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의 <슈퍼 에이트 시절>을 봤다. 사실 이 날 다른 영화를 예매했었다. <여덟 개의 산>이라는 영화를 예매했었다. 왜냐 나도 속세를 떠나 대자연 속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곱씹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이 아니 에르노가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자 러닝타임 60분의 다큐라서 패스했던 이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당연히 개봉 안 할 거 아닌가. 이번에 놓치면 OTT에 서비스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지도. 아니 OTT에 업데이트될 날이 오긴 할까??? 영화 1편을 바꿈으로 인해서 이후 볼 다른 영화들의 상영시간과 상영극장도 다 바꿔야 해서 기존 예매작들을 수수료를 지불하고 모두 취소하고, 상영이 겹쳐서 아쉬웠던 다른 영화들로 새로 예매했다.


<사랑의 불꽃>이라는 화산 연구가 부부의 다큐를 봤다. 인간보다는 대자연을 더 좋아하는(인간을 싫어한다고 정확히 언급됨) 대자연 중에서 화산과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만나서 사랑에 빠져서 같은 것을 연구하는 삶이 경이로웠다. 둘은 '저것이 백아절현이구나.'싶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이해하기에 둘 중 하나가 먼저 죽는 상황을 제일 피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그들은 화산 폭발 현장에서 같은 날 동시에 사망하게 된다.  화산 폭발 직전의 현장에 가서 그 순간을 연구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의미인 두 사람이었기에 이 죽음은 해피엔딩!! 특히 모리스(남편)는 단조롭게 오래 사는 것보다는 열정적으로 짧게 사는 것을 선택하겠다는 게 삶의 신조이고 그 신조대로 살다가 죽었다. 



<미래의 범죄들>을 봤다. 레아 세이두와 크리스틴 스튜어드가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볼 이유는 충분! 무엇보다 고통에 최적화된 인간의 몸을 싫어하는 나인지라 아니 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육체적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미래의 인류가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 몸에게 하는 짓들은 외과수술적인 절개다. 자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까? 이들은 마취도 없이 배를 가르고 장기를 적출하는 정도가 되어야 쾌감을 느끼는 미래 인류다. 기억에 남는 대사는 사울의 '내가 이런 행위예술을 하는 이유는 인간의 육체가 무용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이다. 나 역시 200%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사울이 무용하다고 한 이유는 고통(물리적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몸은 무용하다는 것이리라. 반대로 나는 고통을 느껴야만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인간 육체의 열등함에 빡이 쳐서, 또한 너무 빠른 노화, 죽을병에 걸리면 그대로 죽어야 하는. 육체의 나약함이 가소로워서 육체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제 정도나 가야 나와 생각의 교집합을 가진 인간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면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든다. 내 주변 사람들은 이 세 영화의 여집합에 옹기종기 모여서 중산층의 화목한 가정을, 남들같이 살면서 무병장수하기를, 안티에이징의 비단결 같은 피부를 추구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여집합에 존재하는 인간들에게 별 흥미도 관심도 못 느낀다. 


<슈퍼 에이트 시절>은 영화라기보다는 아니 에르노가 읽어주는 책 같다. 기억에 남는 대사(구절?)는 '책 한 권을 썼다고 해서 인생이 바뀌는 것은 아니였다'였다. 그외는 스마트폰으로 쉽게 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2022년에 그들이 70년대에 찍은 영상들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능을 보면서 내가 늘 아쉬워하는 것은 영화 <스모크>적인 체험을 더 이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필름 카메라 시절에는 매일 같은 곳을 사진 찍어서 현상하고 간직하는 것은 하나의 낭만 혹은 삶의 의지가 될 수 있겠지만, 아이폰 14 시절의 나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것. 차라리 안 찍는 것이 더 의미가 될 정도다!!!!!! 다시 말하면 '슈퍼 에이트 시절'은 가능하지만 '아이폰 14 시절'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



p.s.

<그,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을 봤다. 프랑스 영화였고 프랑스적인 피시함이 한 소절 있었다. 난 그게 그 영화에도 언급되듯이 나르시시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나르시시즘이 한 명의 청소년을 구원하여 어엿한 직장인으로 만들었고, 그 청소년은 그걸 늘 감사히 여기며 살아 가고 있다는 게 영화의 마지막이라는 점이 특히 더 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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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

어제는 양조위와 같은 공간에서 60분을 함께 했다. 그와의 뜨거운 60분이었다. 가운데 자리 7번째 줄에서 보았다. 그와 나 사이 약 15미터. 화양연화 시절의 양조위를 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는 1962년생 다운 얼굴 주름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내 앞에 앉아 있었다. 팔자주름을 성형하지 않은 그 모습에 더 반해버렸지 뭐야. 


사실 좀 피곤했다. 그래서 양조위고 뭐고 다 귀찮고 그냥 집에 가서 침대에 드러눕고만 싶었다. 하지만 지인이 오전부터 잡아둔 자리가 너무 좋았고 또 세상만사 흥미를 잃은 사람으로 살다 죽으면 자기혐오에 빠질 거 같아서 아이폰 1차 사전 예매를 하던 기분을 떠올리면서 BIFF 행사장으로 향했다. 

