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오타쿠의 피가 없다에 이어서 쓴다)
땀이 뻘뻘 날 때까지 버티다가 잠시만 에어컨을 켜고 끄고를 반복하면서 푹 쉬었더니 감기의 80%는 해결된 것 같다.
유튜브에서 미피를 덕질하는 사람의 영상을 봤다. 본 이유는 학생 때 나도 미피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각인된 미피의 퍼스널컬러는 쨍한 오렌지색이다. 그건 아마도 내가 오랫동안 오렌지색 바탕에 미피가 그려진 보조가방을 들고 다녔던 탓일 것이다. 또 미피가 그려진 동아 형광펜 오렌지색만 몇 다스 사서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이 고급스럽게 스테들러 형광펜을 쓸 때도 나는 미피가 그려진 향기 나는 동아 형광펜 색상도 경박한, 쨍한 오렌지색을 사용했다(미피 형광펜 12색 세트도 사서 써봤는데 역시 미피는 오렌지색이 짱이다는 결론만 얻음). 그런데 미피 덕질러는 무채색 미피만 수집하고 있었다!! 무채색 미피가 있나? 그게 말이 돼? 하면서 호기심을 폭발해서 영상을 봤는데, 무채색 미피가 엄청 많은 것이다. (미피의 퍼스널 컬러는 오렌지라고 오렌지!! 누군가에게 오렌지는 에르메스겠지만, 나에게 오렌지는 미피!!) 또한 미피 덕질러는 검정과 흰색을 중심으로 무채색만 좋아하는 다꾸 마니아였다. 무채색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 미피 덕질러는 무채색으로 된 귀여운 것들을 좋아했다. 반면 나는 귀여운 디자인 보다는 화사한 색상으로 된 물건을 더 선호한다. 볼펜도 자바 0.38 베이비를 다스로 사서 쓴다. 이 볼펜 이름에 괜히 베이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볼펜 케이스 색상이 베이비톤(?)인데, 네 가지 색상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연보라. 유니 제트스트림도 있지만 굵기별(1.0이 제일 좋다)로 있긴 한데 케이스 모양이 너무 흉물스럽. 현재 나에게 남은 미피는 형광펜과 입체 스티커(휴대폰 케이스 바꿀 때마다 폰에 붙이는 용도).
미피 덕질 영상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말은 "내가 미피를 사려고 돈을 벌고 있구나."였다. 왜냐하면 요즘 나는 돈으로 사고(하고) 싶은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돈을 버는 것에 시간과 체력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회사의 내 책상이 내 영역이기 때문이다(바틀비에게 신내림 받았나?). 어리석게도 매일 가서 영역 표시를 하는 것이다. 마치 내가 고양이과 영역 동물이라도 되는 듯이 출퇴근하고 있을 따름이다.
왜 사람들은 늘 돈이 부족하다고 하지? 반대로 나는 왜 늘 돈이 남지? 그 이유를 어제 일기를 쓰다가 알게 되었다(이래서 일기를 써야 한다!). 나에게는 오타쿠의 유전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 오지은의 신간이 나에게 하등 필요 없는 주제의 책이기에 읽을 이유도 구매할 이유도 못 느끼는 것이다. 권여선의 술안주 에세이도 마찬가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 대해서도 쓸모의 유무를 따져 가면서 구매여부와 독서여부를 결정하는데 고만고만한 것들(물건, 인간관계 등등)에 대해서는 어떠하겠는가. 사람에 대해서도, 물건에 대해서도, 서비스에 대해서도 오타쿠적 소비를 하지 않으니 돈이 남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돈을 쓰는 데 사용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엇에 돈을 써야 할지 정보를 검색할 시간이 없어서였다. 쓸데없는 것에 시간과 체력을 쓰는 게 너무 아깝다. 통장 잔고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돈을 쓰고 싶지도 않은데, 딱히 돈을 계속 모아야 할 이유도 없는데, 귀한 시관과 체력을 돈벌이에 거의 다 쓰고 있는 게 굉장히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샤넬에 간 것이다. 샤넬에서 사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다면 돈벌이(영역 표시)를 그만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샤넬에 갔다. 코로나가 끝나고 샤테크의 시대도 저물어서 샤넬은 한가했다. 대기가 없기 때문에 언제든 매장에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엔 구하기 힘들던 백들도 웬만한 건 다 있다. 다만 지금 구하기 힘든 건 25백 블랙 등 인기 색상. 제니가 나오는 샤넬 광고를 보면서 '저 삼각김밥 같이 생긴 건 뭐래?' 하고 생각했던 25백을 직원이 보여주었을 때도 뭐 이래 생겼어했는데, 어깨에 걸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나 버렸다. 샤넬 매장 속 거대한 거울에 비친 나를 제니로 착각할 정도로 가방이 예뻤다. 하지만 나는 트위드 플랩백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산다면 이번 fw 시즌 트위드 플랩백을 사고 싶었다. 샤넬 트위드 재킷은 못 사더라도 트위트 플랩백 하나 정도는 살 수 있는 거 아니냐. 이번 시즌 신상 중 입고된 건은 세 개뿐이었고 셋 다 별로였다. 홈페이지에서 본 가장 예쁘다고 생각한 건 매장에 없었다. 영화 시간도 다 되었고 해서 다른 백이 입고되면 연락해 달라고 하고 귀걸이 하나 사고 쇼핑을 끝냈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어도 계속 어제 본 25백 생각이 나는 거다. 그래서 다시 샤넬에 갔다. 어제 본 건 다 팔렸고, 대신 오늘은 이번 fw에 새로 출시된 다른 가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것보다 더더 맘에 들었다. 내가 두 번째로 예쁘다고 생각한 신상 트위드 백도 이날 입고 되어서 있었는데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25백에 반해버린 것! 그냥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생긴 가방인데, 어깨에 메는 순간 진짜 예뻐진다! 가방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예뻐짐. 집에서 잠옷을 입고 메어 봤는데 잠옷에도 어울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가방이 있을 수 있지!!!! 25백은 음식으로 치면 최고급 향신료 같은 것!
