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한국역사]라고 하면 초등학교 때부터 누구나 지겹도록 공부해왔을 것이다. 무슨 빗살무늬토기니 청동용봉봉래산향로니 뭐니 해서 외울 것은 그렇게 많던지…. 그래서 본인의 경우는 [한국근현대사] 이외에는 한국역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뭐 우리나라가 과거 광개토대왕 시절에 강력‘했었다’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는 것인가? 그런 사실은 현재 대한민국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현재 우리나라가 4대 강국 사이에 끼어서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단지 위안을 받기 위한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실 [민족]이란 개념이 전면에 등장한 것도 19세기 이후이며 우리가 흔히 [한민족]하지만 이 책에서 함석헌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리는 단일민족, 한 핏줄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개념들이 세계화 시대에 따른 [다문화]에 대한 '타자화’로 나타나는 부작용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과연 우리나라 역사가 ‘빛’나는 역사인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우면서 굉장히 불편한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을 만한 것이라고는 쥐꼬리만큼 밖에 없으면서 반만년 역사라고 자랑하는 것이 왜 이렇게 웃기던지…. 또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정말 최악이다. 대체 [위대한 조상님들]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셨는지 이해도 못하겠고 왜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이 고생인가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정의 내린 함석헌 선생님의 정의에 어느 정도는 공감을 하고 있다. 그리고 p.18에서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듯한 때에는 과학의 편을 들어 그것을 살려주고”라는 부분은 요새 생명공학 발전에 따라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상황에서 유용한 충고라고 생각한다. 과거 중세 교회가 절대권력을 소유하고 있을 때 과학의 발전이 더딘 점은 바로 이런 태도가 바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 37과 p.50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와 정통주의에 대한 비판“기독교가 결코 유일의 진리가 아니다”란 말씀도 의미가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와 정통주의에 대해서는 미국의 그 유명한 [원숭이 재판]을 통해 이미 충분히 비웃음을 사게 되었으며 성경을 해석하는 함석헌 선생님의 태도가 참으로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p.240과 p.485에서 종교의 세속화, 권력화와 귀족주의 종교를 비판한 점이나 p.256, p.269에서 조선시대 유교와 이른바 [엘리트]에 대한 비판은 속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p.411에서 천당 가기 전에 이 땅 위에 하늘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라는 주장은 요즘 교회의 목자가 꼭 들어야 할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동감할 수 없는 의견이 존재한다. 일단 p.13의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는 역사철학은 성경밖에 없기 때문이다”는 자신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오만의 극치이며 p.53에서 유물사관을 비판하면서 성경이 역사의 근본이라는 이야기는 동의할 수 없다. 자연현상을 대하듯이 순전히 원인, 결과의 관계로 설명하는 과학적인 사관이 결국 유물사관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의견도 그렇지만 유물사관이 근대 인간을 정신적으로 파산시켜 오늘의 혼란에 이르게 한 큰 원인의 하나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을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해서 예루살렘에 이스라엘을 세워서 하루가 멀다하고 테러가 일어나는 것은 혼란이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성경을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던 중세에 오히려 인간성을 말살한 나머지 학문과 예술, 그리고 과학이 오랜 암흑기를 겪게 만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솔직히 고백하면 글쓴이가 해방 이후 혼란기에 북한에서 많은 고생을 한 나머지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유물사관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간 것일까?

 

