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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한일기 - 코로나19로 봉쇄된 도시의 기록
팡팡 지음, 조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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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의 메인 이슈도 코로나다. 백신이 개발되면서 좀 나아지려나 기대했지만, 변종이 등장해 다시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변종에도 효과적인 백신이 있어도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처방받으려면 한참 걸릴 것으로 보인다. 올해 말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사람 많은 곳을 피하고, 외부에서는 마스크를 최대한 벗지 말아야 한다. 현재는 예방이 곧 백신인 셈이다.

 

이런 핫이슈를 몸소 경험하고 있으니 우한일기를 마주했을 때 아니 구매하고, 아니 읽을 수 없었다. 코로나의 발원지가 어디냐, 바로 우한 아니었던가. 뭐 발원의 근거는 논란이 있다고 쳐도, 초기 확산이 두드러졌던 곳이 우한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리원량 의사가 코로나의 위험성을 설파했으나 중국 정부는 헛소문을 퍼트린다며 처벌했다. 중공식 입막음 때문에 환자 선별이 늦어졌고 전염성이 매우 강한 COVID-19는 우한을 집어삼켰다. 의료체계가 붕괴 수준에 이르러서야 중국 정부는 극약처방으로 우한을 봉쇄했다. 팡팡은 봉쇄3일 차부터 해제 명령이 나온 날까지의 60여 일 동안 우한 상황과 개인적인 경험 및 의견을 중국 SNS에 일기 형식으로 올렸다. 우한일기는 그 내용을 모아놓은 책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수많은 인민들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중국 각 지역 공무원들의 평균 수준,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고질병까지 들춰냈다. 이 병은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악랄하고 끈질긴 병이다. 게다가 언제쯤 치료가 가능한지도 알 수 없다. 고치려 노력하는 사람도, 치료받으려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 p.48

 

호시절에는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 알 수 없다. 전부 평균 이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구분이 가능해지는 시점은 위기 상황이 당도했을 때다. 진짜 유능한 사람들은 위기 대응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투자의 격언 중 하나인 버핏의 말은 투자를 벗어나 모든 상황에 어울린다. “물이 빠져야 누가 발가벗고 수영하는지 안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우한 의료체계가 속절없이 붕괴하는 소식을 접했다. 병원으로 밀려드는 군중을 공무원들은 제어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전염병 소식을 숨겼고 민중을 속였다. 사람들은 정부가 전염병으로 속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예전에 사스로 크게 데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신속하게 전문가의 의견을 발표했다. ‘사람 간에는 전염되지 않는다. 막을 수 있고 통제 가능하다.(p.59)’ 작가를 비롯한 우한 사람들은 안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서 중공식 통수를 예상하지 못했다. 의견의 주인공 전문가는 발표 후 코로나에 감염되었고 의견을 정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세심하게 돌아봐서 이렇게 감염된 것이다, 대충 봤다면 감염되지 않았다라는 뻔뻔한 말을 했다.

 

그들의 무능함 여파는 고스란히 시민들의 피해로 이어졌다. 코로나 확진으로 부모가 격리되는 바람에 집안에 홀로 있다 아사한 아이가 있었고, 기저질환이 있던 중증 환자 사망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보호자가 코로나로 사망해 졸지에 고아가 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미처 정비하지 못한 채 봉쇄된 의료 최전선에서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젖 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희생정신을 발휘해 간신히 버텨냈다. 그 과정에서 리원량 등 몇몇 의료진이 세상을 등졌다. 건강한 시민들은 건강을 망치지 않도록 집안에 박혀 있어야만 했다.

 

전염병을 막는 과정도 일상생활과 같아서 수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다. 하지만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더 많고, 모든 일이 다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 p.86~87

 

정부와 공무원이 속인 대가로 우한 시민들은 꼼짝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금세 살기 위해 행동했다. 기간을 두고 한 가구당 한 사람씩 나와 생필품과 식료품을 구매했다. 주변에 직접 나서기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문 앞까지 배달했다. 나중에는 젊고 건강한 청년을 중심으로 장보기 그룹이 생겨 시민들의 주문에 맞춰 대신 장을 봐주었다. 27일 차 일기에서 작가는 우한 사람들의 삶이 화창한 날씨처럼 활기차다고 썼다. 인간의 적응력과 생활력이란 참으로 대단함을 느꼈다.

