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길에서 그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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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1 - 아나톨리아 횡단 ㅣ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임수현 옮김 / 효형출판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999년 봄 그의 걷기여행은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출발한다. 30여년간 사회, 정치부 기자로 치열한 인생길을 걸어온 그가 정년퇴임을 하고 61세에 순전히 걷는 일로만 긴 여행을 시작한다. 그가 선택한 걷기의 여행지도는 이스탄불과 중국의 시안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따라 걷는 행위다. 비단길이라, 아랍의 대상들이 낙타를 동원하여 동.서양의 교류를 꾀한 인류문명의 역사길을 더듬어가는 역사의 비단길을 걸어서 횡단하는 일이라니 이 처연한 비단길은 그렇지만 마냥 온화한 길만은 아니다. 그가 걸어서 찾아가는 비단길의 최종 종착지에 이르기까지 그는 역사학자로서가 아닌 역사 속의 개체로서 존재할 뿐이다. 보기만 해도 책의 두께에 기가 질리고 마는 이 책의 주인공의 정신을 높이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학자로서의 실크로드 탐험은 방대한 지식과 현학적인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야사를 그것도 육체의 경험으로 붓 끝 한마디마다 절렬하게 써내려가는 여행지의 생생한 이야기는 분명히 전문적인 학자로서의 냄새와는 다르게 풍기기 마련인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몸과 영혼의 일치'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이미 인생의 뒤안길을 숱하게 걸어 온 이 노장은 4년동안 11,000 km를 걸었다. 이 여행이 4년이나 걸린 이유는 도보여행이라는 특성이 따르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에 사막을 통과하는 일이란 아무래도 노장에게는 무리였다. 그래도 초심을 잃지 않는 저자는 15Kg 배낭을 메고 부정확 지도 그리고 GPS를 매일 30~60Km를 강행군했다. 실크로드의 단 1km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반듯한 대로를 버리고 시골길을 선택하며 걷는다. 여행지의 안락함을 즐기는 현대의 우리가 걷는 여행을 테마로 선택한다는 사실부터가 범상한 일이 아니다. 거기에 돌부리에 치이는 시골마을길을 우회한다는 일은 곧 실크로드의 정신을 체험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때문이었다. 여행지의 풍습과 전통과 언어와 인종을 만나는 일은 저자에게 단순히 옛길의 흔적을 쫓는 여행의 의미만은 아니다. 그는 무엇을 찾으려고 했을까? 동.서양의 교차로에 있는 이슬람 국가인 터키라는 이름이 주는 신비함과 원시성과 혼혈성과 문명의 흔적을 만나면서 저자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이런 여행을 왜 강행한 것일까? " 이전에도 몇 차례나 있었던 일이지만, 험난한 길을 갈 때면 나를 탐색하고 나 자신과 겨루기 위해서 나를 잃어 간다는 생각을 종종하곤 했다. 내가 떠나기 전에 친구 조제가 이번 여행이 "자신과 벌이는 일 대 일 싸움" 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거라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바로 지금이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어리석은 내기도 있는 법이다."-(378쪽) 그렇다. 세상에는 예고된 답을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그것을 향한 도전장을 제시하는 어리석은 일이 분명 있다. 그러나 그것은 때때로 어리석다는 단어 대신에 풍요로운 경험이라는 짧은 문장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풍요로운 여행의 경험은 폭신한 조건대신에 혹독한 상황이 도처에 독을 품은 도마뱀처럼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도와줄 인적이 보이지 않는 들판의 돌틈에서 혀를 낼름거리며 덤빌 자세를 보이고 있는 여행지의 위험 앞에서 식은땀 나는 난관을 어이 뚫고 나갈 것인가? 아니, 이 절명의 상황을 뒤로하고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조금만 더, 좀 더 멀리, 내 안에 억누를 수 없는 원초적인 충동이라도 있는 것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스스로에게 무척 비판적이다. 나 자신이 그 희생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나를 걷고 또 걷게 만드는 이 격렬한 욕망은 대체 무엇일까? 얼마나 버티는지 시험해보려는 그리고 기록을 깨보겠다는 어쭙잖은 허영일까? 아니면 오만? 의지?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20여 년 전 도보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이 느낌만큼은 잘 알고 있다." 당신 같으면 어이할 것인가.
쉬지 않고 걷고, 지친 아침에 일어나 다시 걸으며 실크로드길을 따라 사막을 횡단하는 이방인의 도보 여행기는 제목 부터가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잡기에도 만만치 않은 두께를 지닌 길고 험난하며 다양한 터키의 이야기는 책 말미에 간단하게 터키라는 국가에 관한 지식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어 우리가 알고 있는 터키를 재차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해 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짧은 정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는 인종부터 언어와 문명, 정치적 상황까지 소개한 것은 좋은 컨셉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항공회사에서 제공하는 한 장짜리 티켓용 안내장보다 못하다는 허술한 생각때문이다. 그렇다고 본문보다 더 나은 책말미의 활용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왕 정보를 제공해 줄거라면 좀 더 성의를 보여 주던가 아니면 아예 수록하지 않는것이 더 낫겠다. 저자의 여행기록보다 여행을 시도한 정신을 더 높이 사는 이 책의 좋은 점은 번역이 잘 되었다는 것인데, 기자 출신이라는 이력을 보기전에 저자의 아름다운 필체를 번역가가 무리없이 옮겨 준 점은 1개월 동안 445페이지를 읽어야 했던 어려움을 그나마 감소시켜준 공로라고 할 수 있겠다. 세간에서 엄청난 유명세를 떨친 이 책에 내가 별점을 세개를 준 부분에 번역이 차지하는 것이 한 개다. 나머지는 내용면에서 유익하다는 것, 그리고 남은 하나는 저자의 도보 탐험 정신을 높이 사는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의 시리즈인 2권은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익하고 여행정신을 높이 사는 책이긴 했어도 오래 두고 볼 책은 아니라는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