(여기까지는 10월 8일에 쓴 것. 양조위는 10월 7일 BIFF에서 오픈토크를 했다.)



<반지>

반지를 구매하던 당일도 내 손가락에 맞는 반지는 국내에 딱 1개 있었다. 늘 그렇듯 제일 작은 사이즈여서 수요가 없으니 재고도 몇 개 없다. 결국 그 반지는 그 매장을 방문한 누군가가 사가버려서 나는 해외 오더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한 달 넘게 기다렸다. 왜 이런 사치품에서 영혼의 위로를 받느냐고 누군가 묻는다고 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그냥 주얼리를 좋아하는 인간일 뿐이라는 말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없다. 누군가의 외식, 누군가의 술, 누군가의 담배, 누군가의 여행, 누군가의 반려동물(혹은 자녀)보다 나는 금과 다이아몬드에서 더 큰 위로를 받는 인간일 뿐. 


<아이폰>

아이폰11을 사전예약으로 구매한지도 만3년. 이번에도 사전예약으로 14를 샀다. 11때 황망했던 것은 페이스ID를 3달 정도 체험하고 나자 코로나19가 발생해서 마스크를 쓰는 바람에 페이스ID보다는 비밀번호 입력을 더 많이 했다는 것이다. 이번 14는 마스크착용 페이스ID 등록이 가능해서 일단 좋다. AOD 기능은 맘에 들고, 다이나믹 아일랜드는 아직 잘 모르겠다. 늘 기본사양만 구매하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므로)프로를 샀다. 남은 생애에는 뭐든 최상품만 구매할 거다. 


<외로움>

책읽아웃에 이다혜가 나와서 듣고 또 들었다. <퇴근길의 마음>에 홀딱 반해버렸다. 책 내용, 편집 상태, 책의 크기와 무게 모든 것에서 완벽하다. 이다혜는 외로움은 '내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타인이 몰라줄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했다. 이런 감정이라면 나는 거의 늘 느끼고 살지만, 그것을 외로움이라기보단 '나는 special of one이야.'라고 여기며 살아오고 있다. 애초에 타인이 나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해 줄거라는 기대가 0. 그러니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 


내가 이 서재에 쓰는 잡문들도 누군가의 공감이나 이해를 바라고 쓰는 게 아니다. 안락사를 바라는 나, 태어난 게 일생 최대의 실수라고 생각하는 나, 위선을 극혐 하는 나, 수백만 원짜리 반지 구매 얘기를 하는 나에게 공감이 가능하다고? 공감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굳이 감추지 않을 뿐. 타인의 공감과 이해보다는 나 자신의 개성이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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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급한 일에 쫓기느라 중요한 일을 등한시한다. (중략) 우리를 급하게 잡아채던 것들이 의미를 잃고, 우리는 갑자기 혼자 남겨진다. 그게 바로 고통이다. 고통은 인간을 혼자가 되게 만든다. 어떤 고통도 타인과 나눌 수 없다. 나누고자 노력할 수 있고, 타인 역시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 있지만, 우리는 모두 고통 속에서 혼자일뿐이다.(중략)신경 쓰지 않으면 알람 소리에만 반응하며 살게 된다. 

<퇴근길의 마음 / 이다혜>


연휴 마지막 날이다. 나는 지난 금요일부터 쉬었으니 4일째 쉬는 중이다. 잠시 병원에 간 건 말고는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어제는 하루 종일 졸려서 하루 종일 침대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 했다. 현실도피성 수면. 나는 정말 많이 잔다. 그건 아마도 체력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사실 제대로 먹지 않는다. 먹기 싫다. 애인의 잘 쉬고 있냐는 카톡에도 답을 할 에너지가 없고, 밥을 챙겨 먹을 에너지도 없다. 대체로 눈은 감고 있고 귀를 열고 있다. 암막으로 빛을 차단한 어두운 방에서 침대에 누워 팟캐스트를 듣거나 이미 본 드라마를 듣는다. 그러다 선잠이 들고 그러다 또 깬다. 


일에서 번아웃이 오면 쉬면 된다지만, 사는 것 자체에 번아웃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내 체력 상태를 알기 때문에 일을 몰아서 하는 편이 아니다. 매일 조금씩 분산시켜서 처리한다. 매번 일을 시작할 때 시동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서 일이 끝날 때 두세 번 되새김해서 뇌의 한 구석에 고정시켜 놓는다. 또한 반드시 계획을 세워서 일을 처리한다. 계획이 어긋날 때는 이미 지난 일이더라도 계획표를 수정하고 미래와 과거와 현재를 순서를 수정해서 계획과 수행이 일치하게 만들어 둔다. 회사의 그 누구도 이걸 하지 않지만 나는 한다. 계획을 잘 세워두면 수행은 거들뿐인 것. 


회사일은 돌발상황이 거의 없다. 1년치 계획을 세우고 1달치 계획을 세우고 일주일치 계획을 세우고 하루치 계획을 세우고 일년 12개월 53주 365일을 소거해나가면 된다. 


