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또다시 스멀스멀 타인을 비하하고 낮춰서 상대적으로 내 입지를 높이고, 내 자아를 오냐오냐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아래는 나의 나약한 자아를 지켜내고자 하는 ‘비겁한 생각’들의 나열이다.

1) 헤르미온느 병: 너무 열심히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자격지심이다!!

나는 비겁하게도 내가 열심히 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열심히 하는 사람을 낮추는 ‘헤르미온느 병’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더 잘할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대충 한다. 대충 해도 되는 일에 에너지 쓰고 싶지 않다. 매사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건 일의 경중에 대한 분별이 없는 애송이 때나 하는 건데, 그걸 경력자가 되어서도 하고 있다면 그건 실력이 없다는 것일 뿐. 일의 경중에 대한 분별이 없기 때문에 번아웃에 쉽게 걸리는 것이다.

2)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려는 것도 강박(정신병)이고 자격지심(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청결한 상태 뒤로 숨긴다는 점에서)이다.

청소광 브라이언을 보면서 오히려 반감이 들어서 집을 더 더럽게 해 두고 있다. 특히 서재 바닥에 반정리존(담요 깔아 둠)을 만들어서 잡동사니들을 던져두고 있다. 그 잡동사니들의 언덕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청소광 브라이언 같은 인간은 내 집에 한쪽 발끝도 못 넣게 결계를 쳐 두었다!

과거에 나는 청소와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은 부지런하고 자기 관리는 잘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청소와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 중의 다수는 다른 일이 하기 싫어서(다른 일을 못해서, 다른 일에 자신이 없어서) 청소와 정리정돈으로 못난 자신을 감추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청소와 정리정돈 상태로 사람을 평가하는 짓거리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솝우화 중 동물들의 깃털 경연대회 속 까마귀 같은 인간들이 의외로 정말 많다.

3) 부자가 되려는 욕망은 골룸의 절대 반지일 뿐이다.

백화점 vip 멤버십이 끝나기 전에 발레파킹 서비스를 한 번이라도 더 받겠다는 신념으로 남동생은 주말이면 아기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유아차는 무려 스토케 디럭스(맞나?? 휴대는 불편하지만 승차감은 최고인 거대 유아차)이지만 이걸 내리고 펴고 하는 걸 발레파킹 직원이 다 해준다고 했다. 또한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있기에 엘리베이터는 늘 여유롭다고 했다. vip 멤버십이 끝나고 그냥 아무나로 백화점 나들이를 딱 1번 하고 지옥 체험을 한 후 부자에 대한 욕망이 불타 올랐다고 했다. 주차하는 데만 한 시간 걸렸고, 유아차를 펴고 접고를 스스로 해야 했고, 무엇보다 엘리베이터가 늘 꽉 차 있어서 타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고 했다.

이것이 제부가 말한 “부자가 되면 살기가 편하다.”라는 말의 의미였던 걸까? 제부와 이 대화를 했던 날로 거슬로 올라가보자. 그 날은 여동생의 제왕절개 수술이 있는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주에 의사들은 파업을 시작했고, 병원 정문은 파업 상황을 취재하기 위한 기자들로 넘쳐났다. ‘아, 이것이 서울대학교병원의 명성이구나! 과연 한국 최고의 의대, 서울대학교의대구나!!’ 하는 비아냥이 저절로 생겼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서울대병원 의사의 실력 인정!!! 여동생은 일반 산부인과에서 제왕절개 한 산모들이 공유하는 수술 후유증이 거의 없었다. 노산임에도 불구하고 회복이 매우 빨랐다. 여동생은 아기 낳다가 응급 상황에서 응급수술 지연으로 인해 사망하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어서 모든 불편(일반 산부인과에 비해서 고객 서비스는 없고, 비용은 비싸고, 진료대기 시간도 긴)을 감수하고 꾸역꾸역 서울대병원을 다니는 고행을 수행했다.

