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드무비 > '빌어먹을'이 입에 붙다
생사불명 야샤르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여기 내 몫의 주민등록증을 가지는 것과 입에 풀칠 정도만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얻는 것이
일생의 소원인 사내가 있다.
빌어먹을, 아무리 살기 힘든 세상이라지만 그 정도의 소원은 너무 약소하지 않은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미스 터키와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형국인 야샤르의 일생은 오로지 주민등록증을 얻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빌어먹을,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취학통지서를 받고, 학교에 가고, 졸업하고, 군대에도 갔다오고,
취직도 하고, 몇푼 모아 결혼하고, 집을 사든 빌리고, 아이 낳아 호적에 올리고 할 게 아닌가.
시시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 게 인생 아닌가?

그런데 공립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러 아버지와 동사무소에 갔더니
담당직원 왈, 죽은 사람에게 어떻게 주민등록증을 발급해 주느냐는 것이다.
호적대장에는 야샤르가  1915년 무슨무슨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공무원들은 호적대장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야샤르 부자의 해명과 간청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딴짓만 한다.

야샤르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찾아가본 모든 관청의 공무원들은 손톱을 깎거나
귀를 후비거나 동료와 시시덕대면서도 바쁘다고, 자신은 담당이 아니라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준다.
야샤르를 따라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비지땀에 범벅이 되어 방을 나서는데
빌어먹을, 속에 천불이 났다.

얼마 전 어마어마한 공적 자금을 쏟아부은 모 은행의 은행장 연봉이 십몇 억이라는 기사를 보고
분통이 터졌는데, 야샤르가 주민등록증을 얻기 위해 굽신거리며 만나는 대부분의 공무원들과
그의 약점을 이용해 사기만 치고 줄행랑을 놓는 인간들을 보고 있자니  거물이든 피라미든
그 부류의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든다.

책이 나오자마자 사놓고, 또 몇몇 분의 리뷰를 아주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어쩐지 이 책을 덥석 집어들 수가 없었다.
주민등록증 하나를 얻기 위한 고군분투기라니 어쩐지 가슴이 답답했던 것이다.

그런데 터키의 국민작가라는 아지즈 네신의 입심, 정말 대단하다.
어떤 비참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날 잡아잡숴 주!' 하는 듯한 저 야샤르의 
멀뚱멀뚱한 얼굴 표정과 능청이라니!
예를 들어 호적대장 담당 공무원이 "야샤르는 죽은 걸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자
"아이고, 아버지, 제가 죽었대요.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어요? 저 대단한 공무원 아자씨가
그렇게 말하잖아요."
하는 식.

주인공 야샤르뿐만이 아니다.
지나가는 행인 역할 정도의 등장인물 입에서 나오는 대사도 주옥같다.

"이보게, 야샤르, 너무 신경쓰지 말게나. 신은 문 하나를 닫으면 다른 문을 열어주신다네."
"하지만 형님, 교도소 문 이외에 제게 열린 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감방에서 가장 나이 많은 죄수가 말했다.
"아니지. 정신병원 문도 열렸었잖아."(253쪽)

빌어먹을, 세상의 진창에서 오물덩이처럼 구르다 마지막으로 감옥에 가게 된 야샤르,
그곳에서 밤마다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로 풀어내는데 이야기 솜씨가 어찌나 구수한지
바야흐로 인기절정이다.
저 유명한 세헤라자드의 천일야화와 못 견줄 것도 없다.
하나같이 꾀죄죄하고 엉뚱하고 폭소를 자아내는 야샤르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그 인물들은 이 요지경 세상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들이다.

밤마다 야샤르를 둘러싸고 이야기를 듣는 철창 동지들의 면면 또한 얼마나 개성적이고 화려한지
독자들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화장수를 감쪽같이 보드카로 만드는 밀주제조기, 꽁초를 수집하여 담배를 말아 파는 사내,
깡통을 두들겨 펴 화로를 만드는 이, 죄수들에게 헐값에산 빵을 씹어 그 반죽을
제공하는 밀가루 반죽기,  그 반죽으로 여자 나체 등 못 만드는 게 없는 조각가까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대목은 야샤르가 감옥에 가기 전
자신의 여자를 구워삶는 장면.

그녀의 로망인 로마파리에서 그림엽서를 쓰는 밀월여행을,  근사한 예물을, 피로연을, 고급아파트를
어떻게 포기시키는지 궁금한 분들은 야샤르에게서 한수 배우시길.
(빌어먹을, 꼴에 남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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