 

물론 쓰레기 같은 부류의 개인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적잖이 그랬듯 우한 역시 마스크를 쓰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 진실을 거짓으로 호도하는 사람, 권위를 내세워 개소리하는 사람 등. ‘그들 대부분이 전염병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염병 통제는 더디고, 어쩔 수 없이 계속 집안에 머물러야 하는 우리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대가를 치른다(p.241)’

 

하긴 악당 같은 게 어디 바이러스뿐일까.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고 인민들이 죽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 기증한다는 명목으로 물품을 모은 후 인터넷에 내다파는 사람들, 일부러 엘리베이터에서 침을 튀기고 이웃집 대문 손잡이에 침을 묻히는 사람들, 병원에서 구입한 긴급 의료용품을 훔치는 사람들까지. 물론 사방으로 소문을 지어내고 모함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존재하는 한 바이러스는 영원히 존재한다. 그렇다, 사회생활도 이와 같아서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바이러스 같은 사람(덜떨어진 사람)도 늘 함께 있다. - p.139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다고 느꼈다. 불과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몰상식한 인간들 때문에 집단감염이 또 발생했었다. 지금도 집단감염이 발생하지 않아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몇십 명 이상이 모이는 장소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질병인 바이러스는 시간이 걸려도 치료제나 백신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회적 민폐 바이러스는 약도 없다. 성숙한 시민의식만이 답이 될 수 있다. ‘그래, 우리의 머리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달린 게 아니고, 신문에 달린 것도 아니고, 회의 문건에 달린 건 더더욱 아니다. 머리는 우리의 어깨 위에 달려 있다. 우리의 머리는 독립적으로 사고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p.23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5&aid=0001412034


서평을 쓰기 전에 이런 기사를 봤다. 요약하자면 중국 정부가 코로나로 인한 노인 사망자 수를 숨겼다는 의혹이 재차 불거졌다는 내용이다. 재차라고 하니 이전에도 한번 있었던 모양새다. 봉쇄 해제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여전히 우한은 진행 중인 듯하다. 우리야 중국이 중국했다로 치부할 수 있어도, 이미 정부의 배신을 겪은 우한 시민 역시 그러할까? 워낙 정부의 입김이 강한 나라이니 사건의 온상이 제대로 드러날지 미지수다. 의혹을 제기한 기자와 언론사가 무사할는지……. 아마도 이 책에서 배울 교훈은 우리나라 정부가 중국의 저런 모습을 학습하지 않도록 국민으로서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리라. 그나마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여서 다행이다.

 

다시 한번 느낀 점을 강조하면,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기에 어디서나 깨어 있는 부류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끝으로 작가가 일기에 실은 고등학생의 글을 나도 내 서평에도 실으면서 마무리한다.

 

오히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의 문제는 사회의 어두운 면에 관심을 기울일 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밝은 빛에 과하게 취해 있을 때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빛은 우리의 시력을 망가뜨리죠.”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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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라밸 - 행복은 내가 정한다.
김은정 지음 / 담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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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네이버 블로그 서로이웃인 '낭만아빠 윤소장'님께서 서로이웃 4천 명 기념으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되었다. 선물로 김은정 작가의 친필 사인이 담긴 책과 윤소장님의 정성스러운 편지를 받았다. 2차 추첨 덕분에 받은 책이어서 더욱 감사했다. 무릇 책 선물에 대한 예의는 읽던 책을 멈추고서라도 가장 먼저 읽는 것이므로, 받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책에 익숙하지 못한 터라 집중하지 못해 시간이 꽤 걸렸다. 더 빨리 읽지 못한 부분은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애용하는 알라딘에 들어가 검색해봤더니 분류가 '자기계발서'로 되어 있어 초반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사람마다 자기계발서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참고문헌과 계발에 대한 객관적 결과가 없으면 자기계발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은 김은정 작가의 경험을 주로 이야기하다보니 내 기준과의 괴리가 상당히 컸다. 그 부분에서 혼란을 빚었다. '에세이'라고 생각하자 혼란은 점점 가라앉았다.

 

거북이 독서가

 

 

거북이 독서여도 나의 성장을 위해 쉬지 않고 계속 책과 함께한 결과이다. - p.181

 

아무튼, 에세이로 자체 분류하고 나니 눈에 들어오는 몇몇 부분이 있었다. 그중 '거북이 독서'라는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저자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독서에 막 발을 담갔을 때는 '독서 불치병' 때문에 10분 내외로 졸음이 쏟아졌다고. 그래서 수면제로 활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리지만 꾸준히 읽은 결과,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지금은 행복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장르의 다변화가 있었지만, 그래도 책과 떨어져 지낸 적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읽는 속도가 빠르지는 않다. 오히려 지금은 엄청 느려졌다. 각 잡고 읽어야 사흘에 한 권 읽을까 말까. '독서 불치병' 때문은 아니고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렇다. 특히 요즘은 비관 자아가 다시 뇌를 지배해서 독서 자체를 더욱 거부했다. 다행히 책에서 '거북이 독서'가 언급되었다. 참으로 시의적절했다. 덕분에 독서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었다.

 

아예 읽지 않느니 한 글자라도 읽는 게 도움 되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이 또 내가 지향하는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 아니겠는가. 독서 부담을 좀 덜어두고 나도 회복할 때까지는 '거북이 독서가'가 되어야겠다. 쓸수록 마음에 드는 말이다. 거북이 독서가.

