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인생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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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할 수 있지. 빛은 이전의 지점을 향해 출발한 다음 나중에 진로를 수정할 수는 없어. 그런 행위에서 야기된 경로는 가장 빠른 경로가 아니니까. 따라서 빛은 처음부터 모든 계산을 끝마쳐야 해."

나는 마음속으로 이 사실을 곱씹었다.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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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에너지나 가속도처럼 인류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은 모두 주어진 한 시점에서 어떤 물체가 가지는 성질이다. 그리고 이런 성질은 순차적이고 인과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어떤 순간은 다음 순간을 낳고, 원인과 결과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작용'이나 적분에 의해 정의되는 다른 것들처럼 헵타포드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봅으로써 만족시켜야 할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도서관 서가를 훑다가 우연히 빌린 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영화 <듄 2>가 개봉한 김에 생각나서 빌린 거. 아님).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원제 arrival 2017년 2월 개봉)를 처음 본 건 개봉일로부터 약 9개월이 지난 때, 인천->로마행 비행기 안에서였다. 기내 좌석 등받이에 설치된 작은 모니터를 통해서 이 영화를 봤다. 비행기라는  밀폐된 작은 공간에서의 기내 모니터는 상대적으로 매우 거대하게 인식된다는 것을 <드래곤 길들이기>(2010년 5월 개봉, 그해 7월 기내 영화로 있어서 봤다. 나리타->시드니행 비행기)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4D 아이맥스(본 적 없음)를 의심하고 있다. 그게 정말 그렇게 흥미로운 영화감상 경험인가?? 지나치게 매운 것을 맛이라고 할 수 없듯이, 지나치게 많은 오감을 자극하는 영화는 이미 영화가 아니다? 정도의 내 주장...(<듄2>의 상황(배경) 전환이 너무 많아서 영화 진행에 초집중하지 않는다면 제작진이 작정하고 만든 눈요기 거리-모래벌레 스키 장면 같은-만 잔뜩 감상하게 되는 꼴)


영화 <컨택트> 감상에서의 좋은 기억과 함께 <네 인생의 이야기>를 읽어 나갔다. 빛의 굴절에 이런 심오한 과학과 철학이 담겨 있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결과를 정한 후 그 결과를 위해서 모든 행위를 하는 빛이라는 존재와 사랑에 빠졌다(이것을 나의 근본환상으로 삼고 싶다...라고 하면 영화 <듄 2>의 한심한 남부 근본주의자들하고 똑같은 건가?? 언젠가 나타나고야 만다는 구원자에 대한 예언을 맹신하기에 현재의 모든 고난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리석어 보이는 자들... 하지만 그것 말고 무슨 다른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의 최종 목적지, 나의 최종 목적지. 즉 나는 내가 언제 어떻게 죽는지 정확히 알고 싶다. 매사 선계획 후실천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요즘처럼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에 대해서 희망고문 당하느니 그냥 죽는 날짜를 받아 놓고, 속 편하게 살고 싶다.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의 주인공 루이즈 뱅크스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를 자연수로 이해한다. 나에게 나이는 분수에서의 분자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분모를 가지느냐에 따라 값은 달라진다. 나이뿐만이 아니다. 자산 규모나 겉으로 보이는 형식적 행복(?)에 대해서도 나는 각자의 분모를 염두에 둔다. 


배우 윤여정이 75세에 한국최초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았다고 해서, 배우 최민식이 10년 만에 다시 곧 1000만 관객 달성 <파묘>를 찍었다고 해서, 이런 걸 근거로 내가 존버하면서 고진감래 해야 할까?? 김연아나 빌리 아일리쉬 같은 사람도 있는데??? 요한 요한슨은? 지금 이 일기도 요한 요한슨의 <컨택트> ost를 들으면서 쓰고 있다. 커리어의 최고점을 향해 상승하고 있는데 왜 죽음을 택했을까... 약 47년 6개월을 살고 죽음을 선택함. 왜 어떤 사람은 끝없는 영생을 바라고, 어떤 사람은 도무지 죽을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내가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 죽지 않을 거 같은데) 살기를 그만두는 걸까?


