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정작 당사자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죽음이란 결코 찾아오지 않는 미래입니다. 아니 그보다, 죽음이라는 미래는 닥쳐오지만 결코 현재가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바로 이 순간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는 말입니다. 자신의 죽음이라는 미래는 현재화 될 수 없기 때문에 쉽게 추상적인 성격을 띱니다. 그 날짜가 불확정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이 꼭 이 순간이거나 저 순간이어야만 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무기 연기하기 십상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실감하는 것은, 그리고 고뇌 속에서 실감하는 것은, 최후의 미래도 중간의 작은 미래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자신에게 닥쳐오기 만들어졌음을 이해할 때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종말이, 생의 사이사이의 작은 종말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날 자신의 현재가 되리라는 것을 발견할 때입니다.
<죽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 /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1. 홈트
어린이집 원아의 포도송이 100개 채우기 미션처럼 홈트를 수행했을 때마다 달력에 스티커를 붙였다. 이걸 꼬박 24개월 넘게 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여전히 하기 싫다. 처음 홈트를 했을 때는 어떤 영상이 나에게 제일 잘 맞는지, 같은 시간에 가장 많은 운동량을 주는지 몰라서 계속 다른 영상들을 골라가면서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나에게 제일 효과적인 영상을 찾게 되었고, 이제는 매일 그것만 보면서 하고 있다. 같은 영상 속의 같은 동작만 하니까 더 지겹긴 하다. 그래서 두어 달 전부터는 mbc 라디오의 정치뉴스를 들으면서(보면서) 홈트를 하고 있다. 그랬더니 좀 할만했다. 덜 지겹게 느껴졌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폰으로는 정치 뉴스 유튜브를, 10년 전에 사용했던(무려 아이폰6) 폰으로는 홈트영상을 메트로놈처럼 켜두고 운동을 하고 있다.
그랬는데, 어제는 운동이 너무 하기 싫어서 나에게는 시청금지영상인 건강 관련 유튜브를 보면서(들으면서) 운동을 했다. 그만큼 절박했다는 소리다. 왜 운동은 매일 꾸준히 하는데도 주기적으로 권태기가 오는 걸까. 무엇 때문에 나는 이렇게 절박하게 운동을 하는 걸까. 딱히 살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이유는 하나다. 운동을 안 하면 찝찝하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찝찝함 같은 감정이 들기 때문이다. 그 기분이 운동을 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편안함보다 더 싫기 때문에 운동을 하긴 한다.
2. 죽음에 관한 창작물 3편
홈트를 시작했을 즈음, 나의 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홈트를 시작했고, 마침 <죽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이라는 책이 출판되었고 코 앞에 다가온 죽음을 맞이하고자 바로 구입했다. 책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비닐 포장이 되어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포장을 뜯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비닐 포장 그대로 2년 넘게 책장에 꽂아두었다. 책을 구입한 지 24개월이 더 지난 얼마 전에야 비닐 포장을 뜯고 책을 첫 페이지를 읽었다. bgm은 주제 맞춤으로 모차르트의 레퀴엠. 책을 펼친 지 열흘도 더 지난 거 같은데 아직도 프롤로그에서 헤매고 있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같은 말을 끝없이 변주하고만 있다. '죽음이라는 당연한 순리를 왜 인간들은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어떤 불길한 사건으로 여길까요?'라는 말을 오만가지 다른 표현으로 쓰고 있는데, 너무 지나친 TMI 아닌가 싶기도.
죽음에 관한 영화 두 편을 봤다.
소마이 신지 <여름정원>(1994년작, 2024 4K 리마스터링으로 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1999년작, 필름 상영으로 봄)
두 영화 모두 같은 주제다. '죽음'을 관음 하고 싶은 욕망.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이 조만간 죽을 노인을 몰래 훔쳐본다. 죽음의 순간을 목격하고 싶어서.
세 개의 죽음에 관한 창작물 중에서 우승작은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이다. 이 영화는 죽음을 관음 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천천히 집요하게 보여준다. 장켈레비치가 프롤로그에서 끝없이 변주하고 있는 '인간은 결코 죽음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음은 타인의 불상사로만 받아들인다'를 118분짜리 영화로 보여준다.
