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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신화 수업 365 1일 1페이지 시리즈
김원익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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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씁쓸하다. 과거, 문학도를 꿈꾸던 시절, 신화는 거의 보고였다. 소설, 시, 비평 등등 작업을 하거나 과제를 할 때 유용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없으면 신화를 뒤적거려 모티프로 삼았다. 거기에 재미는 덤으로 따라오니 읽는 재미, 공부하는 재미가 있었다.


  당시에는 지적 욕심도 넘쳐서 이것저것 찾아 봤다. 게임도 좋아해서, 신화를 소재로 한 게임을 만나면 해당 신화 책을 빌리거나 사서 읽기도 했다. 그래도 가장 좋아하고 즐겼던 신화는 ‘그리스 신화’였다.


  그런 향수에 젖어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신화 수업 365』(이하 『신화 수업 365』)를 집어 들었으나, 마음처럼 읽지 못했다. 여러 개인적인 일이 있었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재미가 없었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독서를 안 하거나, 할 시간이 없거나,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1일 1쪽이라는 낮은 목표로 쉬운 접근을 유도하고 있다. 또한, 같은 이야기가 늘어지면 지루해질 것을 대비해 요일마다 다른 주제로 다른 이야기를 풀어낸다.


  월요일은 세계의 신들, 화요일은 영웅의 모험, 수요일은 탐욕과 전쟁, 목요일은 사랑과 질투, 금요일은 오만과 분노, 토요일은 신화와 예술, 일요일은 일상의 신화. 이렇게 7가지의 주제를 요일마다 번갈아가며 해당하는 신화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 편으로 안 끝나는 이야기의 경우, 주간 시리즈로 이어진다. 예를 들면, 「페르세우스의 모험」은 총 7편이어서 7주에 걸쳐 매주 화요일마다 읽을 수 있다. 주간 연재라고나 할까.


  음, 내가 이 책에서 기대하는 독자 유형이 아니기 때문일까? 이런 방식이 나에게는 안 맞았다. 단편의 경우 상관없었지만, 연속된 이야기의 흐름이 자꾸 끊기니 매우 거슬렸다. 처음에는 의도에 맞춰 1일 1페이지로 읽었는데, 지난 주에 뭔 내용이었는지 까먹는 경우가 있어, 이후에는 그냥 쭉 이어서 읽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불편함이 내 인내심을 지나치니 재미가 급감해 빨리 읽고 치워버리자는 의도였다.


  내용의 대부분이 ‘그리스 신화’였던 것도 재미 감소에 한 몫했다. 이건 과거에 해당 신화를 자주 접했던 것이 독이 되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거진 대부분이니 흥미가 돋지 않았다. 그나마 잘 모르던 바빌론, 수메르, 이집트 신화 등이 환기를 시켜줬다. 초반부에도 여러 신화가 다양하게 섞였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가장 대중적인 ‘그리스 신화’의 지분이 높아야 수요가 생기겠지마는, 신화의 매력이란 다양한 세계관에서 엇비슷하면서도 다른 개성을 지닌 이야기 아니겠는가.


  불평 가득한 이유를 들먹였지만, 이 정도라면 ‘계륵’이라고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단지, 책의 구성이나 ‘그리스 신화’에서 재미를 못 느끼는 정도지, 나머지 신화는 재밌게 읽었으니까. 내가 서평 제목처럼 결론 내리게 된 결정적인 부분은 일요일의 주제였다. 더 친근하게 접근하자는 의도로 저자는 우리 주변에서 신들의 이름이나 신화 속 소재를 사용한 브랜드, 업소명 등을 소개한다. 속독을 모르는 내가 그냥 훑고 지나간 대목이기도 하다.


  ‘○○ 가게는 △△ 신의 이름으로, 그 신의 속성인 □□에서 착안했을 것이다’ 등의 내용이 내게는 하등 쓸모 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그걸 알아서 뭐하는데?’ 등의 마음 속 소리가 책장을 빨리 넘기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아, 이제는 내가 신화를 계륵으로 여기는 구나. 궁금은 하나 쓸모는 없는 지식이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탓인가, 삭막해진 탓인가. 그 씁쓸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어릴 때의 내 모습이 사라져가는 느낌이 들어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이유로 부정적인 말만 늘어놓았는데, 한편으로는 신화에 대한 깨달음을 준 책이기도 하다. 당분간 신화는 안녕!