 

쓰고 또 쓰고

 

고민이 있거나 마음 정리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 글쓰기를 통해 해결했다. - p.45

 

저자는 'Four-'를 삶의 기준으로 세운다. '걷고, 쓰고, 읽고, 나누고'가 그것이다. 여기서 시작점은 '쓰고'이다.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이 생기면 일기를 쓰며 버텼다. 아이가 태어난 후 혼란을 겪었을 때도 글을 쓰며 상황을 정리했다. '내가 내 삶을 바라보는 자세'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p.45) 모든 것을 쏟아내어 쓰고 나서부터 나아갈 길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고비마다 글쓰기로 대안을 찾아낸다. 삶이 안정된 지금은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나누기 위해 글을 쓰고, 또 독서를 소화하기 위해 서평과 필사도 겸한다고 한다. 그런 결과들이 모여 저자의 손에서 두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엊그제 분노를 참지 못했을 때, 차라리 글을 썼어야 했나 싶다. 감정을 글로 토해냈다면 키보드가 부숴질 일도, 내 손이 다칠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 동생과 싸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글쓰기의 힘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저자의 말을 읽고 보니 아쉬운 생각이 문득 든다.

 

어쨌든 내가 지향하는 삶 역시 언제나 글 쓰는 삶이다. 쓰고자 하는 분야는 달라도 태도는 동일할 테니, 저자의 쓰고 또 쓰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일기도, 자체 프로젝트인 '매일 쓰기', <긍정의 한 줄>도 귀찮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저자의 마인드를 떠올려야겠다.

 

하이라이트는 포기하지 않는 것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했기에 10년 만에 내 삶이 이렇게 바뀌었지?' 내가 잘한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제일 잘한 것은 오늘 잠들면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했던 그 시절조차 난 포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p.51

 

앞서 요즘 내 뇌를 비관 자아가 독차지했다고 얘기했다. 뭐 주기적으로 그러니 다시 좋아질 거라 생각은 하지만, 당장의 비관은 어쩔 수 없다. 만사가 부정적이고, 가족마저 적으로 보이며, 다양한 자살 방법을 시뮬레이션 한다. 뼛속까지 쫄보여서 막상 실행은 못하니 상상으로 만족하고 현실로 돌아옴의 반복이다. 비관 자아 버전의 나는 내가 인지 능력을 막 가졌던 때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나아진 점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낙관 자아가 회복하면 확실히 예전보다는 나아졌음을 여실히 느낀다. 그 중심에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가 굳건히 서 있다.

 

비관 자아에 휘둘려 죽어버렸다면, 또 내가 쫄보가 아니었다면 난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사실 비관 자아보다 쫄보의 영향이 더 크다.). 살아 있기 때문에 괴로움 속에서 꿈도 꾸고 욕심도 부리며 지내는 중이다.

 

저자가 'Four-'를 삶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도, 경제적·시간적 자유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도, 유명한 강연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도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한다. '포기하지 않는 것.'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타인을 위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저자는 지금의 자리에 도착했다.

 

물론 저자의 삶과 내 삶은 다르고, 성격도, 지향점도 다르니 데칼코마니처럼 적용할 수는 없다. 애초에 타인의 경험을 나와 일체화 시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행위니까. 하지만 인간이기에 보편적인 특성과 공통점이 있다. '포기하지 않는 자세', 이것이 모든 인간의 기본값이다. '거북이 독서', '쓰고 또 쓰고' 역시 '꾸준하게', '포기하지 않고'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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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심정으로, 읽을 때는 ', 나랑 안 맞는데……, 서평 쓸 수 있으려나.'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다 읽고 막상 서평을 쓰기 시작하니 무심코 지나쳤던 부분이 떠오르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래서 자기계발서로 분류한 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저자가 책에서 경제적 자유를 강조하며 전작 부자는 내가 정한다를 수시로 언급했으니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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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 있는 아무 말 대잔치 - 이왕이면 뼈 있는 아무 말을 나눠야 한다
신영준.고영성 지음 / 로크미디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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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려와 조언이 필요한 요즘이다. 과거를 후회하고 현재를 불안해하며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내 꿈은 무엇인지, 내가 정말 놓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보는 중이다. 여기에 도움을 얻기 위해 나의 정신적 지주인 신영준 박사와 고영성 작가의 에세이를 펼쳤다. 작년 이맘때 그들이 쓴 책 완벽한 공부법으로 삶을 가다듬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그때만큼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는 격려와 조언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짧은 에세이가 여러 편 수록된 책이기에 전부를 축약할 수는 없어 당장 나에게 힘이 된 부분을 추려봤다.

