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의 사후, 옹정제의 즉위에 관련된 이야기는 중국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가장 재미있는 황권다툼이라고 할 수 있다.
강희제는 종전에 차기 황제를 정하지 아니함으로써 야기된 문제를 고려하여, 황태자를 정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만주족들은 황태자를 정하였다고 하여 황위계승다툼이 끝났다고 보지 않으며, 계속하여 황위를 향한 경쟁을 멈추지 않았다는데서 비극이 시작된다. 누르하치가 일찌기 츄잉을 황태자로 세웠으나, 다른 형제들과 대신들이 반발하여 결국 츄잉은 유폐된 후 사사되었다.
강희제 때 황태자로 책봉된 아들은 황이자(皇二子, 황제의 둘째아들)인 윤잉(胤잉[示+乃])이었다. 윤잉은 강희 13년(1674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다음해인 1675년에 황태자로 봉해진다. 이 때 강희의 나이 22세였다. 첫번째 황후이자 윤잉의 생모인 허셔리(赫舍里)씨는 청나라 황후중 유일하게 출산중에 난산으로 숨진 황후이다. 강희는 첫째 황후인 허셔리씨에 대한 애정이 유별났으며, 이로 인하여 그 아들인 윤잉을 2살이 되자마자 황태자로 봉하게 된다. 강희의 이런 황태자책봉은 그 조상들이 태자를 세우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사후 발생하였던 형제간의 권력다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너무 일찍 2살밖에 안된 아들을 황태자로 봉함에 따라 문제도 역시 많이 발생하게 된다.
강희제는 모두 35명의 아들을 두는데, 그 중 어릴 때 요절하지 않아 배분이 부여된 아들만 24명이며, 성년이 되어 책봉까지 받은 아들은 20명에 불과하다. 당시 의술등의 한계를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20명의 황자들중 강희제의 사망당시에 연령이 성년에 달한 사람은 12명이었고, 그들은 다음과 같다.
황장자(皇長子) : 윤시 [示+是] : 돌림자는 윤은 胤이었는데, 후에 옹정이 즉위한 후 형제들에게 윤(允)으로 바꾸도록 하여, 옹정즉위후에는 允으로 쓴다.
황이자(皇二子) : 윤잉 [示+乃]
황삼자(황삼자) : 윤지 [示+止]
황사자(황사자) : 윤진 [示+眞]
황오자(황오자) : 윤기 [示+其]
황칠자(황칠자) : 윤우 [示+友]
황팔자(황팔자) : 윤사 [示+異]
황구자(황구자) : 윤당 [示+唐]
황십자(황십자) : 윤아 [示+我]
황십이자(황십이자) : 윤도 [示+陶의 오른쪽글자]
황십삼자(황십삼자) : 윤상 [示+羊]
황십사자(황십사자) : 윤정 [示+貞], 후에 옹정의 명에 의하여 윤제[示+題]로 개명함.
이들이 바로 차기 황권을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에는 크게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황권을 노리게 된다.