 또한 “민족의 기질은 반영구적“(p.85)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책 안에서 분명히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라면서 스스로 이야기 했으면서 민족의 기질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우리의 DNA 속에? 아니면 리처드 도킨스가 주장하는 Meme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는 하느님의 뜻대로”(p.92)라고 주장하는데 앞에서 주장한 것과 종합해보면 일종의 패배주의, 순응주의, 운명주의적 사관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글쓴이의 주장대로 민족의 기질은 반영구적이고 역사가 하느님의 뜻대로 정해져있으면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든 민족의 기질을 바꿀 수 없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에 거스르면 성공하지 못할테니 그냥 고민하지 말고 “Let it be”하면 되지 않을까? 이런 글쓴이의 생각은 p.306에서 당쟁이 민족 성격에 대한 문제라고 주장하는데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한국근현대사 부분에서도 내 생각과 다른 부분이 많이 있다. 일단 p.419에서 글쓴이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6.25전쟁(사실 나는 6.25전쟁보다는 한국전쟁이라고 부르고 싶다.)을 몰랐다는 점은 사실이 아니다. 최소한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현재 사학계의 견해이며 이승만 대통령 또한 김일성처럼 사정이 허락하면 분명 북한을 침략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밝혀진 바이다. 그리고 “남북한의 싸움이라지만 북한이 남한을 칠 까닭이 없고, 남한이 북한을 대적할 까닭도 없다”(p.422)라고 말씀하시는데 일단 6.25 전쟁은 남북한의 싸움이 아니었고 서로 대적할 까닭은 넘쳤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곳곳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과 자본주의에 대한 과도한 찬양이 눈에 띈다. “자본주의 꽃필 대로 활짝 꽃이 피었고, 공산주의는 그 위에 서리를 칠 대로 쳤다”(p.432)는 표현이 대표적인데 이건 함석헌 선생이 해방 직후 북한에서 소련에 의해 구금되는 등 고생을 한 끝에 1947년에 월남하고 1950년에 부산에서 비난생활을 하시면서 이런 생각이 고정관념이 된 것 같은데 이런 것은 앞서서 유물사관을 비판하는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런 점은 역시 함석헌 선생 또한 당시 살았던 사람들로서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생각한다.




 결국 함석헌 선생님의 사관은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한국 역사를 분석하여 [고난의 역사]라는 정의내리고 우리나라가 “뜻”을 잃어버리게 만든 세속화된 유교, 엘리트주의, 당쟁 등 여러 가지 원인을 철저하게 고찰하여 다음 세대의 주인공인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다시 한번 “뜻”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역사는 결국 “성경”, 혹은 “뜻”, 아니면 “알 수 없는 손“에 의해 이어간다는 점을 강조하여 자칫 우리로 하여금 패배주의, 순응주의, 운명주의적 사관을 가지게 만들 위험도 상존한다. 나의 생각으로는 역사를 봄에 있어서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제 3의 힘‘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만 과학적,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사실에 입각하여 역사를 서술하는 편이 더 좋은 역사 서술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어떻게 생각할련지 궁금하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모 에티쿠스 - 윤리적 인간의 탄생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199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반적으로 책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에게 이 책은 내가 소속되어 있는 <독서 클럽>을 통해 거의 '반 강제로' 읽게 된 책이다. 특히, 독서 클럽의 리더되는 분이 이 책의 글쓴이인 [김상봉] 선생님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사실 젊은이의 호기로써 과연 얼마나 대단한 분이길래 이렇게 칭찬을 하실까하는 생각도 있었다. 결국 책을 읽게 된 경로로 거의 '반 강제적'이었고 또 이 책의 글쓴이에 대한 호승심도 있어서 굉장히 전투적이고 비판적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호모 에티쿠스], 즉 윤리적 인간이란 제목을 가지고 서양 철학사를 통해 나타난 [윤리학]의 흐름을 잘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이 원래 강의 내용이었던 것을 묶은 것이라서 일반적인 철학서적과 달리 구어체로 쓰여져 있어 비교적 쉽게 접근이 가능하였다. 앞서서 읽은 칸트 철학에 대한 책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로 이해하기에 별 무리가 없었다. 먼저 이 책은 모든 철학의 시작인 소크라테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소크라테스는 과연 '좋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평소 '좋은 것'에 대해 대충 알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알고 있지는 못한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은 쾌락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영혼, 정신의 온전함이 좋은 것이며 이는 쾌락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온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악은 오직 선에 기생해서만 악일 수 있으며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절망적인 것처럼 보여도 계속되는 것은 선과 정의불씨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는 탁월함(Arete)의 윤리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이것이 그리스 문명, 서양 문명의 힘이며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탁월함에 매혹되기보다는 질투하고 시기하는데 익숙하다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행복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축구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현실주의자였다. 특히 그는 욕망을 채우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 다만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는 일이 중요하며 여러가지 정신의 탁월함(행복) 중 과조적 삶 속에서 의 행복, 즉 정신의 활동의 순수한 사유와 관조의 활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정념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자연에 어긋나고 다만 우리가 정념과 어떤 식으로 관계맺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이에 '중용'(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런 중용의 길을 가기위한 도덕적 판단력을 가르켜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라고 부름으로서 일상의 삶이 도덕적 반성의 현장임을 강조하였다.