 

<30대가 된다고 하니 마냥 서글프다>_p.29

 

그런 의미에서 20대는 꿈을 이루는 시기가 아니라 개인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기본기를 축적하는 시간이다. - p.32

 

올해가 지나면 햇수로 30세가 된다.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초중고 생활을 자주 떠올리지 않았는데, 시간의 마술인지 날이 갈수록 지나온 흔적을 찾으려 자주 뒤돌아보곤 한다. 물론 노력의 ㄴ자도 없이 지내왔으니 흔적이 있을 리 없고, 답답함이 정량을 초과해 넘친다. 맥주처럼 넘치는 거품을 호로록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20대에 목표를 성취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말한다. 30대는 혼자의 힘으로 먹고사니즘을 해결해야 하는 나이이고, 그 나이대를 서글퍼하는 것은 미완성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이러한 상황이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역량을 쌓는 게 최고지만 우리 모두에게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자원이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이들은 모든 문제 해결의 공통 분모 능력으로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꼽았다. 이것을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문해력으로, 문해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 신박사와 고작가도 그렇게 본인의 부족함을 극복하여 나아가고 있다.

 

내가 남은 시간을 서글프게 보내지 않으려면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행동을 하면서 실력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리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일을 하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스로 보기에도, 타인이 보기에도 누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잘하는 게 없어요>_p.77

 

개인의 장점이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장 잘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장 잘 알고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영역을 알아야 한다. - p.79

 

나에 대해 탐구할 때마다 매번 드는 생각. ‘나는 잘하는 게 없다.’ 혹은 나는 장점이 없다.’ 바꿔서 말하면 누군가 나에게 장점이나 특기를 물었을 때 당당하게 대답할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장점의 기준에 대해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분야를 매우 객관적인 잣대로 평가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장점이자 특기는 글쓰기이다. 하지만 여기에 객관적 잣대인 수상경력이나 조회수등을 들이미니 나의 장점은 초라해졌다. 또 읽는 책과 비교해보면 나의 글은 시간 낭비의 산물이었다. 자연스럽게 장점은 쪼그라들어 사라지고 나는 무능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내 장점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장단점에 대한 메타인지가 낮음을 의미한다. 정말 내 장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다양한 시도를 하고, 그 경험에서 장점이 무엇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그렇게 장점을 알게 되면 방향성이 잡히고, 확장·발전시키면 전문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하니, 일단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시도도 모색해봐야겠다.

 

<성공하는 사람들이 거부하는 9가지>_p.233

 

얼마만큼 성장할 수 있을까? 바로 자신이 한계짓는 선까지 성장한다. - p.236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에 매몰되면 안 된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 p.237

 

성공하는 사람들이 거부하는 9가지는 [남 탓 너무 완벽한 계획 자신만 이기는 거래 자신을 한계 짓기 나이와 경험 우선주의 공짜로 일하기 실패에 굴복하기 이나 에 의지하기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기]이다. 모두 관심가지고 살펴야 하는 항목이지만 당장 나에게 와닿은 항목은 였다.

 

앞에서 쓴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나의 한계짓기를 참 잘한다. 여러 자기계발서에도 나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 믿음은 나를 믿자!’라고 외친다고 해서 단번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나를 믿자고 꾸준히 외치다 보면 정말로 내 자신을 믿게 되지 않을까? 더 수월하게 믿으라고 여기에 작은 성공을 더하는 중이다.

 

역시 설명 안 해도 앞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책에서는 과거의 이력과 나이에 매몰되어 꼰대짓을 말하지만, 나는 그 반대로 텅 빈 수레를 열심히 살 걸, 하고 푸념 중이다.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이러고 있는 건 멍청함의 반증일 뿐! 새로운 시대를 살기 위해 지금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예전의 나는 반성용으로 두자. 시간과 함께 나아가는 일이 중요하니까.

 

<미라클 모닝이 있으면 미라클 나이트도 있다>_p.280

 

포기했다가 다시 하고 또 포기했다가 다시 했다. - p.282

 

이 장은 적절한 포기와 시간 활용, 그것을 위한 계획과 의지를 말한다. 내용과는 한참 멀게도, 나는 위의 문장에서 가장 큰 격려를 받았다. 작년에 나는 일주일에 서평 하나씩은 꾸준히 쓰겠다고 결심했다. 4월부터 시작해 8월까지는 해냈으나 그 후 포기했다. 며칠 전 다시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포기했다가 다시 한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들은 포기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시절을 가졌다는 말에서 위로를 받았다.

 

항상 포기에 중점을 두고 나는 이래서 안 돼라고 자책했다. 그러나 다시 했다에 초점을 맞추니 포기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중간중간 포기하더라도 놓지 않고 다시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쌓인다면 결과는 긍정적으로 변하리라 생각한다. 다시 하는 게 중요하다. 이것만 잊지 말고 생활하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_p.358

 

앞으로의 오늘을 후회가 아니라 만족으로 채워진 삶으로 만드는 더 나은 선택을 지금하는 것이다. - p.361

 

현재의 나는 어디선가 뿅! 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과거의 선택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내가 하는 선택들로 이루어진다. 지금의 모습이 과거가 되었을 때,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게 싫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현재, 오늘, 이 시간, 지금을 더 나은 선택으로 채우는 것. 과거로 돌아갈 방법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타임머신을 생각한다면 지금개발하는 선택을 하길 바란다.)

