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지 않는 일이란 이와 같은 집요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 끝에 내린 주체적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한때 그런 선택이 원천 봉쇄되던 시절이 있었다. 과거에는 자식이 없으면 안정된 노후를 기대할 수 없고, 친족집단이 없으면 사회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몰렸으며 자신의 유한한 삶에 영생의 환상을 부여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그러한 시절에 자식이 없으리라는 것은 최대의 저주가 되었다.
이제 국가가 과거 친족집단이 하던 역할을 대신 떠맡게 되었다. 전통보다는 개인의 동의 여부가 규범의 기초가 되었다. 자식의 성취가 아니라 자신의 성취가 인생의 성패를 결정짓게 되었다. 그 와중에 인구가 줄어도 세대 수는 꾸준히 늘어난다. 1인 가구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노후를 자식이 아니라 개인의 저축이나 사회보장제도가 책임지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 최대의 저주는 자식이 없을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라 도저히 감당 못 할 자식을 많이 두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 김영민>
2021년 출생아가 몇 명일까가 하는 게 나의 관심사 중 하나라서 검색을 하다가 유튜브에서 놀라운 댓글이 많은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상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mvAViXQlqek
댓글이 만 개가 넘어서 '아니 무슨 ytn 뉴스에 댓글이 이렇게 많담?' 하면서 호기심에 클릭을 했는데...
사상의 진화를 목격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심장이 두근두근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자식은 있어야지,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하던 인간들만 봐오다가 비록 웹상의 댓글일지언정,
- 애를 위해서 낳지 않는다, 태어나서 아이가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 많다, 내가 희생을 치르는 마지막이었으면 한다.
- 내 유전자를 물려받아 나처럼 힘든 것들을 겪을 아이와 그걸 지켜볼 나를 생각하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낳고 싶지 않다
- 나는 태어난김에 그러저럭 살지만, 이걸 태어날 아이에게 권한고 싶지 않다
-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고통받지도 않았을텐데...
- 낳음당한 피해자 생산하지 말고, 그냥 내 대에서 유전자 소멸시키는 게 지구환경에도 좋다
- 낳으라는 사람들은 부부를 위해서 낳으라고 하지 태어날 자식을 위해서 낳으라고 하지 않는다.
- 뛰어놀아야 할 어린시절을 학원에서 12년 보내고 청춘 즐길 시간엔 군대, 취업준비하느라 10년 가까이 보내고 작은 아파트 하나가 안 구해져서 이리저리 치였던 삶을 아이한테도 또 살게 할까만은... 결과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과정이 너무 고되고 끔찍해서 안되겠구나
이런 걸 읽으니 인류애가 밀려왔다. 그래도 다음 세대가 각성을 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
엄마는 부모가 다 죽고 난 뒤 남편도 자식도 없이 혼자 늙어갈 나를 생각하면 내가 너무 불쌍해서 잠이 안 온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 나는 엄마가 더 불쌍해, 아빠 같은 남자 만나서 고생만 하고 이혼도 못하고 평생 같이 사는 엄마가 더 불쌍해." 라고 답가를 보냈다. 그랬더니 엄마는 자기는 아빠 만나서 사는 게 좋다고 했다. 더 이상한 남편들도 많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긍정하기 위해서 자신의 선택을 긍정하지. 그 긍정의 방법 중 가장 저열하고 손쉬운 게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고 깎아내리는 거야. 그래서 엄마는 엄마의 결혼을 긍정하기 위해서 나의 비혼을 불쌍하게 보는거지. 마찬가지로 나도 내 비혼을 긍정하기 위해서 엄마의 결혼을 불쌍하게 여기고 엄마의 남편을 하찮게 생각하는 거고. 난 사람들이 왜 타인 비하를 하는지 그 심리를 다 알고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엄마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거라면 맘껏 불쌍해 해. 뭐 불쌍한 딸이 되서 엄마의 인생을 합리화해줄 수 있다면 그 정도 효도는 할 수 있지." 라고 엄마가 다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늘어놓고야 말았다. 본인이 살기 위해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시대에 태어난 여자에게 왜 나를 낳았냐고 하는 것도 어리석다는 걸 이제는 깨달았다. 엄마는 자신이 살려고 나를 낳은 거고, 나 역시 내가 살려고 자식을 낳지 않는 거니까. (어떤 사람은 아빠는? 이라고 할 텐데, 나는 번식의 주체는 자궁이 있는 여자라고 보기에 남자가 과연 번식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남자는 번식의 한가지 요소일 수는 있느나 번식의 주체로 여자와 대등한 자격을 가질 수 없다고 본다.)