첫째그룹 : 황태자그룹
황태자 윤잉의 생모인 허셔리씨의 조부는 쑤오니(索尼)이다. 쑤오니는 양황기의 원로대신으로, 순치제의 사후에 보정대신(보정대신은 황제가 어려서 황제를 대신하여 모든 정사를 처리하는 고명대신임)으로 임명되는데, 그 중 쑤오니가 우두머리였다. 허셔리씨의 부친은 거부라(褐布剌)로서 당시 영시위내대신(만주족 신하중 최고직위로 여섯명이 임명됨) 중의 하나였다. 숙부는 쑤오어투(索額圖)로서 당시 대학사 겸 영시위내대신으로써 신하들중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쑤오어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황태자를 중심으로 그룹을 만들어서 국정과 대사를 논의하곤 하였다. 당시 강희는 이미 늙어가고 시간이 흐르면 황태자가 황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권력을 쫓는 많은 무리들은 황태자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강희제로 하여금 경계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강희는 쑤오어투에게 "너희들이 배후에서 꾸미는 일, 너희가 결탁하여 하고 있는 일체의 일, 너희가 배후에서 원망하는 말, 이런 걸 여기서 다 꺼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난 똑똑히 알고 있다"라고 하며 "어느날 내가 독살당하거나 피살당할지도 몰라, 매일 경계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 후에 강희제는 쑤오어투를 사사하였으며 황태자 윤잉에게는 경고하였다고 한다. "전에 쑤오어투가 너를 도와 꾸민 사정은 내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쑤오어투를 죽인 것이다". 문제는 이후에도 황태자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으며 계속 세력을 모으고 국정을 논단하였다. 강희는 결국 강희 47년(1708년) 황태자를 폐하였다. 황태자를 폐하는 명을 내리면서 강희제는 한편으로 읽으면서 한편으로 눈물을 흘리고,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고 한다. 다 읽은 후에는 슬퍼하고 괴로워함이 매우 심하여 이후 6일 밤낮을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않으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중풍까지 들어 왼손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황태자가 자리에서 밀려나자 다른 야심있는 황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대권을 노리기 시작하는데, 태자당외에 팔아거당(八阿哥黨)과 사아거당(四阿哥黨)이 나타난다. 아거는 청나라때 황자를 가리키는 만주어이다.
둘째그룹, 팔아거그룹.
여덟째 윤사는 재능이 있고, 덕도 있으며, 총명하고 능력이 있어 안팎으로 인심을 많이 얻었따. 처음에 황태자를 폐한 후에 윤이는 내무부총관사를 맡았으며, 그룹을 모아서 대권을 노렸다. 팔아거당에 속한 황자들은 황장자 윤시, 황구자 윤당, 황십자 윤아, 황십사자 윤정 등으로 가장 큰 그룹을 이루었다. 이외에 대신들중에서도 아링아, 어룬다이, 쿠이슈, 왕홍서등이 모두 윤사의 편이었다.
황장자 윤시는 생모가 혜비로서 서출이며, 외숙은 한 때 쑤오어투와 더불어 양대산맥을 이루었으나 면직된 명주(明珠)였다. 윤시의 입장에서는 세력이 없고, 생모인 혜비가 윤이를 기른 인연이 있어 두 사람이 연합하였다. 그런데, 윤시는 황태자 윤잉을 폐한 후 강희에게 자기 손으로 윤잉을 처리하겠다고 말했다가 강희의 노여움을 사 작위를 박탈당하고 유폐되게 된다.
대신들이 다시 황태자를 세우자는 건의를 올리자, 강희는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신하들에게 누구를 태자로 세우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밀주(비밀리에 황제에게 글로 써바치는 것)를 올리도록 요구한다. 대학사인 마치를 비롯한 대신들은 모두 황팔자 윤사를 천거하였으며, 윤사도 자신이 황태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고, 많은 형제들과 신하들이 윤이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이로써 윤사의 주위에는 점차 황태자의 지위를 노리는 하나의 정치집단이 형성되었다.
이후 강희제는 윤사를 체포하고 작위를 박탈하였다. 황14자인 윤정이 선처를 호소하자, 강희가 대노하여 칼을 뽑아 윤정을 치고자 하였다. 윤기등이 무릎을 꿇고 강희를 붙들며 말렸다. 모든 황자들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박으며 진노를 가라앉힐 것을 간청하자, 약간 화가 풀려, 황자들에게 윤사를 채찍으로 치게 하였다.
황태자를 폐한 후 황자들간의 다툼이 점차 치열해지고 복잡해지는 것을 본 강희는 다음 해에 윤잉을 다시 황태자로 봉한다. 그러나, 다른 황자들은 이미 한번 윤잉을 폐한 적이 있으니 다시 또 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황태자그릅과 팔아거그룹간의 암투는 더욱 치열해지고 격화된다. 강희 51년(1712년)에 강희는 다시 윤잉을 황태자에서 폐한다. 강희는 자식들간의 황위다툼에 넌더리를 내며, 그 당료들을 더욱 엄하게 처벌한다. 상서 제세무는 벽에 쇠못으로 박아서 죽게 하였으며, 옥에서 죽은 투오허는 시체를 불에 태워버린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되고, 황태자그룹과 팔아거그룹의 사이에 사아거그룹이 형성된다.
