문이었다. 산해인연록199권에서 다섯 달째 진전이 없으니 원인을 알아오라고 했다. 임두를 만난 둘은 작가의 잃어버린 수첩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장소를 추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진은 소설의 진전 없음이 꼭 수첩 때문만은 아니라고 여겼다. 임두가 매병(치매)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정황을 확실히 하려고 하는 와중에 대작가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것도 200권의 절반만 집필한 채. 이대로 미완 되면 안 된다는 의빈의 말에 김진은 임두의 두 제자, 수문과 경문에게 기회를 주자고 제안했다. 옆에서 보고 배웠으니 내용도 꿰고 있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다. 제자들은 15일 동안 궁궐에서 두문불출하며 집필에 매진했다. 그러나 실력은 엉망진창. 실망한 의빈에게 김진은 한 번의 기회로는 아쉬우니 다시 기회를 요청했다. 그렇게 얻어낸 한 달을 얻어 둘에게 제안하자, 수문과 경문은 기겁했다. 사흘만 쉬게 해달라고. 김진은 단칼에 잘라낸 후 결정을 위한 하루 말미를 주었다. 그의 의도는 두 제자의 감시였다. 이미 둘 중 하나가 임두의 행방을 아는 범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명방에게는 경문을, 야뇌 백동수에게는 수문을 미행하도록 부탁했다. 미행의 결과로 규장각 서리 화광 김진은 산해인연록사건을 풀어낸다.

  

김탁환의 백탑파 시리즈는 조선 후기 버전의 셜록 홈즈다. 추리 장르의 요소를 갖기에 줄거리를 다 풀어낼 수 없다. 읽는 재미를 망칠 순 없지. 저 줄거리마저 스포라면……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임두에 대해

 

조선 후기는 전기에 비해 신분의식이 약해지고 있었다. 특히 정조 때에는 서얼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기에 파격적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그래도 조선은 조선이다. 유교의 국가였고 남성 중심 사회였다. 당연히 여성에 대한 선입관이 만연했을 터이다. 그 와중에 작중 인기 넘치는 대소설 산해인연록23년간 지은 대작가 임두는 여자이다. 여자 이름 치고 임두는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나 역시 이명방처럼 당연히남자겠거니 했다. 디귿 발음이 주는 닫힌 느낌 때문에. 나의 편견은 여자의 이름은 부드러워야 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임두의 집필실을 둘러보던 이명방이 작가를 보고 놀란 마음을 김진에게 털어놓을 때 공감이 되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김진의 말에 곧바로 수긍했다.

  

선입견을 주기 싫어서였네. 소설의 기준이 중요하지, 소설가가 서생인가 노파인가를 먼저 알 필욘 없어. 자네가 계속 산해인연록은 연경에 다녀온 서생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기에, 직접 임 작가님을 만나 보기 전까진 말을 아꼈다네. 원한다면 집필에 여념이 없는 여인들을 이제부터라도 소개해 주지.” - 1p.43

  

임두 역시 여자임을 안 밝혔던 것은 아니다. 밝혔던 적이 있으나 맹비난을 받았던 기억이 있기에, 인생의 역작 산해인연록만큼은 그런 대우를 받게 하기 싫어 남자 같은 필명을 사용한 것이다. 이 말을 들으니 작고하신 박경리 선생에 대해 김영하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알쓸신잡 통영편에서 한 이야기였는데, ‘여류작가라는 칭호는 멸칭(蔑稱)이다. 작가에 남녀노소가 있을 리 없건만 사회적 통념은 작가를 남성의 전유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박경리 선생은 여류작가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하셨다고. 작가뿐일까. 직업에서의 성()은 경계가 허물어져 가는 추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남자의 세상, 여자의 세상이 아니라 인간의 세상이다. 인본주의적 관점을 벗어나지 않도록 내 자신을 경계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래야 덜 나쁜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임두라는 이름을 보고 남자라고 생각했던 편견에 대해 임두는 한마디 한다.

 

이름을 놓고 소설 찾지 말고, 소설 읽은 뒤 이름을 가늠해 봐. 이름은 한낱 허깨비니까.” - 1p.127

 

비평하는 사람 중에는 소설과 작가는 떼려야 뗄 수 없다고도 하고, 사회와도 연결되어있다고도 하고, 소설 그 자체만으로 판단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문학은 문학으로써 먼저 즐기면 좋겠다는 쪽이다. 판단은 임두의 말대로 소설 읽은 뒤에 하면 된다. 왜냐, 읽고 나면 분명 무슨 느낌이나 여운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작가 때문인지, 사회 때문인지, 소설 속 사건 때문인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문학을 읽는 매력이지 않을까.

 

※조선의 여인들

  

참담한 심정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지. 모름지기 소설은 한가한 나날의 심심풀이지만, 뜻밖에도 슬픔을 견디는 버팀목이 되기도 하니까. 이야기를 주고받을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가장 끔찍한 선택은 피하는 법이지.” - 1p.82

 

자궁(慈宮, 혜경궁)은 자신의 필사 궁녀였다가 후궁으로 올라온 의빈을 통해 임두를 후원했다. 산해인연록의 창화 공주를 죽이지 말 것이라는 하나의 조건을 걸고.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이다. 남편을 잃은 심정과 아들의 위태로운 목숨에 대한 걱정을 달래기 위해서 그런 조건을 내건 듯했다. 조선의 여인상은 정숙하고 정절을 지키는 게 최고의 덕이었다. 궁에서 생활하며 왕의 어머니는 오죽했을까. 심정을 대놓고 토로할 상황도 위치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를 위로할 방책은 소설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짧은 소설이 아니라 기나긴 슬픔을 달랠 만큼의 길이인 대소설 말이다.

  

“() 이 나라 이 동네 이 가문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매순간 주어진 예법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각종 차이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여인들을 담고 있는 소설 또한 소중하다네. 크고 강하다고 멋지고 작고 약하다고 시시한 게 아니란 걸세.()” - 1p.46

  

꽉 막힌 예법에 숨통을 틔워주는 소설들은 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자신을 소설 속 주인공의 삶과 죽음에 이입하면서 잠시나마 해방을 느낀다. 그렇게 삶이 이어진다.

  

끝이라 체념한 순간, 이어지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인생 하나는 소설. 소설이 끝나도, 그 소설을 쓴 작가와 그 소설을 읽은 독자의 인생은 이어진다. 그리고 가끔은 소설이 끝난 뒤 새로운 소설이 이어지기도 한다. - 2p.157

  

대소설의 시대는 각 장()을 차지한 대소설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대소설을 빼면 싱거워진다. 아니,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대소설이 많이 읽힌 시대이기도 하고 대소설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목이 대소설의 시대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소설을 이야기하는 소설인 만큼, 소설을 대하는 자세를 새로 다질 수 있었다. 나에게 소설은 어떤 의미일지, 어떤 위로를 주는지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신난다거나 환호성을 지르는 것 말고, 슬픔은 슬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느끼는 게 진정으로 즐기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내 독서 이력에도 대소설의 시대가 꽃피길 다독이며 이명방이 의빈에게 한 말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읽기 전엔 모르는 것, 그게 바로 소설이 아니옵니까?” - 1p.68

 

P.S 1권의 몇 군데 오류가 있었다.

p. 64, 김진이 김진을 소개한다. ???
p.183, 박제가가 이명방(청전)에게 김진(화광)의 호를 부른다. ???

p. 257, 수문이 김진에게 산해인연록이어쓰기 면접을 보는데 자신과 수문을 언급한다. ???

p.188, 호환(虎患)을 호한이라 오타난 것은 그냥 넘어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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