 

 이제 유명한 스토아 윤리학과 에피쿠로스 윤리학이 소개된다. 스토아 윤리학은 개인과 전체가 충돌할 때 언제나 전체의 편을 드는 철학이며 전체가 먼저 있고 부분은 오직 전체의 지체로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전체의 힘 앞에서 무기력하게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정신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결국 스토아 윤리학은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정신의 덕이므로 비이성적인 정념의 지배에서 벗어날 것은 요구하였으며 결국 정념 없는 상태 '아파테이아'를 추구하라는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에리쿠로스 윤리학은 개인의 편을 들었던 철학으로 스토아 철학의 정반대편에 위치하였다. 즉, 세상의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것을 권유하는 은둔자를 위한 철학이 되고 말았다. 이는 서로 고통을 주지도 받지도 아는 것을 추구하며 결국 쾌락주의는 개인주의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조건 쾌락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는데 어떤 일이 보다 순수하고 지속적인 쾌락을 얻는데 이바지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것임에 비해 그 자체로서는 쾌락을 주는 일이라도 그것이 순수하고 지속적인 쾌락을 손상시키고 도리어 한때의 코락보다 더 큰 고통을 낳는다면 그것을 피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고통도 불안도 없는 영혼의 절대적 평온함(아타락시아)를 추구할 것을 요구한 철학이었다.

 

 이제 종교적 관점에서 살펴본 윤리학의 대표주자로 아우구스티누스를 소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고대 철학자들은 원칙적으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행복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이성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참된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모든 합리적 설명을 초월하는 근원적 비약으로서의 종교를 강조하였다. 이어서 스피노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선악의 개념을 객관적이고 존재론적인 범주로 보기보다는 인간중심적이고 주관적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그의 철학이 근재성을 띈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근대는 모든 것이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되기 시작한 시대이므로 그의 철학으로부터 근대적 철학이 사작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한편 으로부터 '나'가 철학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렇게 '나'가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근대를 가리켜 주관주의 혹은 반성의 시대라고 특징짓게 되었다. 고대적 윤리학은 객관주의적 윤리학이며 이성 중심의 윤리학인데 비해 18세기부터 더이상 도덕의 문제를 객관적 존재나 이성의 힘을 통해 이해하고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도덕은 어떤 당위에 관계되어 있으며 도덕의 본질 역시 '나'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특히 그는 도덕적 능력을 이성능력과 구별하였으며 이성을 통한 정념의 지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은 선도 악도 분별하지 못하는 가치중립적 능력에 불과하였다. 결국 동정심이랴말로 도덕성의 참된 근거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동정심을 강조한 것은 새로이 등장하는 시민사회에서 사람들이 점점 더 고립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가는 것에 대한 경고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칸트가 등장하는데 글쓴이가 칸트를 전공한 사람이기도 해서 자그만치 3장을 칸트에 할애하고 있다. 칸트 윤리학의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처음으로 도덕적 강제의 본질적 의미를 윤리학의 중심에 놓았다는 데 있었다. 그는 도덕을 행복의 원리를 통해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하였으며 도덕은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칸트는 이런 모든 시도를 배척함으로써 도덕의 순수성을 확보하였으며 동정심은 자동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도덕덕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그는 제한 없이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칸트에 따르면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네가 바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고 주장하였다.

 

 비록 맨 마지막 장에 글쓴이의 윤리관이 잘 나타나 있지만 결국 이를 통해 글쓴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선을 추구하되, 내가 추구하는 선에 도취하여 나 자신의 악덕을 잊어버리지 말 것.

 

내가 행한 크고 작은 악을 늘 기억하여 겸손과 부끄러움을 잃지 말 것.

 

그리하여 선 때문에 도리어 악덕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을 것


 

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밖에 이 책에서 높이 살 점은 외국어를 발음되는 대로 사용한 것이다. 예컨데 파이돈 = 파이드로스, 아테네=아테나이로 적었는데 이는 굉장히 긍정적인 면이다. 원칙적으로 외국어는 발음되는 대로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많은 외국어가 발음과 동떨어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의 이런 노력은 굉장히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윤리학에 대한 입문서로 이 책의 내용과 구성은 굉장히 성공적이다. 게다가 잘 팔리지도 않는 철학서를 이렇게 출판한 [한길사]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요새 과연 '선'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덧붙여 이 책의 글쓴이인 '김상봉'선생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이다. 하지만 한가지 충고하자면 이 책의 근본은 '철학' 서적임을 명심하고 도중에 읽다가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으면 뭔가 생각할 거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 칸트철학과 근대적 주체성의 존재론 한길신인문총서 2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1998년 9월
평점 :
품절


