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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평점 :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왜 살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딱 떨어지는 대답은 하지 못한다. 대신 자신 있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아직 방황 중입니다!”
2018년 7월 22일부터 2019년 1월 31일까지. 하루 16시간씩 게임에 빠져 지냈던 날들이다. 약 6개월 동안 책 한 글자 들여다보지 않았고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오롯이 게임만 했다. 중독끈(?)이 짧아 게임중독자였다고 고백하기엔 현역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인다. 그 언저리에서 빙빙 돌았다고 해야겠다. (그래도 당시 게임 내의 엔드 컨텐츠를 거의 다 이뤘다.)
어디선가 한심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삶을 왜 살았는가 하면 ‘살아야 하는 목적은 모르겠고 살고는 싶었는데 그때 나를 살리는 것은 게임이었다.’ 굉장히 단순하고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그런 경험을 가지고 정유정 작가의 『진이, 지니』를 보니 아직 고민 중인 내 방황에 얼마간 길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주인공은 셋이다. 젊은 부랑자 김민주와 영장류 사육사 이진이, 그리고 보노보 지니. 진이는 화재가 난 불법 사육장에서 구조대를 치고 도망간 지니를 구한다 돌아가던 길에 사고를 당하고 지니의 몸에 진이의 영혼이 들어간다. 사고 현장 근처 산골짜기 정자에서 노숙하던 민주와 우연히 맞닥뜨리면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사흘간의 여정을 그린다.
※각자 삶에 대한 방식: 민주
나는 그따위로 살지 않았다. 시험에 떨어졌다는 건 결과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근거는 아니었다. 빈둥대는 걸로 보여도 묵묵히 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뭘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할 일의 대부분을 차지하긴 했지만. - p.37
민주는 자신의 의지대로 성장하지 않았다. 초중학교는 교육청에서, 고등학교는 중학교 성적이, 대학은 수능성적이 일러주는 곳으로 다녔다. 대학 졸업 후에는 아버지가 원한 언론사, 어머니가 바란 대기업, 차선책이라던 공기업까지 다 떨어지고 공무원 시험마저 3년째 낙방했다. 아버지에게서 개자식이나 간장 종지라는 말을 들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어도 애물단지 취급을 받은 민주는 나아갈 방향을 잃었다. 참다못한 가족이 그에게 집에서 나가주길 요구했다. 집을 떠나 고시텔 생활을 하다가 그마저도 방세를 낼 수 없게 되자 부랑자 생활을 하던 끝에 ‘무곡’으로 향했다. 무곡의 망아산을 올라 도착한 영장류센터에서 민주는 이진이를 처음 본다. 그녀에 대한 첫느낌은 ‘다정한 그녀’였다. 이 감정이 남아 보노보에 빙의된 진이를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비록 처음에는 돈을 요구했지만). 살고는 싶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민주에게 진이는 목적을 제공해주었다.
고른 물건들을 쟁반에 담고 카운터로 향하자 간장 종지가 재잘대기 시작했다. 괜한 일로 신세 망치지 마.
안다. 멈춰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일단 시작하면 돌이키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비루하나마 사회적 궤도 안을 맴돌던 내 삶이 완전히 전복되리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 끈질기게 울리는 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동어반복적이고, 자기증폭적인 소리였다.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야. - p.271
※각자 삶에 대한 방식: 진이
모퉁이를 하나 돌면 지금보다 나은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나는 철석같이 믿었다. 그 믿음은 내 삶을 지탱해온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금 가장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바로 신앙을 버리는 짓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자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 p.303
진이는 앞만 보고 살아왔다. 삶이란 길이 여러 모퉁이를 꺾어야 한다면, 그녀는 모퉁이 너머를 미리 추측하지 않았다. 낙관적인 결론이 있으리라 여기며 굳건히 걸었다. 빚을 남기고 죽은 아버지 대신 홀로 진이를 강하게 키운 어머니가 가르친 방식이었다.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 전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살아 있는 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 p.293
그래서 죽음에 가까운 사고를 겪으면서도 그녀는 지니 안에 있으면서도 살기 위해 바둥거렸다. 민주에게 무리하면서까지 자신의 본체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한 이유였다. 하지만 지니의 기억을 훑으며, 그것도 자신이 킨샤사에서 못 본 척 도망친 밀렵된 보노보가 지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죽어가는 자신이 살아 있는 지니의 삶에 침범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침입자 주제에 살고 싶다는 욕망이 간절한 것에 대해서.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진이는 지니에게 삶을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각자 삶에 대한 방식: 나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언젠가 죽는다’라는 명제 빼곤 정해져 있는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마저도 정확한 시일을 모르니 아주 확실한 미래도 아니다. 이런 태도가 예전에는 이상한 사상을 심어주었다. ‘어차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대충 살아야지’,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을 노려보자’ 같은 중2병 사상. 부끄럽게도 게임 열심히 하던 시기까지 가지고 있었다.
