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네루다가 칠레의 민족시인인 이유는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아서가 아니다. 그가 칠레의 민족 시인인 이유는 대부분의 칠레 국민의 집에 네루다의 시집이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그의 시를 읽고, 같이 혁명을 도모하고, 네루다는 대선 후보까지 나갔 ㅎ). 같은 영토, 같은 언어,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서점으로 달려가서 그 작가의 책을 구매하고, 그 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아는 작가라면 그가 K문학인 것.
밴쿠버 올림픽 당시 김연아의 경기를 기억한다. 그 때 올림픽 중계를 보지 않은 한국인이 있었을까? 김연아에게 김연아는 김연아일뿐 하는 사람은 김연아의 성취를 무시하는 것이다. 김연아는 K다. 마찬가지로 한강도 K다.
국뽕. 개나소나아무나에게 국뽕이 차오르는 줄 아나?
K마크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저명한 대학교수 등이 새겨주는 게 아니다. K마크는 문화에서 소외된 사람들 마저도 그 장르 혹은 그 사람을 응원하고 그의 성취에 기뻐할 때 새겨지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K문화 카나리아 혹은 리트머스 시험지는 내 아버지다. 내 아버지는 평생에 읽은 책이 이승만 평전과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우리 집안 족보 단 3권이다. 그런 아버지가 한강의 책을 사오라고 했다면 그게 K문학인 것이다. 내 아버지가 아는 문화계 사람이 진짜 유명인이다. 손흥민은 몰라도 김연아는 알고, 황석영은 몰라도 한강은 안다. 또한 오징어 게임의 이정재를 알고, 아카데미 작품상의 봉준호를 안다. 그래서 김연아, 한강, 이정재, 봉준호는 나에게 K마크 문화인이다.
아버지는 평생 극장에서 영화를 안 봤지만 딱 3편만은 보러 갔다. 천만 넘었다는 이유로. <왕의 남자> <국제 시장> <서울의 봄> 나에게 이 세 편은 천만 오브 천만 영화다.
난 한국이 별로지만, 김연아가 금메달 땄을 때, 봉준호가 아카데미 상 받았을 때, 윤여정이 아카데미 상 받았을 때만큼은 내가 한국인이어서 좋았다. 내가 받은 상은 아니었지만, 그 충격적인 감격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한강의 노벨상 역시도 마찬가지다. 노벨문학상 최다보유국 프랑스인이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의 기쁨을 알겠냐고요!!!!!!!!!!!! 문화적 식민주의 그런 거 아니다. 테니스에 1도 관심 없고 올림픽에 1도 관심 없지만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노박 조코비치가 테니스 금메달 따면서 오열한 것을 보면서 나도 인간적으로 뭉클했다. 그런 감정인 것이다. 노박 조코비치가 한국인이었다면 더 뭉글했겠지!
가을햇쌀밥은 100% 백미로 먹어야 제맛인데,
그런데 여기에 현미잡곡햇쌀밥을 먹으라는 조언을 하시면... ㅜㅜ
한강이 K문학이고요, 김연아는 K스포츠고요, 봉준호는 K무비라고요. 그리고 오징어게임은 K드라마라고요.
이들이 오롯이 한강, 김연아, 봉준호, 오징어게임으로 존재하려면
10명의 한강, 10명의 김연아, 10명의 봉준호가 더 있으면 가능.
다시 말하지만 카뮈가 카뮈인 이유는 프랑스 노벨문학상 최다 보유국이어서 그런 것.
ps. 이 글은 서재 이웃의 '한강을 K문학에 가두지 말자'(정희진, 한겨레)라는 글을 읽고 쓴 것. 정희진의 글에서 케이 문학은 예술을 국민주의에 봉사시키는 행위다(물론 국가는 개인의 성취에 숟가락을 얹고 개인의 이름을 지우고 케이라고 부르고 이용해 먹겠지만)라고 하는데, 나는 이 말엔 갸웃갸웃이다. 관료제가 예술을 통제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그게 불가능하지 않나? 흥행, 인기, 대중성은 그 누구도 통제 못하는 거 아닌가. 내가 말하는 K마크는 학계의 저명한 몇 사람의 인정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인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