 본인은 중, 고등학교 때부터 [판타지, 무협]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왠만큼 속독과 언어능력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고등학교때에도 수능 모의고사에서 [언어] 부분은 3개 이상 틀린 적이 없었을 정도로 나의 언어능력과 이해력에 많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자기의식과 존재사유-칸트철학과 근대적 주체성의 존재론]이라니? 마치 웹툰 중 하나인 [정글고등학교]에서 나오는 불사조가 읽을 만한 제목의 책 아닌가? 하지만 책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포스'를 무시하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야 말았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처음 100여쪽까지는 거의 4시간에 걸쳐 정독을 하였으나 뒤로 가면 갈수록 난해해지는 내용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선험철학', '존재론'등 생전 처음 보는 생소한 단어 앞에서는 나의 존재는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포기할까 고민하였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책의 '난이도'로 책 읽기를 포기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끝까지 근성으로 다 읽고야 말았다.(참고로 책 '내용'이 거슬려서 책 읽기를 포기한 적은 좀 있다.) 책을 다 읽은 후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과연 이 책에서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 이렇게 나의 '바닥'을 다 보이는 것이 부끄럽지만 이런 물음에 대해 나는 딱 2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1. 이 책은 철학 전공자가 아니면 읽지 말기를 강력히 권한다.

2. 독일 관념론에서 '나'의 존재라는 것이 그동안 큰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이를 최초로 알린 데카르트와 칸트는 위대하다.

딱 이정도가 내가 이 책을 통해 습득한 내용이다.

 

 대체 어떻게 책을 써야 이렇게 어렵게 쓸 수 있을까? 이 책의 글쓴이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글을 쓴 것인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뿐이다. 결국 내 자신이 제대로 '읽지 못한' 책에 대해 어떻게 별을 주고 평가를 할 수 있을까? 이 책에 대한 평가는 각 독자 여러분에게 남기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파우스트>를 인용하면서 나의 생각을 대신할까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조롱하리라는 사실에 익숙해졌어"라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선비 2015-06-29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신께서 이해하지 못하셨다고 이 책이 별 하나를 받을 책은 아닌 겁니다. 철학에 대해 모르시니 이런 글을 쓰신 거겠죠

암향부동 2015-06-29 20:08   좋아요 0 | URL
뭐...제가 철학에 대해서 무지한 것에 대해서는 동감합니다만...꽤나 오래 전 일이라 정확하게 옮기지는 못하겠지만 제가 직접 이 책의 저자인 김상봉 선생님을 만나서 이 책에 대해 물어 봤을 때 ˝이 책은 제가 칸트를 극복하려고 쓴 책이라 전혀 읽으실 필요가 없는 책입니다˝라고 했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글쓴이가 직접 이렇게 말 한 책이기도 하고 어찌되었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의미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별 한 개가 그렇게 박한 평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 진리를 위해 죽다 주니어 클래식 2
안광복 풀어씀 / 사계절 / 200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반적으로 <고전>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딱딱하다', '어렵다', '두껍다'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게다가 가장 딱딱한 '철학' 고전이라니... 솔직히 이 책의 제목만 들었을 때 벌써부터 언제 다 읽을까라는 한숨부터 내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전혀 딱딱하고 두꺼운 책이 아니다. 오히려 230쪽에 불과한 웬만한 시집 두께에 불과하고 안에 쓰인 단어들 또한 풀어쓴 안광복씨의 말을 빌리자면 '중학교 3학년' 수준의 어휘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렇게 양이 적고 단어가 쉬우니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빈약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앞서게 되었다. 게다가 딱딱하고 어려운 '철학'의 고전인데 이렇게 양이 적고 이해하기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원래 이 책은 내가 활동하고 있는 <독서 아카데미>에서 첫번째로 읽을 책으로 선정할 책이다. 처음부터 어려운 책을 선택하면 사람이 질려서 참가 안 할 것이 명약관화하므로 나름 <평범한>, 혹은 <평범하게 보이는> 이 책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얇은(?) 책에는 굉장히 다양한 생각한 것들이 존재한다. 특히 정의로움의 의미, 죽음과 인간다운 삶, 민주주의의 이상과 허상, 비판적 지식인의 삶에 대해 수많은 생각거리와 가르침이 담겨져 있는 좋은 책이다.