게임 시간을 독서 시간으로 치환하면서부터는 운명을 믿지 않는 태도는 같으나 다른 사상이 심겼다. ‘정해진 것은 없으니 내가 꾸릴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이루었고, 지금의 선택이 나중의 나를 만든다.’ 방황하고 있어도 건강한 삶을 지낸다는 자부심이 있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린 게 어딘가 싶기도 하고.
정유정 작가는 『진이, 지니』를 통해 나에게 ‘일단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위로해주었다. 민주가 박탈감과 무기력을 겪었으면서도 살아 있었기에 진이와 지니를 만났던 것처럼, 진이가 지니를 통해 생명을 유지했기에 죽음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삶의 의미를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의 답을 구가하는 만큼이나 어렵다. 하지만 방향은 확실하다. 살아야 한다. 살아 있어야 한다. 사춘기 때의 혼란도, 대학 시절에 겪은 우울증도, 몇 달 전까지의 게임 중독도 지금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요즘 나의 방황도 살아 있다면 인생의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다른 생각 하나
개인적으로 사는 것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내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것’. 뭐가 낫고 뭐가 별로의 문제는 아니다. 각자의 지향점이 아닐까.
‘살아가는 것’은 세상 흐름에 삶을 맡긴다. 위험이나 두려움에 얽히지 않고 무난함이 목적이다. 보통 평범하게, 라고 말하는 그것. 하지만 발전만큼 어려운 게 유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쉽지 않은 인생이다. ‘살아내는 것’은 극복하는 삶이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의 반대를 극복하고, 기존을 극복한다. 창발성이 필요한 태도라 역시 쉽지 않다. 나는 사실 이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현재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선을 넘어가기 위해 나름의 고군분투를 하고 있다. 이 역시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살아 있는 게 뭐가 어려워?’하겠지만, 그래, 일부한테는 쉬울 수 있겠다. 하지만 민주 같은 입장이라면, 우울증을 겪고 있다면, 나처럼 방황하고 있다면? 지니의 삶을 진이가 훔칠 수 없는 것처럼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폄하하면 안 된다. 그에게 그 삶이 최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든 걸 용인하며 살 수는 없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에야.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폄하하는 부류는 욕먹어도 싸다. 반성하지 않는 무례함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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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하면 서스펜스 스릴러의 몰입도와 문장력이 대표적이다. 그녀의 전작들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이 그랬다(『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는 아직 안 읽어봐서 모르겠다). 이번 소설은 다른 장르다. 띠지에도 나왔듯이 ‘따스하고, 다정하고, 뭉클한’ 내용이다. 그래서 방심했다. 만약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정유정 작가가 감동물이라고? 서스펜스와 스릴은 느낄 수 없겠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 당장 갖다 버려도 좋다. 그녀의 문장력은 이미 장르를 초월했으니까.
지승호 작가와 정유정 작가의 인터뷰집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까지 읽고 나면 그녀의 작품에 대해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 동시에 이런 필력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진이, 지니』 독서는 정유정 작가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P.S – 한기준이 나와서 반가웠다. 『28』을 읽으면 한기준의 태도가 확 이해가 간다. 그러니 그녀의 작품은 전부 읽자.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은 조만간 읽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나는 그따위로 살지 않았다. 시험에 떨어졌다는 건 결과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근거는 아니었다. 빈둥대는 걸로 보여도 묵묵히 내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뭘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할 일의 대부분을 차지하긴 했지만. - p.37 - P37
고른 물건들을 쟁반에 담고 카운터로 향하자 간장 종지가 재잘대기 시작했다. 괜한 일로 신세 망치지 마.
안다. 멈춰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일단 시작하면 돌이키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비루하나마 사회적 궤도 안을 맴돌던 내 삶이 완전히 전복되리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 끈질기게 울리는 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동어반복적이고, 자기증폭적인 소리였다.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야. - p.271 - P271
모퉁이를 하나 돌면 지금보다 나은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나는 철석같이 믿었다. 그 믿음은 내 삶을 지탱해온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금 가장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바로 신앙을 버리는 짓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자 유일한 것이었으므로. - p.303 - P303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 전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살아 있는 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 p.293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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