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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샐리 티스데일 지음, 박미경 옮김 / 비잉(Being)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죽은 자가 삶을 피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살아있는 자라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우리는 ‘삶’만큼이나 ‘죽음’에 대해 사색한다. 대상은 다양하다. 자신, 부모형제, 배우자, 자녀, 반려동물. 내용 또한 다양하다. 죽음이란 무엇인지, 언제 죽고 싶은지, 어떻게 죽을 것인지, 죽은 후 어떻게 될 것 같은지. 대부분 그 사색의 종착역은 ‘그렇다면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을 뭉뚱그리면 ‘죽음의 정의에 대한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철학인 이상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이 된다. 개인에게 머물 뿐 절대적일 수는 없다. 죽음의 가치는 남들의 생각에 달려 있지 않다. 내 죽음은 오로지 내 소관이며, 내 죽음의 가치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p.77) 그렇기에 이 글은 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읽으며 고찰한 나만의 죽음 철학이다.
왜 죽느냐는 원초적 의문을 탐색하는 과정은 종교나 과학,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설사 만족할 만한 답을 찾더라도 대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탐색 과정을 뭐라고 부르든, 죽음의 이유에 대한 탐색은 각자가 수행해야 하는 과업이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타인의 임종 자리에서 강요해선 안 된다. 세상의 풍파는 함께 겪을지라도 빠져나가는 길은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 p.135
※죽음을 오독(誤讀)하다
나에게 있어 죽음은 ‘숨이 멎는 순간’이다. 더 이상 산 사람에게 관여할 수 없고 몸의 처리만 남은 상태. 육신도 정신도 소멸하며 무(無)로 변환되는 상태. ‘좋은 죽음’은 임종을 맞이했을 때 지나온 인생에 미련이나 후회가 남아서는 안 된다. 남더라도 스스로 털어내야 한다. 삶에 대한 집착을 주변 사람에게 보이지 말아야 하며 가능한 한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어렵겠지만 해내는 것이 인간으로서 마지막 도리이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나와 연관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면 좋겠고, 나 역시 죽음이 도래했을 때 이러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죽음을 잘못 읽고 있었다. 오로지 철학적 측면에서만 바라봤다. 생각 내에서만 맴돌았으며 ‘현상’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임종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내 눈에는 그저 괴로워 보이고 겪기 싫고 안쓰럽게 여겨졌다. 건방지게도 전생(全生)으로써의 죽음이 아니라 일면으로써의 죽음으로 판단했다.
※죽어감
좋은 죽음을 규정하기보다는 죽음을 둘러싼 실상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게 낫다. - p.64
이 책의 부제는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이다. 나에게는 정말 실질적 조언으로 다가왔다. 단 한시도 깊이 떠올리지 않았던 ‘죽어감’에 대해 관점을 돌리도록 도와주었다.
생애는 두 가지 선이 평행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선’. 다른 하나는 우리와 같은 속도로 그어지는 ‘죽음의 선’. 인간은 삶과 죽음을 나란히 두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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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삶의 선이나 죽음의 선이 기울어 교점이 생기면 죽음을 맞이한다. 그 과정에서 기울어진 선을 나는 ‘죽어감의 선’이라고 이름 지었다. 각도가 넓어질수록, 길이가 길어질수록 죽어가는 시간은 늘어난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은 이가 급격히 쇠약해지며 보호자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누가 되었든 힘든 시간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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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힘겨운 과정을 견뎌내려면 현상을 바라보는 확실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죽음과 죽어감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느냐 부정적으로 바라보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가치관의 문제는 언제나 실상을 빗나가기 쉽다. 인생의 앞날을 모르듯 그 끝의 앞날 또한 모르는 법이다. 우리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p.96) 하지만 현상으로서 죽음과 죽어감은 다르다. 실질적인 공부를 한다면 당사자도 보호자도 조금이라도 더 후회 없는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이에게 배려를
우리는 그날을 가능한 한 늦추고 싶어 한다. 엄마나 아빠가 ‘기계에 의지한 채’ 살아 있기를 바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우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다들 우리에게 얼른 결정하라고 다그치지만 우리는 결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 결정을 내려본 경험이 전혀 없다.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 p.175
죽음을 거부하고 어떻게든 살아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지만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가능성이 없는데도 가능성을 요구하거나 가능성이 있는데도 가능성을 거절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내가 이런 상황에 빠졌다면 대혼란이 올 것만 같다. 코로 튜브를 꽂아 영양분을 계속 주입하며 강제로 생이 연장되면서 죽어가는 이는 갈증을 호소하고 불편함을 호소하고 괴로움을 호소한다. 바라보는 보호자도 그 모습에 괴로워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저자의 의견에 백번 동의했다. 당사자를 존중하라. 보호자는 중용과 프라이버시, 침묵과 웃음 등 일상생활에서 놓칠 수 있는 온갖 일들의 옹호자요, 죽어가는 사람의 요구를 들어줄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p.98) 죽어가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 이야기를 경청하고 처리하기 힘들어하는 일들을 해줘야 한다. 혼자 있고 싶다면 때론 혼자만의 시간을, 함께 있고 싶다면 같이 잠드는 일도 좋다. 죽음은 자연스럽게 찾아올 것이므로 가능한 한 당사자가 괴롭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
보호자가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죽어가는 사람의 갈증 호소일 듯하다. 돌이켜보면 나의 친할머니께서도 임종 직전 매 순간 갈증을 호소하셨다. 그때마다 고모들은 요양원 간호사를 불러 물을 마시게 해도 되냐 물었지만, 그들은 솜에 적셔 입술에 축여줄 뿐이었다. 나는 단순히 일반인처럼 마실 수 없어 그렇게 하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양원 간호사들은 죽어가는 이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처방했던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임종을 앞둔 환자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아야 오히려 더 편안하다. 그들도 때로는 갈증을 느끼지만, 물이나 음료가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한다.(p.167) 알면서도 물 적신 솜을 할머니의 입술에 묻혔던 까닭은 보호자들에 대한 배려였다. 죽어가는 사람은 오히려 물을 마시지 않아야 더 편안해 질 수 있다. 수분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나의 반성, 그리고 결심