지금부터 내가 죽는 순간까지 인구가 증가할 일도 없을 것이고, 출생아가 증가할 일도 없을 것이다. 노인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 안락사도 합법화될 것이다. 나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을 하다가 퇴직을 할 거고 퇴직 후에는 저축해 둔 돈으로 검소하게 살다가 괄약근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면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안락사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건강상태를 보면 과연 내게 안락사의 행운이 올까 싶다. 그전에 병사할지도...
나는 내가 받을 연금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없으며, 젊은이들이 노인복지를 줄이고 반드시 안락사법을 합법화 할거라고 200% 믿는다. 내가 내 노후를 위해서 믿는 것이 있다면 안락사이지 부동산이나 주식을 통한 노동없는 수입이 아니다. 내가 이런 심성이기 때문에 번식 자체에 큰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나의 분신 하나를 더 만들어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누리겠다는 그런 욕망이 없다. 굳이 뭘 그렇게 애를 낳아서 애 키우는 행복을 맛보려고 하는건지... 정말 내 취향이 아니다.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서 담백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박지원이 보기에 전쟁, 지진, 홍수, 판데믹, 호환, 마마보다 참담한 재앙이란 바로 담담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다. 다 귀찮아하는 상태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 김영민>
아프면 더 살고 싶어진다고 하던데 왜 나는 이만큼 살았으면 충분하다, 됐다. 라고 생각하는지... 정말 삶에 대한 그 어떤 욕구도 생기지 않는다. 사실 작년에 이미 자연수명이 끝난지라, 지금 살아있는 건 보너스라고 생각하는 편. 실학자 박지원이 이런 나를 봤다면 정말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배우 윤여정을 보면 일단 오래 살아야 기회가 생기지 싶기도 하지만, 뭐 또 꼭 그렇게 상받고 인정 받아야 할 일인지...아카데미에서 상을 받든 안받는 윤여정은 항상 훌륭한 배우인 것을.
"집까지 먼길로 돌아갈까?" 차에 오를 때면 캐럴라인이 말하곤 했다. 그럼 우리는 서둘러 헤어지지 않으려고 서머빌이나 메드퍼드의 혼잡한 길로 접어들었다.
먼길로 돌아갈까? / 게일 콜드웰
운전을 할 때 내가 선호하는 경로는 최단거리가 아닌 운전할 때 기분이 좋은 경로이다. 기분이 좋은 경로란 2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도로 구조상 교통위반이 발생하기 어려울 것과 주변 경치가 좋을 것. 그래서 나는 공원의 식물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공원길로 둘러 다닌다. 천천히 운전하면서 하루치의 자연(?)을 감상한다. 풍경이 멋지다고 생각되는 날에는 블랙박스 영상을 저장해 두기도 한다.
서정이라는 정서가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 <퍼스트 카우>를 보면 서정이 무엇인지, 서정이 삶의 필수요소인 사람이 생존하기에 세상은 얼마나 험난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생존에 서정이 필요없는 사람들은 절대 이 영화를 보지도 않을 것이고 이해도 못할 테지만... 세상이 드라마 <지옥> 같더라도 그 속에서 <퍼스트 카우>의 주인공처럼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소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뒤집힌 도마뱀을 바로 잡아주는 사람.
담백하게 욕심이 없는 처참한 지경에 이른 나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욕심을 부려본다면 서정만을 잃고 싶지 않다. 먼길로 돌아가고, 천천히 걷고, 본 영화를 또 보고, 읽은 책을 다시 펼쳐서 생각을 곱씹고, 잠을 충분히 자고, 질병과 죽음을 삶의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면서 담담히 담백하게 살고 싶다.
ps. 사람이든 동물이든 책이든 예술작품이든 영화든 그 무엇이든 간에 서열화 하는 것에는 서정도, 인간존중도, 생명존중도 없다. 그것은 그저 지옥이다. 가장 잔혹한 지옥이 있다면 모든 것을 서열화하여 우월감과 비참함을 끝없이 느끼게 하는 세상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2021년 한국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