 

똑같은 말은 반복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내게는 중요한 사항이다. 얼마나 갈지 모를 다짐을 해보자면, 이 글을 끝으로 과거를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다. 텅 빈 이력서를 갑자기 가득 채울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 하나씩 채울 수는 있다. 할 말 없는 자소서를 온갖 경험으로 점철할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 쓸 말을 늘릴 수는 있다. 내가 포기할 부분은 예전에이다. 그리고 집중할 부분은 이제부터이다. 인생의 서막이 열리는 기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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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로 그들의 이야기를 꾸준히 접하고 완벽한 공부법일취월장등의 저서를 읽어서인지 독서 내내 친근함을 느꼈다. 간혹 음성지원도 되고, 표정지원(?)도 되고. 신박사의 졸업선물과 마찬가지로 생각날 때마다 가볍게 읽으며 힘내기 좋은 책이다.

 

신영준 박사님과 고영성 작가님,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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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바캉스 에디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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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를 맞이해 여행 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국내든 국외든 떠나는 발걸음에는 낯선 곳에 닿는 기대감과 익숙한 곳을 벗어난 해방감이 담겨 있다. 새로움은 기분을 환기하고 삶에 활력을 심는다.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도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지마는 그건 어디까지나 떠나고 난 이후의 일이다. 떠나기 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 그것이 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묘미를 즐길 줄 모르는 탓이다. 사람 많은 장소를 싫어하기도 하고, 멀리 나다니기 귀찮은 것도 있다. 물론 시간적 경제적 제약도 있음은 당연하다. 가장 큰 이유는 조용함을 좋아하는 성향이 크다. 바다를 좋아하는데, 그래서 비수기일 때, 대체로 겨울쯤 혼자 돌아다닌다. 해안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코코아를 한 모금 머금고 문학을 읽는다면 그만한 행복이 없다. 뭐 어디까지나 국내일 때 이야기이고, 해외라면 좀 달라진다. 나는 외국어를 전혀 못 하는 쫄보다. 국내에서 외국인이 말 걸어도 나에게 뇌가 있었나, 하는 상태가 되는데 외국은 오죽할까. 그래서 내 여권은 작년 여름 이후 쭉 놀고 계신다.

 

그렇다고 욕망이 없지는 않다. 떠나고는 싶지만 용기가 없다. ‘일단 그냥 떠나!’라고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그건 네 입장에서 편한 소리고-라는 대답이 절로 나온다. 결국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점은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동경심 같은 게 생겨 가끔 서점 가서 여행 책자를 뒤적이곤 한다. 여행 프로그램도 가끔 보고. 그런 마음에 휴가철을 핑계로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집었다.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용기는 얻지 못했지만 대리 만족 혹은 위로는 받았다.

 

여행의 즐거움?

 

나는 왜 여행을 즐길 줄 모를까? 아마도 나에게 여행이란 무언가를 꼭 배우거나 깨달아야 하는 행동이라는 강박증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유학도 아닌데 뭘 그리 배우려고 하는지. 여기서 배움이나 깨달음은 기술 혹은 지식이 아니라 그동안 잊고 살았던, 아니면 전혀 몰랐던 어떤 진리를 말한다. 그게 의도적으로 가능한가?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p.22) 오히려 대놓고 깨달아야 해. 배워야 해주문을 외우다 보면 시야가 좁아져 멋진 경관을 놓치기 마련이다.

 

입대 전 겨울, 하나뿐인 나의 남동생과 제주도로 여행 간 적이 있다. 둘 다 여행은 처음이었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숙소가 흔할 줄 알았다. 비행기가 6시 출발이었기에 지방에서 올라온 우리는 24시간 패스트 푸드 가게에서 밤을 새웠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밥도 안 먹고 올레길 20코스를 걸었다.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약 18km쯤 되는 길이였다. 찬 바닷바람 맞으며 그 먼길을 어찌어찌 걸었고 중간에 라면집에서 문어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리고 도착한 목적지인 성산일출봉에서 숙소를 가지고 우리는 싸웠다. 1월의 성산일출봉이 성수기인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만만하게 생각했던 빈방은 없었고, 서로를 탓했다. 결국 나와 동생은 제주시로 택시를 타고 돌아와 다음날 첫 비행기를 예매하고 시내의 24시 카페에서 밤을 또 샌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나는 배움을 생각하고 가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다녀왔던 여행보다 많은 것을 배운 여행이었다. 일단 숙소는 미리 잡아야 한다는 점과 밤새우고 하는 여행은 미친 짓이라는 점, 첫날부터 무리한 일정은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 배움들은 나의 여행 기본 원칙이 되었으나…… 뜻밖의 사실로 배웠다는 부분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이후의 여행은 모두 헛된 느낌만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책을 읽고 나서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 p.24

