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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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흔히 베일에 싸였다라고 표현한다. 비밀스러움에 대한 비유이다.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의 원제는 The Painted Veil, 퍼시 비시 셀리(Percy Bysshe Shelley)의 시 첫 구절에서 따왔다.

 

Lift not the painted veil which those who live

Call Life: () 일러두기

 

책 도입부에는 오색의 베일, 살아 있는 자들은 그것을 인생이라고 부른다.”라고 쓰여 있다. 오색 역시 많은 색에 대한 비유로, 인생의 비밀스러운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님을 말한다. 우리는 painted veil을 쉽게 파악할 수 없다. 아니, 우리는 그 베일을 통해서 세상을 판단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베일은 인생을 가리는 베일이 무엇인지 찾는 여정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여성인 키티는 자신의 욕망에 부합하는 상대 홍콩 총독부 차관보 찰스와 불륜을 저지르다 자신의 남편 월터에게 들키고, 그 대가로 콜레라로 인한 죽음의 도시 메이탄푸로 함께 간다. 그곳에서 세관원 워딩턴과 그의 만주족 여인, 위험을 무릅쓰고 진심으로 봉사하는 수녀원장과 수녀들, 경이로운 자연경관, 자신이 임신한 사실, 그리고 월터의 환자를 향한 헌신과 그의 죽음을 통해 그녀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한다. 메이탄푸에서 홍콩으로 돌아와 찰스의 유혹에 한 번 더 넘어가지만, 그에 대한 성찰을 통해 내면을 더 공고히 다진다. 어머니를, 아버지를, 동생을 가엾게 여긴다. 더 이상 외면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키티의 베일

 

인간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서 가치관을 형성한다. 가치관은 베일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결정한다. 키티의 베일은 메이탄푸 가기 전과 메이탄푸 도착 후, 그리고 돌아온 후로 나뉜다.

 

메이탄푸 가기 전

 

그래서 앞으로 일이 년 후면 딸의 아름다움도 빛바랠 것이며 젊은 여자들이 계속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딸에게 상기시켰다. 가스틴 부인은 집안에서 말을 에둘러 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곧 결혼 시장에서 값이 떨어질 거라고 딸에게 일침을 가했다. - p.39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남편을 닦달해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려 한 어머니와 그 채근에 지쳐 무기력하게 돈만 벌어오는 역할의 아버지였다. 못생긴 동생 도리스와 비교해 어머니의 후원을 듬뿍 받은 키티는 이기심과 허영심이 가득하게 자랐다. 동생의 결혼 들러리가 되기 싫어 자신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월터와 황급히 결혼해 조급함을 회피하긴 했지만, 허영심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그녀는 월터와의 결혼 생활에 금세 질렸다. 월터는 세균학자로, 사회적 명망이 거의 없는 직업이었고 게다가 내향적인 성격이라 키티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행동에도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찰스는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단숨에 사랑에 빠졌다. 키티에게 있어 남자의 위신은 곧 자신의 체면이었고, 결혼은 그것을 이룰 수단이었다. 월터는 그에 부합하지 못했고, 찰스는 딱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월터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가끔 그가 그녀를 사랑하도록 그녀가 허용하기만 한다면 어떤 모욕이라도 감내할 각오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찰스를 향해 느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쭐함이 전율처럼 그녀의 몸에 퍼지는 동시에 그렇게 굴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남자에 대한 희미한 혐오감 또한 솟아났다. - p.82

 

이기심에서 발로한 가치관은 모든 기준을 자신에게 맞추기 마련이다. 키티와 찰스의 불륜을 알게 된 월터는 그에 대한 대가로 그녀에게 메이탄푸로 같이 가기를 제안한다. 그곳은 콜레라로 인해 죽음이 만연한 도시였다. 키티가 당연히 거절하자 그는 한 가지 조건을 단다. 키티가 찰스의 이혼 서류를 가져오면 자신도 그녀와 이혼하고 메이탄푸에는 혼자 가겠다는 것이다. 자살 행위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키티는 찰스에게 급히 달려가 모든 사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배신감이었다. 키티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찰스는 이혼하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의 아내 도로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키티는 체념하고 월터와 메이탄푸로 떠난다. 그러면서도 찰스에 대한 애정은 접히지 않았다.