그런데 사는 건, 인생은?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때그때 창의력을 발휘해서 살아내야만 한다. 생로병사의 레벨업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인생계획을 수정할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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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틴을 세우고 그 안에서 성실한 반복을 이루어내는 일은 언제나 매력적이지만 루틴을 고수한다고 해서 목표를 자동 달성하게 되지는 않는다. 쳇바퀴를 잘 돌리는 능력과 쳇바퀴 밖에서 탈출구를 찾는 능력은 각기 다른 성질의 것이며 루틴이 견고할수록 때로는 그 밖에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습관도 습관이다. 견고한 테두리다.

<퇴근길의 마음 / 이다혜>



죽을 때 죽더라도 최신형 아이폰은 써보고 죽자 싶어서 아이폰14 사전 예약을 했다. 졸려서 23시 50분에 알람 맞춰두고 잤다. 인기 컬러는 1분 만에 품절. BIFF 예매는 실패했지만 아이폰14 예약은 성공했다. 적어도 10월 7일까지는 소멸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지. 지금 쓰는 폰은 아이폰11인데 이번에는 14프로를 골랐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좋은 것만 쓰고 죽자는 생각에서. 죽음이 사전 예약된 생활을 살지 않았다면 1차 사전 예약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느긋하게 미루다가 3차 사전 예약 정도 하거나 그것도 귀찮으면 내년에 15 사지 뭐 했을 것이다.


요즘의 나는 미루는 법이 없다. 기회가 오면 미루지 않고 즉시즉시 해치워버린다. 두려움과 걱정이 많이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는 무모함과 뭐 죽기밖에 더 하겠어하는 생각들로 채워졌다. 내일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살았던(아닌가? 아무 생각이 없었을지도. 아님 말고) 고대인의 삶의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이쯤 되니 왜 로미와 줄리엣이 목숨을 건 사랑을 했었는지, 왜 그리 명예를 건 결투를 해댔는지 알 것 같다. 그걸 하지 않아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생의 여정인데, 어차피 죽을 거라고 사랑과 명예를 위해 죽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했을 터. 


지금은 방탄소년단 노래를 듣고 있다. 한 번도 의지를 가지고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어제 우연히 다이내믹을 들었는데 좀 즐거워졌었다. 그래서 멜론에서 BTS대표곡으로 만들어둔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중. 좀 즐겁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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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다는 기분을 다시 일으켜보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동력으로 삼아보려고 시도하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지금의 나는 그냥 '한다'는 쪽에 무게를 두려고 애쓴다. 하기로 한 일을 그냥 한다. 기분을 앞세워도 안 되고, 억지로 나를 강제해서도 안 된다.

<퇴근길의 마음 / 이다혜>



요즘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은 '아,,, 또 하루가 시작되어버렸어. 아...피곤해. 그래, 오늘 하루만 딱 더 살아보자.......' 이다. 애인이랑 같이 자고 일어나는 아침에도 "아... 형벌 같은 하루가 또 주어졌구나. 또 살아내야 해. 와 미치겠다." 라고 아침부터 중얼거리면 애인은 "오..우... 저 염세주의자...아침부터 또 시작이다. 그냥 더 자. 살기 싫다면서 알람 맞춰 놓고 1분 만에 일어나는 게 너무 언행불일치 ㅋㅋㅋㅋㅋㅋ" 라고 대꾸해준다. 


오늘 아침에는 애인의 출근 준비를 기다리면서 어제 배송 온 <퇴근길의 마음>을 펼쳤다. 한번도 작가 싸인본에 감흥이 있었던 적이 없는데 하늘색 만연필 잉크로 써진 '당신과 나의 단단한 진심 다혜리'를 보는 데 눈물이 핑 돌았다. <퇴근길의 마음>이라는 제목을 나는 내 마음대로 '이 세상을 떠날 때의 마음' 같은 걸로 변주해서 오늘 출근 가방에 넣고 틈이 생길 때마다 읽었다.


소멸을 바란다. 애인이 나를 심쿵하게 해 줘도, 동생이 "언니 없으면 나는 못 사니까, 안락사할 거면 나도 데려가."라고 안락사 따위 생각도 말라는 말을 저런 식의 애교 가득한 반어법을 활용해서 해도, 환갑이 넘은 노모가 산해진미를 해줘도, 나는 내가 넘어내어야 할 하루치의 허들을 생각하면 너무 피곤하고 귀찮아서 그냥 소멸하고 싶어 진다. 내가 말하는 소멸이란 실종 같은 소멸이 아니라 애초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소멸이다.


고 싶다는 기분을 다시 일으켜보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동력으로 삼아보려고 시도하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지금의 나는 그냥 '다'는 쪽에 무게를 두려고 애쓴다. 오늘 딱 하루만 더 기로 한 이상 그냥 다. 기분을 앞세워도 안 되고, 억지로 나를 강제해서도 안 된다.



ps. 2022 BIFF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영화는 <플랜 75>였다. 7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안락사를 지원하는 것에 관한 일본 영화다. 매진 안 될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매진. 예매 실패. 나 말고도 안락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거라고 긍정적 해석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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