 

여행의 즐거움은 현재에 있다

 

그러니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가장 나은 방법은 오롯이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에 맞춰 생각을 바꾼다. 타지는 그곳만의 문화가 있으며, 타인은 그들만의 가치관이 있다. 그것에 맞추지 않고 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여행 동안 괴롭게 보내겠다는 일종의 자학이지 않을까. 여행지에 가서 과거나 미래에 중점을 두고 있으면 뜻밖의 깨달음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과거는 후회를 불러오고, 미래는 걱정을 가져오니 말이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p.82)

 

현재를 즐기지 못한 여행이 생각난다. 작년 여름 베프의 제안으로 함께 코타키나발루로 생의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여전히 나는 쫄보였지만 친구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 완전히 의지하며 따라갔다. 당시 나에게는 문제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게임 중독 상태였다는 것이다. 게임을 못 하는 35일 동안 코타키나발루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게임 내 이벤트 일정을 확인했고, 못 한 시간만큼 얼마나 빡세게 던전을 돌아야 하는지를 계산했다. 아이템은 팔렸는지, 그 전에 어떤 퀘스트를 해놓거나 동생에게 맡겨 놓을 걸 하는 후회도 함께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보니 말 그대로 다녀만 온 게 되었다.

 

이와 반대 상황도 있다. 충동적으로 담양을 간 적이 있었다. 담양 터미널에서부터 메타세콰이어 길을 지나 죽녹원까지 걸었던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이때는 혼자 삼각대로 사진도 찍고 천천히 주변 풍경 감상도 하면서 감정 낭비 없이 즐겼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 중 큰 고목에 손대고 찍은 사진을 볼 때면 그때의 위압감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절로 겸손해지는 사진이다. 지금 쓰고 보니 자연 앞에서 겸손하자는 마음을 이때 배운 듯하다.

 

간접여행도 여행이다

 

직접 떠나야 여행만이 유일한 여행인 것은 아니다. 간접여행도 여행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여행안내서 보거나 누군가의 여행기를 보는 행위, 타인이 여행하는 영상을 보는 행위가 있다. 이런 여행은 시간을 아끼고 사전 지식을 형성하고 상상력을 뭉게뭉게 피어나게 해준다. 또 전혀 의욕이 없던 곳에 대한 욕구를 심어주기도 한다. 어쩌면 가장 큰 이점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일지 모른다. 가령 근대화 시기의 장소를 간접여행으로 경험하고 현대화된 그 장소를 가보면 내가 얻는 경험치는 배가 된다. 같은 장소지만 내가 놓쳤던 부분, 가보지 못한 장소, 혹은 새롭게 알게 된 장소 등 타자의 시선은 나의 여행을 더 크게 만든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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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이유는 넘쳐난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중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이유는 확실해졌다. 아슬아슬한 삶의 경계에서 안정감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떠난다. 그것이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와 느끼는 안정이든, 일상을 벗어나 발걸음을 낯선 곳에 디딜 때 느끼는 안정이든 간에 우리는 삶을 지속할 수 있는 활력소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가장 완성도 있게 꾸며주는 행위가 바로 여행이 아닐까. 세계의 절망, 환희, 분노, 평온, 혼란……그 어떤 장면을 보더라도 촉발되는 감정은 삶이라는 퍼즐을 한 조각씩 맞춰 완성된 안정감으로 회귀하리라 생각해 본다. 나도 여름이 끝나면 잠깐이라도 여행을 가보고 싶어졌다.

 

P.S 가독성이 좋아 술술 읽히고 두껍지 않아 간단하게 읽기 좋다. 독서 속도가 느려터진 나도 11독을 가능하게 해준 아주 감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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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샐리 티스데일 지음, 박미경 옮김 / 비잉(Being)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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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삶을 피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살아있는 자라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우리는 만큼이나 죽음에 대해 사색한다. 대상은 다양하다. 자신, 부모형제, 배우자, 자녀, 반려동물. 내용 또한 다양하다. 죽음이란 무엇인지, 언제 죽고 싶은지, 어떻게 죽을 것인지, 죽은 후 어떻게 될 것 같은지. 대부분 그 사색의 종착역은 그렇다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을 뭉뚱그리면 죽음의 정의에 대한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철학인 이상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이 된다. 개인에게 머물 뿐 절대적일 수는 없다. 죽음의 가치는 남들의 생각에 달려 있지 않다. 내 죽음은 오로지 내 소관이며, 내 죽음의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p.77) 그렇기에 이 글은 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읽으며 고찰한 나만의 죽음 철학이다.

