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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소설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소설의 구조에 차용되었지만 리얼리즘 분야에서도 환상적 리얼리즘은 앞으로 대단히 독특하고 매력적이며 가능성이 많은 서사양식이 될 것이다(개인적인 추측). 별 다른 줄거리 없이 매끈한 문장에만 탐닉하는 일부 한국작가들이 떠오르고 인류 혹은 인간의 정체성에 관해 질문하는 본문의 내용과 달리 문학과 작가란 무엇인가에 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준 점에서 이 책은 고맙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면서 벌어지는 윤리와 가치관의 실종. 그 앞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묻는 이 작품은 독자를 고민하게 만든다. 또 다른 계급의 생성, 폭력, 강간, 살인, 기아에 직면한 인간들의 삶. 이것은 눈이 먼 후, 인류의 낯익지만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인류는 이미 눈이 멀어 있음을,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 비극들이 볼 수는 있지만 볼 수 없는 지금의 현실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상기시켜준다. 끔찍한 전쟁과 기아와 살육은 여전히 진행중임으로.
소설 속에선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들은 불특정 대다수이다. 그 대다수는 나와 당신이 될 수 있고 우리라는 공동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라 지칭할 수 없는 바닥까지 추락한다. 역설적으로 말해 눈 먼 인류가 겪어왔고 앞으로 겪어갈 일이다. 고귀한 존엄성, 희생과 연대라는 숭고함에 반해 파괴와 약탈과 지배의 야만적인 습성의 면모를 갖춘 인간 혹은 인류. 찬탄과 회의라는 미묘한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수작이다.
*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작가의 이름만 얼핏 들었을 땐 일본 작가인 줄만 알았다. 책장을 들춰보고서야 흡! 소리가 절로 나왔다. 유럽인. 게다 내가 살아있을 땐 가볼 수도 없을 것만 같아서 오히려 무관해 보이는 머나먼 포르투갈 사람이라니. 이렇게 또 지중해의 한 나라에 의미를 품게 되는구나..세계지도 안에 빨간 똥골배기..헛헛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