  나와 다르게 『신화 수업 365』이 지향하는 독자 유형, 예를 들면, 신화는 궁금하나 너무 방대해서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 매일 독서하고 싶은데 많은 페이지를 읽지 못하는 사람, 혹은 매일 다른 이야기를 짧게 접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잘 맞을 것 같다.


  그래도, 읽어 둔 게 도움은 될 것이다. 계륵도 계륵만의 맛이 있으니. 그렇게 위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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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이솝 우화 전집
이솝 지음, 최인자 외 옮김, 로버트 올리비아 템플 외 주해 / 문학세계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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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과 디자인에 당했다. 서점을 배회하다가 두 가지 수식어에 끌려 구매했다. “어른을 위한”과 “무삭제”. 예전에 ‘문학 수첩’에서 출간한 『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어, 『이솝 우화』 역시 뭔가 숨겨진 내용이 있는 줄 알았다. 동화와 다르게 표현이 잔인하다거나 뭐 그런 식의. 그러나 나의 기대는 단어 하나로 귀결되었다. “노잼”. 물론, 불손한 마음가짐(?)으로 접근한 나의 잘못이 가장 크지만, 그래도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일단 “무삭제”는 틀린 말이 아니다. 대부분 우리가 ‘이솝 우화’는 동화의 경향이 강하고, 이야기의 양이 많지 않다. 이 책은 이솝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까지 포함해서 358가지 우화로 구성되었다. 개중에는 “아, 이게 이솝 우화였어?”하는 작품도 몇몇 있었다. 어렸을 때 탈무드 동화 전집에서 본 내용이나 옛날 이야기 형식으로 들었던 이야기 등등. 또한, 여러 이야기의 기원이 되는 우화들도 많았다. 이런 부분에서 “무삭제 완역본”의 매력이 발산되었다.


“어른을 위한”은 확실히 마케팅적 요소다. 주해가 길어서 그런 건지 어쩐 건지. 세대를 구분할 이유가 하등 없는데, 그냥 “이솝 우화 전집”으로 내면 안 팔릴 게 뻔하니까 수식어를 덧댄 느낌이다. 나 같은 흑우가 있으니 이렇게 만들었겠지. 당한 내 잘못이다. 킹정하는 부분. 아무튼, 개인적으로 없는 수식어라고 봐도 무방하다.


주해도 별로였다. 우화 본편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주해는 원본에 맞춰 해설하고 있다. 그럴 거면 본편에도 원어를 추가해 놓던가. 우화와 주해가 따로 노는 느낌이 강해 읽을수록 짜증이 났다. 게다가 그 주해는 “이솝 우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내용이다. 흥미롭긴 했는데, 굳이 몰라도 우화를 읽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래도 좋은 말을 한마디 쓰고 싶으니까. 몇몇 부분만 따지면 읽기에 나쁘지 않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여우와 포도송이(a.k.a 여우와 신 포도)」의 주해는 전해들었던 것 보다 훨씬 설득력 있었다. ‘시다’는 단어의 원어인 ‘옴파케스(omphakes)’는 그리스인들이 ‘덜 익다’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했다. 때문에 여우는 ‘시다’고 변명한 게 아니라 ‘덜 익었다’고 변명했다. 물론 이 부분도 “덜 읽었다”는 문구에 원어를 같이 써줬다면 흐름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결국 좋은 말은 안 나오네. 머쓱코쓱;


마지막으로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단점이라면 단점인 부분은 우화마다 정리된 교훈이 있다는 점이다. 애매모호한 내용에 있는 교훈은 명확하게 해줘 도움이 되기도 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방해하기도 한다. 개인 취향의 차이로 갈리는 부분일 듯. 하루 몇 편 씩 간단하게 읽는다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종합적인 결론은 자극의 시대에 옛날 이야기는 지루하고 노잼이라는 점이다. 굳이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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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 -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 미술 방구석 미술관 1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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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을 싫어하게 된 때를 떠올려 본다. 학창 시절,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그랬는데, 준비물을 안 가져오거나 수행평가 그림을 제때 완성하지 않으면 매를 맞았다. 주어진 시간도 짧았다. 나는 손도 느리고 예술 감각도 없어서 채색은 커녕 밑그림을 벗어난 적도 손에 꼽았다. 그러니 자주 맞았고, 재미는 잃었다. 그렇게 미술은 학창시절 내내 혐오스러운 주제로 남았다.