셋째그룹, 사아거그룹.
황사자 윤진의 그룹에는 황십삼자 윤상과 황십칠자 윤례(胤禮)가 소속되고, 대신들 중에는 롱커뚜오(隆科多), 연갱요(年羹堯)등이 있다.
윤진은 심계가 깊고, 관찰력이 뛰어나며, 겉으로 감정을 표시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첫번째 폐위되자 풍향을 잘 읽고 황태자를 위한 말을 강희에게 함으로써 강희로부터 형제간 우애가 있다는 좋은 평을 받았다. 8아거그룹에는 따르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대립하지도 않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부친인 강희제의 말에 따라 "안정수분(安靜守分: 조용히 지내면서 분수를 지키는 것)"하고 불법을 깊이 연구하고, 널리 좋은 사람을 많이 사귀며 교묘하게 자신을 감추어갔다. 부친에게는 충효를 다하고, 형제들에게도 항상 좋은 말을 하였으며, 조정대신들과도 널리 사귀어갔다. 동모소생인 황십사자 윤정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윤정이 팔아거그룹과 어울리는데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그룹과 팔아거그룹간의 당쟁으로 부친인 강희, 형제, 왕공, 대신들의 시선이 그 두 그룹에 집중되어 있을 때, 윤진은 어부지리를 노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진의 심복이자 참모였던 따이뚜오(戴鐸)가 윤진에게 보낸 밀서의 내용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으며, 윤진은 따이뚜오의 건의를 매우 고마워 하고 감사하였는데, 그 내용은 (1) 황부에게는 효성을 다하고, 재능은 적당히 나타내라는 것이다. 재능을 전혀 나타내지 않으면 부황이 무시할 것이고, 재능을 너무 나타내면 마찬가지로 황부가 의심하고 꺼릴 것이다. (2) 형제에게는 우애를 다하고, 크게 포용하고 화목하게 대하라는 것이다. (3)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화평하고 참으라는 것이다. 잘 지낼 수 있으면 잘 지내고, 한 편으로 만들 수 있으면 한편으로 만들고, 참을 수 있으면 참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4)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참으라는 것이다(戒急忍用). 윤진의 성격은 두가지로 표현되고 있는데 하나가 기쁜 것과 노하는 것이 일정치가 않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처리에 너무 조급해 한다는 것이다. 강희제도 윤진에게 여러번 이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다.
강희의 35명의 아들은 전부 다음과 같다. 순서를 받은 경우는 진한 글자로 표시하였고, 순서를 받지 못하고 어릴 때 요절한 아들들은 그냥 순서대로 이름만 적었다.
1、承瑞
2、承祜
3、承庆
4、赛音察混
5、皇长子胤褆 褆:通“祗”,敬的意思。
6、长华
7、皇二子胤礽 礽:福的意思。
8、长生
9、万黼
10、皇三子胤祉 祉:福的意思。
11、皇四子胤禛 禛:吉祥,多用于人名。
12、胤襸
13、皇五子胤祺 祺:吉祥。
14、皇六子胤祚 祚:福。
15、皇七子胤祐 祐:神灵的帮助、护佑。
16、皇八子胤禩 禩:祭祀。
17、胤礻禹
18、皇九子胤禟
19、皇十子胤礻我
20、皇十一子胤禌
21、皇十二子胤裪
22、皇十三子胤祥 祥:吉利。
23、皇十四子胤禵(胤祯) 祯:吉祥。 禵:福。
24、胤禨 禨:祥,事鬼神以求福。
25、皇十五子胤礻禺
26、皇十六子胤禄 禄:福
27、皇十七子胤礼 礼:祭神祀祖。
28、皇十八子胤衸
29、皇十九子胤禝
30、皇二十子胤袆 袆:美好(多用于人名)。
31、皇二十一子胤禧 禧:幸福,吉祥。
32、皇二十二子胤祜 祜:福。
33、皇二十三子胤祁 祁:盛、大。
34、皇二十四子胤袐 袐:奥秘,奥妙。
35、胤褑
옹정제의 즉위와 관련하여서는 3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유조계위설(유조에 따라 황위를 승계받았다는 설), 둘째는 개조찬위설(유조를 고쳐서 황위를 빼앗았다는 설), 셋째는 무조탈위설(아무런 유조를 남기지 않았으며 황위를 빼앗았다는 설).
