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nemuko > 가볍게 읽고 싶은 무거운 이야기
처녀치마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늘 책을 좋아하긴 했다. 어릴 땐 글자로 된 무언가를 읽는 자체가 좋았고, 좀 자라서는 나를 대신해서 울고 웃어주는 소설 속 인물 들이 꼭 내 얘기 같아서 빠져 들었다. 대학교 다닐 몇년 간은 정말로 소설만 읽었는데, 도서관의 한국 소설 코너에서 ㄱ 부터 읽기 시작하여 ㅎ의 '한'까지 읽었으니 정말 어지간한 건 다 읽었다고 생각된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한국 소설, 특히 여자들이 써내는 한국 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다.  

지쳤다... 그네들이 늘어 놓는 지난 이야기들, 우울하기 짝이 없어 읽는 이까지 무력감에 사로 잡히게 만들어 버리는 그녀들에게 더 이상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힘들어 졌다. 여자는 맨날 유부남을 만나 그의 아이를 혼자 몰래 지우고, 남들과는 다른 시간 속에 살며 도무지 현실과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 이공간의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질렸던 모양이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난 못 만날 뻔 했다. 우연히 읽으면서도 처음 몇 장은 그저 그런 비슷비슷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헌데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르다. 현실과의 접점이 좀 더 넓은 느낌이랄까... 소재는 얼추 비슷하지만,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움이 덜 해서 머리 속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물론 반복되고 비슷한 설정 자체가 오히려 작가의 발목을 붙잡게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아직은 선선하다.

<12월 31일>을 제일 재밌게 읽었다.

'이 년 전 선배의 결혼식에서 그녀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둘째를 가져 배가 불러 있었고 나는 황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허둥지둥 찾아든 예식장 근처 지하 레스토랑에선 낯모르는 신혼부부의 피로연이 왁자지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출입구 대기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그녀의 배부른 모습을 오래 곱씹었다. 결혼한 그녀와는 오늘이 두 번째였다.'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 재밌게 느껴졌다면, 역시 소설이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읽혀지는 모양이다. 작가는 원하지 않겠지만 누군가는 이 글들 역시 공지영의 것 같은 '80년대 학번의 후줄근한 후일담' 정도로 읽을 수도 있는 거고, 나처럼 입담 좋은 작가의 연애 소설처럼 읽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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