성인이 된 후 혐오감은 옅어졌지만, 주체적으로 찾지는 않았다. 가끔 회화가 취미인 친구의 전시회 구경 제안이 오면 보러 가는 정도? 최근 ‘초현실주의 미술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다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진 못해도 감상은 생각보다 즐거운 영역이었다. 흥미가 생긴 김에 책 쇼핑하면서 『방구석 미술관』을 구매해 읽었다.


14개의 챕터 중 들어본 예술가보다 모르는 예술가가 더 많았다. 또한, 들어봤거나 작품을 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깊이 생각해 본 작가는 하나도 없었다. 그냥 누구의 작품이구나, 하는 정도. 그러나 만물에는 존재의 이유가 있듯, 각 작품에도 작가가 왜 그러한 작품을 남겼는지 이유가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중에는 유독 노란색 계열이 많다. 이전에는 단순히 노란색을 좋아했다고 여겼다. 작가 중에는 무언가 하나에 꽂혀 그것만 주구장창 파고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것의 원인이 ‘압생트’라는 술일 줄은 몰랐다. 당시의 ‘압생트’는 매우 독한 술이며 과하게 마셨을 시 환각 증세를 유발했다고 한다. 고흐는 그 술의 중독자였다. 압생트에 취한 고흐에게 세상은 강렬한 노란색으로 보였으며, 더욱 강렬한 노란색을 찾기 위해 또다시 압생트를 찾았다. 그러한 악순환은 환청으로 발전해 자신의 귀까지 자르기에 이르렀다. 지독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덕분에 〈해바라기〉 같은 아름다운 작품을 볼 수 있으니 세상은 참 아이러니하다.


표현주의, 야수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그리고 초현실주의로 넘어가는 길목을 훑으면서 미술사를 보는 내 눈이 새롭게 반짝였다. 예전에는 ‘뭐 이딴 그림을 그림이라고 그렸어?’라는 시선으로 감상했다. 내가 볼 때는 하나 같이 두루뭉술하고 제멋대로인 게 다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주의’는 전 시대에 대한 신인 예술가의 몸부림이었다.


책에 등장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전까지의 서양 미술계는 사실적이고 경외감 넘치는 구도로만 회화를 대해야 했다. 원근감이 중요했고, 신화나 진리를 찬양하는 내용을 주된 주제로 삼았다. 하나의 이념이 고착화되어 다른 이념을 억누르기 시작하면, 그 속에서는 반항의 씨앗이 발아하기 마련이다. 점진적으로 회화 기법은 개인을 중심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에드가 드가의 경우, 아름다운 발레리나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돈을 벌기 위해 혹독한 연습 속으로 제 몸을 던지고, 부유층 남성의 후원을 받으려는 불쌍한 소녀들이다. 칸딘스키는 장면을 포착하기 보다 내면의 감정을 포착해 그리려고 애썼다. 뒤샹은 생활 물품을 통해 지식인의 아는 ‘척’을 비웃었다. 이들이 그러한 작품을 남긴 이유를 알게 되니 작품들이 다르게 보였다. 여전히 감탄사가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막말이 나오진 않았다.


개인적으로 작품은 관객이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아무리 고심했어도 관객이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작가의 잘못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의 무감각이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니 생각이 바뀌었다. 관객 또한 작품이 의미 없다 비판하기 전에 작가의 고심을 한 번 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것이 작품을 통한 작가와 관객의 소통이 아닌가. 아주 새까맣게 잊었던 사실을 상기한 기분이다.

미술 전문가가 될 생각이 아니라면 이 책처럼 흐름 정도만 알면 될 일이다. 관심이 생기고 구미가 당기면 알아서 깊이 파고 드는 게 사람이니까.