 

 일단 가장 먼저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을 소크라테스는 던지고 있다. 옮긴이가 서술한대로 '국민의 뜻은 올바르며 다수의 의견은 정의롭다'는 믿음이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신념이지만 중우정치에 빠져 이 신념이 항상 옳지는 못하다는 것이 소크라테스는 불만이었다. 게다가 당시 아테네 정세가 30인 참주 독재 이후 일어난 쿠테타의 주역과 소크라테스가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므로 스크라테스가 고발된 근본적인 원인이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라고 선동하고 있지 않은지 걱정한 '멜레토스 일당'이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것이라고 옮긴이는 생각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은 강력한 응징을 받아 왔다. 권력을 쥐고 있는 기득자들은 자신의 자리를 보전해주는 체제나 이데올로기를 흔드는 일에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왔다. 우리나라의 지배 관념인 민족주의,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은 이른바 '막걸리 보안법'으로 풍자되는 '국가 보안법'에 의해 강력히 제제를 받았으며 50년도 지나지 않은 과거에 '법'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죄없는 젊은이를 죽인 '법살'이 자행되었었다. 이를 보면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그대로 2000년 정도 후에 나름 민주국가이자 법치국가라는 '대한민국'에서 그래도 재생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아테네''대한민국'이 다른 점은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란 체제와 국가를 반대하면 그것이 바로 죄목이 되어 사람을 죽였지만 아테네는 최소한 이런 논의를 한 것만으로는 사람을 고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죄목으로 '민주주의 전복'이라고 하지 않고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한 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괴상한 죄목으로 법정에 세울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독재정치보다 우월한 정치체제인가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는다. 과거 <은하영웅전설>이라는 SF소설을 보면 그 책의 글쓴이도 나름 이런 고민을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주인공 <양 웬리>가 아버지에게 '왜 사람들은 황제의 등극을 보고 있었을까요?'라고 질문하자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책임지는 것을 싫어한다. 만약 자신에게 자유가 주어져 선택하여 그 선택이 잘못되었을 경우 모든 비난은 자신이 지어야하지만 누군가가 대신 선택해 줄 경우 그 사람만 비난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황제의 등극을 굉장히 반기었다'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이와 같이 사람은 어떤 문제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싫어하고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서 선거 등에서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것이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이다.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는 현존하는 모든 정부는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형태 중 하나에 해당하며 각 형태는 나름대로의 타락한 형태를 지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수정한 '키케로'는 이상적인 국가는 위 세가지 정치체제가 혼합된 혼합정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는 '민주정'이 세 가지 형태 중 최악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이후 혼란한 로마 정치나 키케로 자신 또한 귀족 출신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당연한 주장이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점점 타락한 형태로 변하고 있는 듯 하다. 결국 후에 폴리스 국가로서의 끝을 맞이하고 귀족정과 왕정의 단계를 거처서 다시 현재의 민주정으로 바뀌었지만 과연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이 잘 맞아 들어갈지는 좀 더 지켜볼 문제일 듯 하다.

 