독서 후, 나는 한 가지 후회가 생겼다, 친할머니의 죽음과 관련해서. 당신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다. 병세가 악화되어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까지 교회와 관련된 일은 빼놓지 않고 다니셨다. 언제나 독서대에 성경을 펼쳐 놓으시고 읽으시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일어나셨을 때, 잠드시기 전, 매 식사 전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셨다. 그러나 나는 종교를 싫어해서 당신의 신실함에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할머니를 따라 종교를 가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는 게 아니다. 지금도 종교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내가 진정으로 후회하는 행동은 언제나 침상에 누워만 계신 할머니께 성경을 읽어드리지 못한 부분이다. 부끄럽게도 당신을 찾아뵈어 옛이야기를 하면 듣기 싫어하는 몸을 배배 꼬며 억지로 듣는 척했다. 그 잠깐의 시간을 같이 있기가 힘들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만약 내가 할머니의 죽어감으로 돌아간다면 나도 공부해볼 겸 성경을 낭독해볼 텐데, 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면 성경에 대한 할머니의 견해도 들어볼 수 있었을 것이고, 내 지식의 지평도 조금은 더 넓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런 후회를 안고 다른 죽어감을 마주하게 된다면, 또는 내가 죽어감의 선에 올라서게 된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그들의 요구를 탐색하고 내 요구 또한 명징하게 드러낼 것이다. 죽어가는 동안만큼 시간이 소중해질 수 있을까. 나의 직감은 없으리라 단정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대로,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대로 온 에너지를 쏟아부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고민은 중요하다. 죽어감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다. 그들 모두가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면 그 죽어감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 될 때,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무슨 말이 필요치 않다. 환자는 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p.204)
죽음을 숙고하는 것은 실제로 저항을 숙고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죽을 준비가 될까? 우리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두려워한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그 두려움을 오래, 아주 오래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외면했던 진실, 즉 우리 모두 미래의 시신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 - p.60
죽음을 정독하려면 죽음에만 매몰되어선 안 된다. 죽어감 역시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육신이 영원히 멈추는 그 순간까지 사색은 멈출 수 없다. 삶에 대한 고민을 살아있을 때 한다고 죽음과 죽어감의 고민을 죽었을 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을 여기저기 권하려고 한다. 철학적인 고민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현상에 관한 고찰은 보편적인 영역이니까.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 언제 올지도 모른다. 어떻게 맞이할지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누구나 예약된 시신이라는 사실이다. 정말 시신이 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된 행운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내가 감동한 문학적인 문장들
죽음은 모빌을 움직이게 하는 바람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바람이 살살 불어오면 모빌 조각이 하나 움직인다. 조각 하나가 움직이면 연쇄적으로 다른 조각도 차례로 움직이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바람이 다 지나간 뒤에도 모빌은 한동안 더 돌아가다 서서히 멈춘다. - p.160
일본어 ‘조오지(じょうじ)’는 항상 존재하는 것, 혹은 변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말을 ‘영원히 변치 않는 것(everlasting)’이라고 옮기고 싶다. 이 단어의 이미지는 흔히 달(moon)로 그려진다. 밤마다 달라지는 달이 어떻게 영원히 변치 않을 수 있을까? 밤마다 달라지는데도 달은 늘 달이다. 끊임없이 변하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찾아오는 죽음처럼. - p.176
애통(grief)은 바로 ‘어, 뭐지?’ 하면서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상태이다.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 사라졌다.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눴던 일상까지 전부 다 사라졌다. 내가 이걸 하면 넌 저걸 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넌 저렇게 대답했는데. 손을 뻗으면 늘 거기 있었는데. 이젠 손을 뻗은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진실이 거짓으로 변했다. - p.267
도자기는 결국 깨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 p.292
죽음은 모빌을 움직이게 하는 바람처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바람이 살살 불어오면 모빌 조각이 하나 움직인다. 조각 하나가 움직이면 연쇄적으로 다른 조각도 차례로 움직이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바람이 다 지나간 뒤에도 모빌은 한동안 더 돌아가다 서서히 멈춘다. - p.160
일본어 ‘조오지(じょうじ)’는 항상 존재하는 것, 혹은 변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말을 ‘영원히 변치 않는 것(everlasting)’이라고 옮기고 싶다. 이 단어의 이미지는 흔히 달(moon)로 그려진다. 밤마다 달라지는 달이 어떻게 영원히 변치 않을 수 있을까? 밤마다 달라지는데도 달은 늘 달이다. 끊임없이 변하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찾아오는 죽음처럼. - p.176
애통(grief)은 바로 ‘어, 뭐지?’ 하면서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상태이다.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 사라졌다.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눴던 일상까지 전부 다 사라졌다. 내가 이걸 하면 넌 저걸 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넌 저렇게 대답했는데. 손을 뻗으면 늘 거기 있었는데. 이젠 손을 뻗은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진실이 거짓으로 변했다. - p.267
도자기는 결국 깨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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