훗날 마음 끌리는 전시회가 열리면 적극적으로 관람해야겠다. 어쩌면 나도 그림 끄적거리는 날이 올지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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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 문학 작품에 숨겨진 25가지 발명품
앵거스 플레처 지음, 박미경 옮김 / 비잉(Being)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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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과 출신답지 않게 요즘의 나는 문학에 대한 의구심이 상당했다. 실용적이지 않고 시간 아깝다고 여기며 읽기를 거부했다. 취업이 급해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였다. 문학 독서는 뭔가 한가로운 느낌이 들기 때문에 억지로 멀리했다. 그렇게 안 읽다 보니 이제는 읽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의 반향만 울릴 뿐, 즐기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그래도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나는 어릴 적부터 소설을 사랑했기에 언제나 갈증은 남아 있었다. 취업하거든 마음 편히 읽으려고 쟁여 둔 소설이 독서 목록 한 쪽에 즐비했다. 이런 마음 가닥에 딱 알맞은 제목의 책이 등장했으니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구원의 광명 같은 책은 앵거스 플레처의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였다.


부제는 ‘문학 작품에 숨겨진 25가지 발명품’으로, 현실 세계의 도구로써 발명품이 아닌 뇌 과학과 심리적인 발명품을 지칭한다. 어떠한 문학 작품을 읽으면 그에 상응하는 정서적 반응이 발현된다. 그러한 장치가 어떻게 발명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작동법을 25장에 걸쳐 안내한다. 각 장의 마무리에는 해당 발명품을 더 느낄 수 있도록 관련한 문학 작품을 수록했다.


※문학 발명품과 뇌 과학


잠깐 대학 시절을 회상해 보면, 문학의 구성 요소를 배울 때 뇌 과학은 전혀 없었다. 좋은 문학의 구조가 어떻고, 이렇게 쓰면 안 되고, 저렇게 쓰면 안 되고, 이런 게 좋은 글이고, 저런 게 나쁜 글이고……. 전문가의 영역에서는 필요한 지식이겠으나, 어디까지나 글쓰기 방법론 한정이었다. 내 글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는 개인의 감각 역량일 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중고딩 때의 문학 시간도 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더 심했지. 문학을 분석해서 외우고 문제 풀어야 했으니까. 한 사람의 독자 입장에서는 개 쓰레기 같은 교육 방식이었다. 독서의 재미는 저런 것들이 앗아갔다. 좀 화가 나는데.


아무튼, 저자는 진부한 방식으로부터 문학을 건져 올렸다. 문학은 우리 인생에 굉장히 유용한 장르다. “문학은 인간 생물학에서 제기되는 심리적 도전에 맞서도록 돕는 서술적·감정적 테크놀로지였다. 아울러 인간으로 존재하는 데서 제기되는 의심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발명품이었다(p.26).” 부정적인 감정을 치유하고 진정시켜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인들은 호머의 《일리아드》를 읽으며 용기를 끌어올렸다. 이 용기는 어디서 어떻게 발현되었을까. 먼저 용기의 뇌 과학적 출처는 편도체다. 위기 상황을 맞이하면 재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두려움을 자극해 아드레날린과 천연 오피오이드 진통제 혼합물을 방출하게 해, 어떠한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이 힘의 본래 생물학적 목적은, 우리를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신경성분을 한 가지 더하면 용기로 전환될 수 있는데, 그 성분이 바로 옥시토신이다(p.65).”


피를 뿜어내는 아드레날린의 열기, 고통을 덜어주는 천연 오피오이드의 열기,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옥시토신의 열기. 이 신경화학적 묘약은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고통을 덜 느끼게 하며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게 한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이 불꽃(heart flame)이 바로 용기이다. – p.67


호머는 두려움에 더할 옥시토신을 ‘찬가’라고 칭했다. 전쟁에 나선 이들이 ‘함께’ 신을 향해 ‘찬가’를 노래하니 용기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리아드》 속 인물들과 찬가를 부르며 자신에게 내재된 용기를 북돋았다.


혹은 요정이 나타나 행운의 반전을 전해주는 이야기가 유치하게 들린다면, 그 안에 숨겨진 발명품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겠다. 신경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뇌가 (투쟁-도피 반응을 촉발시키는) 교감신경계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좌뇌가 (우리를 진정시키는) 부교감신경계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냈다. 달리 말하면, 우뇌는 잘못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하기 쉬운 반면, 좌뇌는 잘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하기 쉽다(p.201).’ 즉, 치킨만 반반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뇌도 희망 반, 절망 반의 세트 메뉴인 셈이다.