수 억대 연봉자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나로서는 “의사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그들의 연봉은 그저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는 거 아니냐? 그렇게 개원해 봤자 주 6일 의원에 메여 있는 그런 인생 아닌가? 난 어리석다고 본다.”라고 했더니 제부는 “그래도 부자가 되면 살기 편하다.”라고 답했다.

인생의 아이러니는 돈을 버는 행위를 하는 동안은 돈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돈을 쓰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매년 백화점 vip가 되는 사람의 집 안을 생각해보자. 다 쓰지도 못할 물건들이 집 안 구석구석 쌓여 있겠지. 신지 않는 신발, 메지 않는 가방, 입지 않는 옷, 음식을 담아 두지 않는 그릇, 사용하지 않는 전자제품 등등. 내 입장에서는 돈이 있어도 매년 발레파킹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vip가 되는 건 무리. 왜냐 내 여가를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쇼핑한 물건들을 집 안에 정리하는데 다 쓸 수 없기 때문.

p.s.

이런 패배주의(??)를 반자본주의로 포장한 나이지만, 남동생의 아기에게는 스토케에서 제일 비싼 유아차를 선물해 준 훌륭한 고모가 되었고, 여동생의 아기에게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 단 하루도 쉴 수 없는 아빠를 대신 해 보호자(간병인)가 되기 위해 일주일의 휴가를 낸 훌륭한 이모가 되었다.

p.s2. 간병하는 동안 본 영화 <보 is afraid> 동생아 미안하다, 그런 내용인 줄 몰랐다. 그런데 참…갑자기 느닷없이 이 영화가 보고싶어서 어쩔 수 없었으. 내 천성이 그러한가 보다. ㅋㅋㅋㅋㅋ 반출생주의자의 본능 ㅋㅋㅋㅋㅋㅋ 갓 출산을 한 환자들이 가득한 산과 병동에서 <보 is afraid>를 봤다고 하면 이 영화의 감독 아리 에스터가 정말 박장대소하면서 좋아했을 거 같다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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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3-23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미온느 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나도 그거 있어요!! 아 이 병은 기억해 둬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 저 궁금한데 ㅋㅋ 그러니까 낮춰서 보고 있는 그 시점이 그 병에 걸린 상태인 것이죠?

먼데이 2024-03-23 20:28   좋아요 0 | URL
헤르미온느 병: 자신이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 사실 따지고 보면 헤르미온느가 지나치게 열심히 마법 공부를 하는 이유는 혼자 머글이기 때문이잖아요.

낮춰서 본 다는 건 제가 열심히 하기 싫어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쯧쯧, 헤르미온느 병 걸려가지고..‘ 하는 식으로 그들의 노력을 헤르미온느 병이라고 낮추어 부른다는 말인데, 저 문장을 읽어보니 수식이 애매하긴 해요.

소설 <상실의 시대>에 보면 지나치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흠이 되는 사립학교에 다니는 나오코가 있죠.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집 안의 배경이 부족하다 뭐 그런...의미 아녔을까 싶어요.

은희경 단편 <타인에게 말걸기>의 주인공이 매사 지나친 캐릭터... 은희경은 이런 캐릭터를 긍정하지 않아요. 전 이 점이 매우 흡족했어요!! 이런 여자로 살지 말자, 응!! 제발!! 이런 심정으로 소설을 쓴 것 같은.

쟝님은 헤르미온느 병이 아니라 나와 같은 안티 헤르미온느인 걸로!!

공쟝쟝 2024-03-23 21:30   좋아요 0 | URL
아 그러니까 저의 이 천재 아님에 대한 슬픈 자각으로 인한 성실의 상태 = 헤르미온느병 인 거죠? ㅋㅋㅋㅋㅋㅋㅋ
그럼 내가 헤르미온느(모범생형 천재)로 진짜 천재인줄 알고 세계 전체를 싸잡아 머글로 만드는 자뻑 상태일때는…(난 그런 내가 좋고 싫가 ㅋㅋㅋㅋ) 이 병은 아닌 거고 ㅋㅋㅋ 이건 라캉병인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