어차피 죽을 날이 정해져 있는 거라면 나는 내가 건강 때문에 희생하는 많은 것들을 하지 않고, 특히 운동!!!!!, 읽고 싶은 책이나 죽도록 읽고 싶다, 혹은 영화 감상.



ps. 영화 <듄> 시리즈가 그 어떤 최첨단 기술로 기교를 부린다 해도 영화 <컨택트>(arrival)를 능가하진 못할 것이다. <듄>은 외계 행성인데 너무 지구 같고(가부장제라는 근본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중세도 아니고 걍 고대로마 같은 느낌), <컨택트>는 지구인데 너무 외계. 내가 드니 빌뇌브라면 <듄>보다는 <컨택트>를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할 거 같은데... 하지만 모든 필모에서 고르라고 한다면 ㅋㅋㅋ 당연 <시카리오>지!!!!! 인간은 복수라는 최종 목적지로 나아가는 존재지요 하하하 할 거 같다!!!!! 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빛이라면 쓸데없이 너무 긴 <듄>보다는 80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우주를 녹여낸 <네 인생의 이야기>라는 최소 시간을 택하고 나아갈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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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3-23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컨택트가 더 좋아요! (시카리오도) 그런데 드니 영화를 영화관에서 본건 처음이라 ㅠㅠㅠ 듄2 영화적 체험 너무 압도적!!!
원작 소설 읽어야갰습니다!!! 동생의 정보애 따르면 듄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합니다!!ㅋㅋㅋ 주인공이 안야조이라고 ㅋㅋㅋ

먼데이 2024-03-23 20:49   좋아요 1 | URL
제가 들은 정보로도 듄 1, 2 는 6권 중 1권 이야기라고 해요. 저도 <듄>을 읽지 않았는데, 솔직히 영화로 이야기 전달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하는 의문이 매우 많이 들어요. 그래서 일단 책을 읽어야겠다 싶어 인근 도서관의 상태를 모조리 검색했는데, 예상대로 모두 1권이 대출중(심지어 예약불가) ㅋㅋㅋㅋ 기분 나빠져서 2권부터 내가 대출해 버릴까 하다가 참았음.

전 <왕좌의 게임>도 책으로 먼저 읽었거든요. 선독서 후드라마시청이었는데 책에서 얻은 정보가 없었더라면 많은 장면에서 그 장면의 연출 이유를 알 수 없는 장면이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드라마 시청만으로 이 드라마가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뭘 알고 재미있다고 하걸까 하는 의문이 내내 들었어요. 드라마가 재미없어서 시즌1 정도 존버 하면서 본 거 같아요.

그런데 <듄 3>을 드니 빌뇌브가 할까요? 내가 드니라면 안 할 거 같아요. 1, 2에서 할 만큼 했고 난 이제 다른 영화로 다른 시도를 해볼랍니다 빠이빠이 할 거 같은데... <시카리오>도 1편만 찍고 속편은 안 찍었잖아요 ㅎ

공쟝쟝 2024-03-23 21:36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 이 글, 댓글을 통해 추측하면, 왕좌의 게임은 읽어야하고 ㅋㅋㅋㅋㅋ 그리고 영화 듄은 드니의 듄이며 ㅋㅋ 컨택트역시 테드창의 소설과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 어떤 감독은 그의 세계가 원작의 그것을 넘기도 하죠. 저는 인류세시대와 겹쳐 영화 읽어서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이 다음의 자본과 투자 혹은 업계가 그를 선택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의미에서 최선을 다해 1.2 만든 것 같고요. 관객1은 행복했어요. 정말로.

잉크냄새 2024-03-23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분자로 생각하는 발상이 참신하네요. 결국 1로 수렴하기 위한 삶이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