3. 방탕, 유흥 그리고 부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면
나에게도 방탕(?)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어차피 죽어야 하는데 굳이 왜 태어났을까'하는 생각을 하염없이 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배달 음식, 탄산음료, 액상과당 같은 거 아예 먹지 않는다. 유튜브 등도 잘 안 본다(영화 볼 시간도 없는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불면증 없다. 두통 없다(머리가 아픈 게 어떤 건지 잘 모름). 매일 아침에 모닝홈트 한다(이 점이 가장 미친 거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꾸준히 영화를 본다. 꾸준히 책을 읽는다. 꾸준히 일기를 쓴다. 꾸준히 출퇴근을 하고 있다(이것이 두 번째로 미친 거 같다). 해야 할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하고 싶은 것을 조금 하고, 잘 시간이 되면 잔다.
스마트폰 중독과 관련된 건강 영상을 보면 생기는 의문: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밤에 잠이 저절로 오지. 숏폼 영상과 불면이 무슨 상관이지? 잠이 오는데 숏폼 영상을 어떻게 봐?
시사 프로에서 위고비(이게 뭔지 이제야 알았다) 방송을 보고 든 의문: 배가 부르면 그만 먹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살아오는 동안 음식 자체가 맛있어서, 계속 먹고 싶어서 먹은 적이 없다.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인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많이 먹어본 적 자체가 없어서 내가 어떤 체질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먹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크게 느껴본 적이 없다. 나는 인간 위고비인가ㅋㅋㅋ
흥청망청 충동적으로 돈을 쓰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의류비에 돈을 얼마나 쓰지는, 식비에 돈을 얼마나 쓰는지 알고 있다. 의류비의 경우 내가 정한 금액 안에서 명품 한 개를 사는 것일 뿐. 세일하는 것, 싼 것 여러 개를 충동적으로 구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아 내가 저렇게 살지 않아서 괜히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저런 생활을 하면서 그걸 즐길 수 있는 기질이어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최고지 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학생 때 친구들이 나의 시험공부계획표를 보여달라고 한 적이 많다. 보여주면 다들 "이걸 어떻게 지켜?"라고 물었다. 그러면 나는 "그냥 내가 짠 계획대로 공부를 하면 되지. 이대로 해야 시험범위를 다 공부할 수 있어. 벼락치기하면 힘들잖아(공부할 체력 없음 ㅠ). 나는 자야 돼." 계획대로 공부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덕질(유흥)'을 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마음이 힘들 땐 윤동주의 <쉽게 씌여진 시>를 패러디해서(늙은 교수 대신 선생님 별명을 넣는다던지) 말하곤 했다. HOT의 we are the future를 불렀어야 했는데, 윤동주의 <쉽게 씌여진 시>가 훨씬 더 내 마음에 와닿았었다. 문학을, 특히 시를 오지선다형 문제로 풀어야 한다는 것에 어떤 모멸감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멸감과 달리 나는 국어 성적이 너무 좋았다. 문제를 너무 잘 풀었다.
가끔 김건희를 보면 부럽기도 하다. 뭐가 부러우냐 하면 돈에 대한 맹목, 집착.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는 것에 인생을 올인하는 거 보면 적어도 저 자는 태어난 게 허무하진 않겠네 싶어서. 김건희 같은 기질의 사람에게 최적화된 세상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김건희 같은 사람은 절대 자살 안 할걸. 자기 돈 아까워서 못 죽을 걸. 어차피 50년도 더 못 살고 죽을 건데 이 돈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 자체가 없을 걸. '정작 당사자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죽음이란 결코 찾아오지 않는 미래입니다.' 이 문장에 가장 부합하는 사람이 김건희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내 인생관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 한정치산자로 의심되는 사람(자기 객관화가 전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이 김건희지만, 이기적 유전자적 관점에서 보자면 생을 철저히 긍정하고 죽음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김건희 부류의 인간이야 말로 적자생존 아닌지. 자본주의 환경에 최적화된 인간 군상으로서 적자생존. 환경에 적합한 사람이 살아남는다는 의미에서.
ps. 시집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는 내가 제일 아끼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는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이다. 너무 좋아서 암기하려고 했는데, 20페이지 정도 분량이라서 포기하고 한 권을 더 구매했다. 한 권은 집, 한 권은 회사에 두고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가 필요할 때마다 읽으려고. 물론 타이핑해서 출력한 A4용지를 회사에 둘 수도 있고, 한글 파일로 꺼내 읽을 수도 있고, 시집 페이지를 사진으로 찍어서 시가 필요할 때마다 폰을 열어볼 수도 있겠지만, 시는 종이로 된 시집으로 읽어야 제 맛. 이 시집도 출판되자마자 샀다. 나라도 사야지 하는 그런 오만한(?) 마음. 아무튼 그래도 존버하면서 살다 보니 이 영화를 극장에서 필름 상영으로 보게 될 날도 오는구나 싶어서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