하지만 역시 25백을 구매할 때 소비한 시간이 아깝다. 나는 시간의 가치를 2시간 단위로 계산하는 버릇이 있다. 2시간이면 영화 1편인데 영화를 포기하고 쇼핑을 해야 할 가치가 있나? 영화 한 편 vs 뷰가 좋은 해운대 호텔 뷔페에서 나는 영화 한 편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특히 그 영화가 다시는 볼 수 없는 영화라면 더더욱. 사람을 만나는 것에서도 영화 1편 보는 것보다 재미없는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다. 처음에야 호기심에서 만나겠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 내가 알 수 있는 것을 다 알고 다면, 더 이상 우려내도 우릴 것이 없는 이미 사용한 티백 같은 사이라는 결론이 나면, 나는 그런 사람(또는 무리)을 만나는 것에 시간과 체력을 쓰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대체로 혼자 있는데, 나를 스쳐간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오롯이 혼자 쓰는 지금이 제일 만족스럽고 스트레스도 덜 하고, 무엇보다 대학병원 정기 건강 검사 결과가 제일 좋은 나나들이다. 사람, 즉 인간관계가 나에겐 1급 발암물질이었던 것이다.
요즘 내가 농담처럼 말: 퇴직 전에 주 4.5일제(더 존버하면 주 4일제)는 체험해 보고 그만 두자인데, 존버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샤넬 28백 메고 출근해 보자. 샤넬이 19백, 22백, 25백을 출시한 규칙대로라면 다음 신상백은 28백인데 그때까지는 돈 벌어보자는 거. 근데 번 돈을 어디다 쓰냐, 돈을 쓰고 싶은 데가 없는데. 더욱이 돈을 쓸 시간도 체력도 없는데. 구입한 책도 다 못 읽은 게 더 많고, 개봉한 영화도 제대로 못 챙겨보고 있는데, 쇼핑할 시간이 어디 있냐고. 여행 갈 시간이 어디 있냐고(사람들이 자꾸 여행 가면 되지 않냐고 하는데, 일단 내 집이 아닌 곳에서 자는 거 싫고, 관광지에서 관광객들이랑 만나는 것도 싫고(추석에 파리 갔더니 한국인뿐이었다. 한국인 줄 ㅋㅋ) 이미 가고 싶은 곳은 다 가봤고,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종이지도와 가이드북 들고 여행 다니던 때가 좀 그립).
물욕이 0에 수렴해서 무기력증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25백 보자마자 반한 걸 보면 무기력증은 아닌 거 같다. 다만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소비위주의 유희거리들이 내 취향과 맞지 않을 뿐. 어렸을 때는 경험해보지 않은 것이 많아서 일단은 찍먹 해본 것들: 여행(+먹부림), 쇼핑, 우정, 연애, 자동차, 집, 인테리어, 운동(방송댄스도 꽤 오래 배워봄 ㅋㅋ), 악기, (목표가 명확한) 공부 등등. 그 모든 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지금 내 곁에 남아 있는 건 내가 미취학 아동~초등 저학년 때부터 좋아하던 것 말고는 없다. 책 읽기, 영화 보기, 일기 쓰기 그리고 약간의 패션(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좋아했었다). 유튜브에 자주 나오는 여행 광고 중에서 에어비앤비던가를 보면 체험하는 여행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가서 복원팀과 복원 체험, 로마에 가서 피자 만들기 체험, 일본에 가서 일본 라면 만들기 체험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 볼 때마다 '저런 체험 위주의 여행이라면 난 돈을 줘도 안 간다 안 가.' 하고 광고를 볼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가 '호갱님, 돈을 쓰세요 돈을!' 하고 외치는 것에 내가 딱히 흥미가 없다는 것. 또한 덕질에도 흥미가 없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도 내 관심사가 아닌 주제라면 구입하지 않을 정도니. 옷과 액세서리를 좋아하긴 하지만 1년은 365일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입을 수 있는 개수 최대치를 넘지 않게만 소유하고 있다.
다들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살이 쪄서 문제라는데
반대로 나는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살이 안 쪄서 문제고
다든 돈이 없다 돈이 없다 난린데,
나는 돈을 쓰고 싶은 데가 딱히 없어서 설마 내가 무기력일까 봐 걱정했다.
(이러다 정말 해탈하여 윤회의 사슬을 끊고 업의 강둑을 넘어 무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이 세상은 정말 나랑 맞지가 않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정된 시간은 최대한 낭비 없이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고,
긴 일기를 쓰면서,
스스로를 챙기면서 하루씩 살아내고 싶다.
ps. 이번에 샤넬을 사면서 체감한 것은 경제상황이 진짜 안 좋구나 하는 것. 백화점에서 명품 살 때 항상 상품권 구매해서 사는데 상품권 할인율은 늘 은행 이자보다 낮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은행 이자보다 무려 0.3%나 할인율이 높은 거다. 그동안 내가 돈을 안 써서 경제가 돌아가지 않았던 건가. ㅋㅋㅋ 경제야, 쏘리. 돈을 쓸 시간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