 

메이탄푸 도착 후

 

메이탄푸에서 키티는 해 뜨기 직전의 경관으로부터 경이로움을 경험하고, 처음으로 시체를 보고,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예컨대 세관원으로 있는 워딩턴과 가문을 뒤로하고 수녀가 되어 자발적으로 죽음의 땅에 온 수녀원장과 그녀를 따르는 수녀들, 역시 가문을 버리고 워딩턴에게 헌신하는 만주족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이 월터의 환자를 향한 헌신을 극찬하면서 키티의 가치관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키티는 모든 인류가 저 강물의 물방울들처럼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서로에게 너무나 가까우면서도 여전히 머나먼 타인처럼, 이름 없는 강줄기를 이루어, 그렇게 계속 흘러흘러, 바다로 가는구나. 모든 것이 덧없고 아무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 사소한 문제에 터무니없이 집착하고 그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인간이 너무나 딱했다. - p.205

 

경이로운 자연과 목격한 죽음 앞에서 그녀는 그들의 감정싸움이 덧없게 느껴졌다. 월터와 화해하고 싶었지만, 그가 받아들이리라고 생각이 들지 않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의 임신에 대해 월터가 자신의 아이냐고 물었을 때, 키티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지만 모르겠다고 말했다. 더 이상 자신의 이기심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월터에게 용서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를 이해했다. 그가 그녀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p.183) 월터가 콜레라로 인해 숨을 거두자 워딩턴과 수녀원장의 제안으로 메이탄푸를 떠난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녀가 깨달은 것은 남에게 거짓말하는 것이 때론 필요하지만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는 언제나 비열한 짓이라는 점이었다. - p.282

 

메이탄푸 떠난 후

 

과거는 끝났다. 죽은 자는 죽은 채로 묻어 두자. 너무 무정한 걸까?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동정심과 인간애를 배웠기를 바랐다. 어떤 미래가 그녀의 몫으로 준비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것이 닥쳐오든 밝고 낙천적인 기백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자신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 p.329

 

홍콩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키티는 찰스의 아내 도로시 타운센드를 만난다. 불편한 마음에 도로시의 호의를 거절하려 하지만, 그녀의 간곡한 요청에 마지못해 도로시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키티와 찰스는 재회한다. 그녀는 찰스를 멀리 대하려 하지만 그의 집요함에 또다시 굴복한 자신을 책망한다. 스스로를 돼지라고 하면서. 다음 날 키티는 홍콩을 떠날 채비를 하며 찰스에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다. 당신은 정말이지 허영 덩어리에다가 바보천치, 내 인생에 닥친 커다란 불운이에요.”(p.312) 영국으로 가는 도중 키티는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는다. 집에 도착해 바라본 죽은 어머니에게서 그녀는 깊은 애정은 느끼지 못하고 무가치한 것에 집착한 당신을 불쌍하게 여긴다. 자신에게 안겨 울음을 터뜨리는 동생을 못생겼다는 이유로 등한시한 과거를 미안해한다. 그리고 드디어 어머니에게서 해방된 아버지의 체념 어린 태도에서 가슴 시림을 느낀다. 그녀는 지방 법관으로 발령된 아버지와 동행하기를 희망한다.

 

그녀는 딸이 태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딸이 저지르지 않도록 키우고 싶어 한다. 그저 어떤 남자의 연인으로서의 여자가 아닌 스스로의 주인으로서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여인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키티는 과거를 묻고 희망과 용기로 나아가기를 결심한다. 그녀가 저지른 잘못과 어리석은 짓들과 그녀가 겪은 불행이 아마도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닐 것(p.329)이기 때문이다.

 

키티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자신이 가진 베일을 걸쳐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선은 사상이 될 수도, 편견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을 걷어내는 건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베일의 종류를 바꿀 수는 있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내면을 살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성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언제나 누구든 실수하고 잘못하고 오해할 수 있다. 여기서 반성하지 않는다면 과거는 다시 그렇게 행동하는 베일이 될 것이고, 반성한다면 그런 행동을 지양하는 베일이 생길 것이다. 아니, 적어도 나의 내면에 베일을 씌우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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