 

왜 죽느냐는 원초적 의문을 탐색하는 과정은 종교나 과학,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설사 만족할 만한 답을 찾더라도 대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탐색 과정을 뭐라고 부르든, 죽음의 이유에 대한 탐색은 각자가 수행해야 하는 과업이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타인의 임종 자리에서 강요해선 안 된다. 세상의 풍파는 함께 겪을지라도 빠져나가는 길은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 p.135

 

죽음을 오독(誤讀)하다

 

나에게 있어 죽음은 숨이 멎는 순간이다. 더 이상 산 사람에게 관여할 수 없고 몸의 처리만 남은 상태. 육신도 정신도 소멸하며 무()로 변환되는 상태. ‘좋은 죽음은 임종을 맞이했을 때 지나온 인생에 미련이나 후회가 남아서는 안 된다. 남더라도 스스로 털어내야 한다. 삶에 대한 집착을 주변 사람에게 보이지 말아야 하며 가능한 한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어렵겠지만 해내는 것이 인간으로서 마지막 도리이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나와 연관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면 좋겠고, 나 역시 죽음이 도래했을 때 이러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죽음을 잘못 읽고 있었다. 오로지 철학적 측면에서만 바라봤다. 생각 내에서만 맴돌았으며 현상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임종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내 눈에는 그저 괴로워 보이고 겪기 싫고 안쓰럽게 여겨졌다. 건방지게도 전생(全生)으로써의 죽음이 아니라 일면으로써의 죽음으로 판단했다.

 

죽어감

 

좋은 죽음을 규정하기보다는 죽음을 둘러싼 실상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게 낫다. - p.64

 

이 책의 부제는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이다. 나에게는 정말 실질적 조언으로 다가왔다. 단 한시도 깊이 떠올리지 않았던 죽어감에 대해 관점을 돌리도록 도와주었다.

 

생애는 두 가지 선이 평행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선’. 다른 하나는 우리와 같은 속도로 그어지는 죽음의 선’. 인간은 삶과 죽음을 나란히 두고 살아간다.

  

 

언젠가 삶의 선이나 죽음의 선이 기울어 교점이 생기면 죽음을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기울어진 선을 나는 죽어감의 선이라고 이름 지었다. 각도가 넓어질수록, 길이가 길어질수록 죽어가는 시간은 늘어난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은 이가 급격히 쇠약해지며 보호자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누가 되었든 힘든 시간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이 힘겨운 과정을 견뎌내려면 현상을 바라보는 확실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죽음과 죽어감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느냐 부정적으로 바라보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가치관의 문제는 언제나 실상을 빗나가기 쉽다. 인생의 앞날을 모르듯 그 끝의 앞날 또한 모르는 법이다. 우리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p.96) 하지만 현상으로서 죽음과 죽어감은 다르다. 실질적인 공부를 한다면 당사자도 보호자도 조금이라도 더 후회 없는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이에게 배려를

 

우리는 그날을 가능한 한 늦추고 싶어 한다. 엄마나 아빠가 기계에 의지한 채살아 있기를 바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우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다들 우리에게 얼른 결정하라고 다그치지만 우리는 결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 결정을 내려본 경험이 전혀 없다.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 p.175

 

죽음을 거부하고 어떻게든 살아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지만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가능성이 없는데도 가능성을 요구하거나 가능성이 있는데도 가능성을 거절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내가 이런 상황에 빠졌다면 대혼란이 올 것만 같다. 코로 튜브를 꽂아 영양분을 계속 주입하며 강제로 생이 연장되면서 죽어가는 이는 갈증을 호소하고 불편함을 호소하고 괴로움을 호소한다. 바라보는 보호자도 그 모습에 괴로워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저자의 의견에 백번 동의했다. 당사자를 존중하라. 보호자는 중용과 프라이버시, 침묵과 웃음 등 일상생활에서 놓칠 수 있는 온갖 일들의 옹호자요, 죽어가는 사람의 요구를 들어줄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p.98) 죽어가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 이야기를 경청하고 처리하기 힘들어하는 일들을 해줘야 한다. 혼자 있고 싶다면 때론 혼자만의 시간을, 함께 있고 싶다면 같이 잠드는 일도 좋다. 죽음은 자연스럽게 찾아올 것이므로 가능한 한 당사자가 괴롭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보호자가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죽어가는 사람의 갈증 호소일 듯하다. 돌이켜보면 나의 친할머니께서도 임종 직전 매 순간 갈증을 호소하셨다. 그때마다 고모들은 요양원 간호사를 불러 물을 마시게 해도 되냐 물었지만, 그들은 솜에 적셔 입술에 축여줄 뿐이었다. 나는 단순히 일반인처럼 마실 수 없어 그렇게 하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양원 간호사들은 죽어가는 이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처방했던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임종을 앞둔 환자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아야 오히려 더 편안하다. 그들도 때로는 갈증을 느끼지만, 물이나 음료가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한다.(p.167) 알면서도 물 적신 솜을 할머니의 입술에 묻혔던 까닭은 보호자들에 대한 배려였다. 죽어가는 사람은 오히려 물을 마시지 않아야 더 편안해 질 수 있다. 수분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나의 반성, 그리고 결심

 