관점에 따라 절망편이 극대화될 수도 있고 희망편이 극대화될 수도 있는데, 동화(fairy tale, 요정 이야기)가 전하는 행운의 반전은 좌뇌를 자극해 우리를 낙관적이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는 두 가지 근거가 존재한다. ‘첫째, 좌뇌에게 스토리는 절대적 규칙의 영역이 아니다. 둘째, 좌뇌는 동화의 반전이 그저 우리가 운이 좋을 수 있다고, 그리고 운이 좋았다고 상기해줄 뿐이다. 이러한 암시는 우리의 회복력을 강화하고 기존에 가진 좋은 것들에 감사하도록 한다(p.211).’ 반면, 우뇌는 비관론을 펼치는데, 이는 우리의 사망률을 높이는 것과 상관있다. 자살, 심장병, 뇌졸중 같은.


비관론보다는 낙관론이 낫지만,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건 어느 쪽이 되었든 썩 좋은 상황은 아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다. 낙관론이 우세일 때는 아마 균형잡기가 쉬울 것이다. 현실은 행운보다 불운이 더 가깝고 빈번하니까. 반대인 경우라면 동화의 반전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


이러한 흥미로운 주제가 무려 23가지나 더 존재한다. 로맨스, 분노, 호기심, 슬픔, 창의성 등등.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발명품들이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저자가 속한 대학 팀인 ‘프로젝트 내러티브’에서 찾아낸 발명품은 무려 수백 가지. 이런 문학 이론서라면 100권이라도 더 읽을 수 있으니 추가로 출판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나 스스로 발명품을 찾아내는 공부도 병행하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익숙한 문학 작품을 마주하고, 또 낯선 작품도 만나면서 다시금 문학에 대한 관심이 샘솟고 있다. 덕분에 이 책에서 소개된 작품 몇 권을 구매했다. 이제는 마음 편히 먹고 찬찬히 읽어볼 요량이다. 그간 삶이 퍽퍽하다고 여겼는데, 되돌아보니 문학을 소홀히 대했을 때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반성하면서 새삼 깨닫는다. 앞으로는 문학을 좀더 가까이 대해야겠다.


※문학에 대한 태도


중세 성직자들은 고대 서사시에 주석을 달며 교리에 대한 설교로 바꿨다. 이교도의 알레고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끔 수정했다. 가만 보니 이 꼬라지는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과 다를 바 없었다. 작품을 분해하고 단어를 해석하며 ‘A=B’로 매칭하는 작태.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가졌지만, 힘이 없는 문학은 수술대에 묶인 실험체일 뿐이었다. 교과서나 지문에 수록되길 거부한 작가들의 심정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나도 배우는 내내 더럽게 재미없어서 판타지 소설로 관심을 돌렸다.


그 교육 방식은 나의 한국 문학 경시 사상의 뿌리이기도 하다. 왠지 한국 문학을 읽으면 해석해서 답을 찾아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전신을 지배한다. 그 불쾌감이 독서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한참 문학에 빠져 있던 시기에 나의 지론은 이것이었다. ‘문학은 읽는 그 자체로 즐거워야 한다. 분석과 해석은 비평가의 몫이며, 독자는 그저 독서에서 즐거움을 느끼면 그만이다.’ 지금 보니 나 한정으로 알맞은 논리였다. 재미없는 독서는 죽은 독서다. 앞으로 내가 가질 문학에 대한 태도다. 분석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정답 찾지 말고, 억지로 느끼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나는 독서를 좋아하는 독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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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20만 부 기념 윈터 에디션)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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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부터 하자면 나는 멍청이다. 30살이 다 지나가는 지금 내 본질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무능하게 지내온 이유는 전부 내가 멍청하기 때문이었다. 후,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지만 인정하니 마음이 편하다. 누가 보기에는 유난이겠지만, 내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10월 중순, 빅데이터 교육(을 빙자한 잡스러운 코딩 교육)이 끝나고 무지성으로 놀았다. 때마침 추억의 게임인 ‘디아블로2 레저렉션’이 오픈했다. 초딩 때 이루지 못한 통한의 앵벌 노가다를 즐기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밤새 게임에 몰두했다. 밤낮은 순식간에 바뀌었고, 시간은 빠르게도 지나갔다. 현실을 자각했을 때는 어느새 11월도 중순을 향해 가고 있었다. 충분히 즐겼으니 이제 취업 준비하자, 라고 머리로는 생각해도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 찼고, 나의 종특인 도피성향이 발동해 남은 11월도 게임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러면서 동시에 안 좋은 증상이 생겼다. 잠을 제대로 못 자게 된 것이다.


