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유리 상자 안에 있는 사람이 괴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출세지향적인 전직 청소기 판매원이 따분해하며 알맹이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프랑켄슈파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라서 오히려 그가 저지른 범죄가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아이히만을 사악한 괴물이라고 한다면 어떤 면에서 그의 범죄를 용서해주는 거야. 그리고 우리 모두 잠재적인 죄를 짓게 되지. 철저하게 사유하지 못한 죄. 슬픈 진실은 선과 악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일 사악한 일을 저지른다는 거야.
철저한 사유의 고통보다 순종의 편안함을 바라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결과에 도달할 수 있죠.
평범성은 '의미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걸 뜻해요.
이번 재판에서 드러난 행위들이 그걸 말해주죠.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 켄 크림슈타인>
쿠데타 공모로 인해 구속되는 자들을 보면서 아이히만, 순종의 편안함 말고는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2024 BIFF에서 전쟁과 쿠데타에 관한 영화 4편(시빌워, 여기 아이들은 같이 놀지 않는다, 쿠데타의 사운드트랙, 사진작가 어니스트 콜)을 봤다(시빌워만 픽션이고, 나머지 3편은 다큐). 남의 일, 다른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영화 감상이 취미인 사람으로 철저히 외부자의 입장에서 봤다. 어느 정도는 '나니까 이런 영화 보는 거야, 나라도 안 보면 누가 이런 영화 보나.' 하는 잘난척 하는 마음도 있었다. 영화 <퍼스트레이디>를 보러 간 이유도 유사하다. 내가 안 보면 누가 보나 하는 마음. 방금 검색해 보니 상영관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2 만명 관람. 와우!
계엄 이후 정치뉴스만 보는 정치충이 되어버렸다. 정치 뉴스뿐인가. 정치 팟캐스트, 정치 유튜브, 정치 관련 쇼츠까지. bgm은 탄핵 노래. 탄핵 플레이리스트를 검색해서 플레이리스트 만들어서 듣고 있다. 뉴스라고는 일기 예보만 보는 나를 이런 정치뉴스 중독자(도파민이 엄청나다)로 만들어버린 윤 씨란 놈. 영화도 시시해졌고(최근 왓챠에 에릭 로메르 영화 10편 넘게 있는데, 언제 사라질지 모름, 사라지기 전에 반복 시청하려고 했는데, 계엄 도파민에 쩔어버린 나의 뇌는 무염 나물 같은 에릭 로메르의 걸작들이 당최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다 ㅠㅠㅠㅠ), <삼체>도 시시해졌다. 계엄은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압도해 버렸다.
탄핵 가결 후 bbc코리아는 국회 앞과 광화문 앞 상황을 비교해 보도했다. 윤 씨 탄핵 가결에 실망한 광화문 사람들의 면면과 광화문을 가득 채운 태극기를 보고 있자니, kpop과 다양한 색의 led 응원봉, 특히 다수의 20대 여성들의 젊음과 화사함이 가득한 국회 앞과 비교되면서 정말 알 수 없는 슬픔과 짠함이 밀려들어 왔다. 해방과 625 전쟁 즈음에 태어나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 시절에 공교육을 받고 노동자가 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온 자들의 인생 엔딩은 광화문 태극기 노인. 광화문 태극기 노인=관심받고 사랑받고 잘 나가고 싶었으나 소외되고 낙오되어 버린 사람들. 그들이 갈 곳은 자신을 낙오시키고 소외시킨 거라고 여겨지는 세력의 반대쪽이라는 것은 자연의 이치.
세상은 급격히 변해서 집회에서 아이돌 응원봉을 드는 시대가 되었는데, 이젠 100년도 더 전이되어 버린 31만세운동처럼 태극기를 든 모습을 비추는 bbc의 뉴스가 그 어떤 영화보다 슬펐다. 광화문에서 태극기를 든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20년 내에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20년 후면 그들의 다수는 85세를 넘긴 나이일 테니.
저승사자는 오전 9시에 찾아온다.
사카키바라 료는 딱 한 번. 그 발자국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처음 들려온 것은 철문을 여는 중저음이었다. 땅이 울리는 것 같은 그 공기의 흔들림이 멎자, 감방 전체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지옥을 향한 문이 열리고, 미동조차 허용되지 않는 완전한 공포가 흘러 들어온 것이다.
<13 계단 / 다카노 가즈아키>
윤 씨가 매일 아침 사형의 공포를 느끼며 살다 죽기를 바란다. 윤 씨는 사형수(사면 절대 안 됨)로서 삶을 마감해야 한다. 사는 내내 아침마다 간수의 발자국의 미세한 차이를 느끼려 애써야 한다. 평소와 같은가? 다른가? 오늘이 형 집행일인가? 오직 사는 내내 그것에만 몰두해서 매 초 두려움과 생존욕구 사이에서 널을 뛰어야 한다(소설 <13 계단> 도입부 참고). 하지만, 정신이상자이기에 의외로 감옥 생활에 잘 적응하여 그 안에서 나름의 천수를 누리다 사형수로서 늙어 죽을지도 모를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