 이 외에 90년대에 들어서 이런 '중의정치'에 대한 대안으로 이른바 <심의민주주의>라는 것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즉, 어떤 의사결정에 앞서서 토론회나 청문회릍 통해 이런 민주주의의 단점을 보완해 나가자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심의민주주의는 인터넷 문명의 발달로 인해 좀 더 현실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과거에는 토론회나 국회에서 청문회를 하여도 TV에서 방영해주지 않으면 좀처럼 알 수 없었으나 얼마전 <쇠고기 청문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다음이나 네이버 등을 통해서 집 안에서 각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심의민주주의에도 단점이 존재한다. 토론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익보다는 공익을 우선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입장에서 인기에 영합하는 주장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결국 이런 문제를 전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시민 의식>의 고양 밖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약한 논증을 강하게 한다'는 고소 내용을 논박한다. 이런 스크라테스에 대한 비판은 현재 우리나라의 변호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변호사의 경우 저런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형법은 증거보전 등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룰 수 있는 '검사'를 강자로 생각하고 상대적 약자인 '피고인'을 보호하기 위해 변호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보다는 피고인을 위해 변호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이런 '검사''변호인'의 논쟁 속에서 <실체적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고정의 구현이라는 형법의 이상과 피고인 보호라는 인권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결론으로 치달을 수록 '정의로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위해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죽음을 당당하게 맞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직 정의가 무엇인지 자세히 모르지만 조만간에 거의 모든 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교재로 사용하는 <롤스>'정의론'을 통해 나의 생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을 위해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많은 교훈을 주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틀리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남아서 <등애>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자신의 이상신념이 진실이라고 어떻게 단언하겠는가? 오히려 이런 이상과 신념을 주입하는 사람들은 순교자가 아닌 경우가 많다. 예컨데 왜 후세인은 순교자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끝까지 구구한 생명을 보전하려고 애썼을까? 그리고 자살폭탄테러를 지시하는 사람들은 왜 자신이 직접 뛰어들지 않는가? 오히려 지도자급은 뒤에서 물러서서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다시 한번 예를 들지만 <은하영웅전설>에서도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많은 목숨이 사라져도 지도자인 트류니히트는 오히려 제국편에 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던가? 이런 모습은 동맹군 라프의 약혼녀이자 반전론자인 제시카가 트류니히트의 선거 유세장에서 한 대화에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결국 나의 생각은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책은 '아무도 읽지 않는' <고전>이지만 양도 적고 쉽게 읽히는 책이고 비록 얇은 책이지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게다가 옮긴이가 깔끔하게 번역하고 곳곳에 해설을 해주고 있어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의 진리나무 - 아마추어 철학자가 진짜 철학자다!
안광복 지음 / 궁리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사람마다 틀리겠지만 일반적으로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머릿말>이다. 머릿말은 글쓴이와 독자가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머릿말만 제대로 읽어도 책의 절반은 소화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머릿말을 통해 글쓴이가 얼마나 책을 쓰는데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였으며 독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래서 본인은 책을 읽을 때 머릿말을 읽어보고 상투적인 머릿말이나 귀찮다는 듯한 느낌이 드는 책은 아예 집어 보지도 않는다. 글쓴이와 독자가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을 성의없이 쓴 책이 과연 다른 부분이라고 안 그럴까? 이런 책을 볼 시간에는 차라리 다른 책을 보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시간을 보전하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머릿말>을 보면 글쓴이의 진실한 감정이 담겨 있는 듯 하다. 한창 인문계의 위기가 다가왔을 때 인문계, 그것도 가장 돈이 안된다는 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으로서의 고민과 현실과 타협하여 중동고 교사로 부임하면서 <전업 철학자>가 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철학과 대학원 입학 준비를 하면서 비록 전업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아마추어 철학자가 진짜 철학자"라는 것을 깨닫고 학생과의 상호소통을 통해 스스로를 <임상 철학자>로 재탄생했다고 담담히 소회하고 있다. 그런 그가 하나의 <진리나무>, 즉 철학의 조그마한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고 철학초보자로 하여금 '생각함의 씨앗'을 뿌리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현학적인 내용부터 시사적인 내용, 어쩌면 현실에서 금기시되는 주제(예컨데 순결의 의무는 왜 중요한가?)까지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다. 또한 각 마당 마지막에 <생각의 곁가지>라는 것으로 한두가지 문제를, <거름이 되는 책>을 통해서 이 문제에 대한 책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이런 점이 이 책의 가치를 굉장히 올려주고 있다. 단순히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다른 문제와 책을 소개함으로써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려주는 것이 바로 글쓴이가 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의 씨앗>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있다. 일단 먼저 이 책의 글들은 <동아일보> 이지논술 섹션에 연재되던 것들도 있다. 그러다보니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은근히 보수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런 점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것에서 느낄 수 있는데 글쓴이는 미국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자살폭탄테러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왜 그들이 자살폭탄테러에 나설 수 밖에 없는지 반성하지 않는 '비판'은 오직 '비난'에 불과할 뿐이다. 이 외에도 박정희나 새만금 간척 등에서 글쓴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각 주제마다 <중용>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점은 높게 사지만 그러다보니 장, 단점이 비교적 확실한 문제에 있어서도 <양비론>에 빠지고 있다. 물론 양비론이 무조건 배척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했어'라는 식의 양비론은 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이런 점은 이른바 '지식인''인터넷 문화'를 다루는 부분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글쓴이 <안광복>씨가 쓴 책 중에서는 가장 수작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실질적으로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는 기존에 출판했던 책을 이름만 바꿔서 낸 책에 불과하고 이 책은 글쓴이가 많이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보이고 있다. 게다가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에서 눈을 거슬리게 했던 오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근본적인 생각을 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어렵게만 느껴졌던 철학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는 것이 어떨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