불면증은 아니었다. 누우면 잠들기는 빨랐다. 다만, 단면증이라고 해야 할지, 12시 내외로 잠들면 3시간 후 깨어나고, 모두가 움직일 시간에 다시 잠드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한 번도 안 깨고 자려면 날을 완전히 지새야 6시간가량 잘 수 있었다. 뭐 내가 뿌린 씨앗이니 투정일 뿐이지만, 이런 잡소리를 길게 하는 이유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마음에 든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읽게 된 이유’가 아니라 ‘마음에 든 이유’인 까닭은 이미 현실 자각을 했을 때 환기 차 교보문고에 들러 구매해 억지로 읽고 있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봤다.’ 다시 차례를 보니 다양한 철학자가 나온다. 내가 아는 소크라테스, 공자, 간디, 니체 등등부터 처음 들어보는 시몬 베유, 세이 쇼나곤, 에픽테토스 등등까지. 그래도 딱히 기억나는 철학이 없다. 각 잡고 읽은 적이 거의 없다. 잠들기 전 펴서 읽다 두어 장쯤 넘겼을 때 졸음에 못 이겨 접었다. 덕분에 불면증은 겪지 않았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잠들었을 때는 어김없이 3시간 후에 깼으니 짜증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렇게 무지성으로 읽어도 힐링이 되기 때문에 굳이 리프레쉬 장르로 철학을 선택했다.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누군가 이미 생각해줬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 독서인가!


무지성으로 읽다가 딱 한 군데 철학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앞서 길게 이야기한 모든 부분을 관통하는 부분이었다.


「스토아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테니스 경기에서 이기려 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기를 펼칠 것.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한 소설을 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말 것. – p.408 ~ 409」


5.5개월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고 해도 긴 시간동안 빅데이터 교육(을 빙자한 잡스러운 교육)을 수료하고, 전공자가 1명씩 끼어 있는 팀 사이에서 비전공자 셋이 뭉쳐 파이널 프로젝트 최우수상을 수상했어도 활용하지 못한 나 자신. 막연히 코딩 교육만 배우면 IT 업계에 취업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를 가졌던 나 자신. 남들 스펙으로 이력 채울 때 게임으로 도피해 멍청함으로 이력을 채우던 나 자신. 내가 왜 멍청이인지 자각하게 해준 철학이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세상에서 멍청한 존재가 가장 싫다. 멍청이가 멍청한 소리를 멍청하게 내밷는 것을 들으면 나도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멍청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허나 내가 그동안 해왔던 모든 행동은 합리화에 불과한 멍청한 짓 뿐이었다. 행위 그 자체에 만족한 적이 거의 없었다. 내게 어떤 의무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그마저 행위보단 따라오는 보상을 기대한 적이 더 많았다. 그러나 어디서도 내가 바란 보상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를 들면, ‘멍청하지 않음’을 바라고 독서를 했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더욱 멍청해지는 기분이었고, 독서는 괴로운 일이 되었다. 게임마저 플레이하면서 재미를 느끼기 보다 고급 아이템이 드랍되기를 바라면서 본질적인 재미를 버렸다.


정말 놀랍게도 나의 멍청함을 인정한 엊그제, 한 번도 깨지 않고 밀렸던 잠을 몰아서 잤다. 약 13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그와 함께 하기 싫어도 억지로 붙잡고 있던 공부들이 다시 활력을 되찾고 있다. 독서도 마찬가지로 재미있어졌고. 반대로 게임은 다시 흥미를 잃었다. 어떻게 보면 확률형 도박과 비슷한데, 즐겁지도 않은 행위를 그저 아이템 하나 바라고 하는 게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후에 새로운 캐릭터를 키운다면 모를까, 아마 당분간은 안 할 듯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게으르긴 했으나 독서는 꾸준히 하고 있었다. 한 달에 두 권은 읽었으니까. 그러나 독서감상문을 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코딩 공부가 내 생각 외로 너무 힘들었던 이유도 있고, 무엇보다 멍청했으니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책에 대한 내용은 매우 적지만,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의미 있는 책이다. 이렇게 중구난방인 글이나마 다시 기록을 하도록 나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멍청한 내가 조급해져서 이리 저리 고민해봐야 풀리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일어나는 흐름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멍청이의 의무를 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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