독서 후, 나는 한 가지 후회가 생겼다, 친할머니의 죽음과 관련해서. 당신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다. 병세가 악화되어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까지 교회와 관련된 일은 빼놓지 않고 다니셨다. 언제나 독서대에 성경을 펼쳐 놓으시고 읽으시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일어나셨을 때, 잠드시기 전, 매 식사 전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셨다. 그러나 나는 종교를 싫어해서 당신의 신실함에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할머니를 따라 종교를 가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는 게 아니다. 지금도 종교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내가 진정으로 후회하는 행동은 언제나 침상에 누워만 계신 할머니께 성경을 읽어드리지 못한 부분이다. 부끄럽게도 당신을 찾아뵈어 옛이야기를 하면 듣기 싫어하는 몸을 배배 꼬며 억지로 듣는 척했다. 그 잠깐의 시간을 같이 있기가 힘들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만약 내가 할머니의 죽어감으로 돌아간다면 나도 공부해볼 겸 성경을 낭독해볼 텐데, 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면 성경에 대한 할머니의 견해도 들어볼 수 있었을 것이고, 내 지식의 지평도 조금은 더 넓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런 후회를 안고 다른 죽어감을 마주하게 된다면, 또는 내가 죽어감의 선에 올라서게 된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그들의 요구를 탐색하고 내 요구 또한 명징하게 드러낼 것이다. 죽어가는 동안만큼 시간이 소중해질 수 있을까. 나의 직감은 없으리라 단정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대로,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대로 온 에너지를 쏟아부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고민은 중요하다. 죽어감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다. 그들 모두가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면 그 죽어감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 될 때,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무슨 말이 필요치 않다. 환자는 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p.204)

 

죽음을 숙고하는 것은 실제로 저항을 숙고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죽을 준비가 될까? 우리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두려워한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그 두려움을 오래, 아주 오래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외면했던 진실, 즉 우리 모두 미래의 시신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 - p.60

 

죽음을 정독하려면 죽음에만 매몰되어선 안 된다. 죽어감 역시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육신이 영원히 멈추는 그 순간까지 사색은 멈출 수 없다. 삶에 대한 고민을 살아있을 때 한다고 죽음과 죽어감의 고민을 죽었을 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을 여기저기 권하려고 한다. 철학적인 고민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현상에 관한 고찰은 보편적인 영역이니까.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언제 올지도 모른다. 어떻게 맞이할지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누구나 예약된 시신이라는 사실이다. 정말 시신이 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된 행운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내가 감동한 문학적인 문장들

 

죽음은 모빌을 움직이게 하는 바람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바람이 살살 불어오면 모빌 조각이 하나 움직인다. 조각 하나가 움직이면 연쇄적으로 다른 조각도 차례로 움직이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바람이 다 지나간 뒤에도 모빌은 한동안 더 돌아가다 서서히 멈춘다. - p.160

 

일본어 조오지(じょうじ)’는 항상 존재하는 것, 혹은 변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말을 영원히 변치 않는 것(everlasting)’이라고 옮기고 싶다. 이 단어의 이미지는 흔히 달(moon)로 그려진다. 밤마다 달라지는 달이 어떻게 영원히 변치 않을 수 있을까? 밤마다 달라지는데도 달은 늘 달이다. 끊임없이 변하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찾아오는 죽음처럼. - p.176

 

애통(grief)은 바로 , 뭐지?’ 하면서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상태이다.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 사라졌다.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눴던 일상까지 전부 다 사라졌다. 내가 이걸 하면 넌 저걸 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넌 저렇게 대답했는데. 손을 뻗으면 늘 거기 있었는데. 이젠 손을 뻗은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진실이 거짓으로 변했다. - p.267

 

도자기는 결국 깨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 p.292

죽음은 모빌을 움직이게 하는 바람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바람이 살살 불어오면 모빌 조각이 하나 움직인다. 조각 하나가 움직이면 연쇄적으로 다른 조각도 차례로 움직이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바람이 다 지나간 뒤에도 모빌은 한동안 더 돌아가다 서서히 멈춘다. - p.160

일본어 ‘조오지(じょうじ)’는 항상 존재하는 것, 혹은 변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말을 ‘영원히 변치 않는 것(everlasting)’이라고 옮기고 싶다. 이 단어의 이미지는 흔히 달(moon)로 그려진다. 밤마다 달라지는 달이 어떻게 영원히 변치 않을 수 있을까? 밤마다 달라지는데도 달은 늘 달이다. 끊임없이 변하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찾아오는 죽음처럼. - p.176

애통(grief)은 바로 ‘어, 뭐지?’ 하면서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상태이다.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 사라졌다.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눴던 일상까지 전부 다 사라졌다. 내가 이걸 하면 넌 저걸 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넌 저렇게 대답했는데. 손을 뻗으면 늘 거기 있었는데. 이젠 손을 뻗은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진실이 거짓으로 변했다. - p.267

도자기는 결국 깨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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