첫째, 유조계위설
이러한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 옹정은 황부 강희의 신임을 받았으며, 그를 천단에 강희를 대신하여 보내어 하늘에 제사지내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강희가 임종전에 옹친왕 윤진에게 황위를 승계할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강희의 유지가 증거이다. 강희 61년(1722년) 11월 13일, 강희는 병이 엄중하였는데, <<청성조인황제실록>>의 기재에 따르면, 황삼자 성친왕 윤지, 황칠자 순군왕 윤우, 황팔자 패륵 윤사, 황구자 패자 윤당, 황십자 돈군왕 윤아, 황십이자 패자 윤도, 황십삼자 윤상, 이번원 상서 롱커뚜어가 어탑앞에 부른 후, 말하기를 "황사자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내 뜻을 잘 알며, 능히 대통을 이을만하니, 짐을 이어 등극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3) 강희의 유조를 근거로 한다. <<강희유조>>는 중국역사기록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상면에는 "황사자 윤진, 인품이 귀중하고 내 뜻을 잘 알며, 능희 대통을 이을만하니, 짐을 이어 등극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둘째, 개조찬위설
이러한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 윤진은 비록 강희에게 인상을 좋게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하여금 천단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게 하였다는 것은 강희제가 그에게 황제위를 계승하게 할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강희황제는 윤진에게 한번도 군사와 관련된 업무를 하도록 시키지 않았는데, 만일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고 교육시켰다면 군사직위를 부여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이에 비하여 황십사자 윤정의 경우에는 대장군왕에 봉하여 몽고, 서역등을 정벌하여 공을 세우도록 기회를 주었다.
(2) 강희의 임종당일(13일), 인시에 황삼자, 황칠자, 황팔자, 황구자, 황십자, 황십이자, 황십삼자 모두 7명의 황자와 롱커뚜오를 입궁하게 하였으며, 그들에게 "황사자 윤진, 인품이 귀중하고 내 뜻을 잘 알며, 능희 대통을 이을만하니, 짐을 이어 등극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라"는 말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결정을 이 일곱 황자와 롱커뚜오가 있는 데서 하면서 왜 당사자인 황사자 윤진은 부르지 않은 것인지?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사후에 날조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3) 당일의 실록의 기재에 의하면 윤진은 3번이나 강희의 어탑에 불려간 것으로 되어 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3번이나 윤진을 불렀다는 것은 그 때까지 정신이 멀쩡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그 12시간동안 3번이나 불렀으면서 본인에게는 황위계승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상리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거꾸로 강희가 7명의 황자에게 윤진에 계승한다는 유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4) 강희가 죽은 후 왜 롱커뚜오 혼자서 단독으로 윤진에게 황사자가 계승한다는 유조를 읽었는지? 왜 그 때 다른 형제들이나 왕공대신들은 자리에 없었는지?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강희유지는 조작된 것이라고 본다. 강희유조의 작성일자가 13일인데, 그날은 강희가 사망한 날이다. 결국 강희가 직접 유조를 작성했다고는 볼 수 없고, 누군가 대신 써주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 인물이 롱커뚜오이다. 청나라 자료에 의하면 즉위시 옹정이 롱커뚜오에게 보낸 글에서는 "짐의 공신" "보기드문 신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즉위에 어떤 공을 세웠다고 그렇게 표현했는지는 모른다.
(5) 강희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9개의 문은 모두 6일간 닫겨 있었다. 각 왕은 영이 없으면 대궐에 입궁하지 못하였고,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옹정정변의 의문을 갖게 하였다.
(6) <<강희유조>>는 강희제가 죽을 때 이미 정한 것이고 강희제가 작성한 것이므로 당연히 강희가 사망한 13일 당일에 선포되었어야 하는데, 왜 16일이 되어서야 공포되었는지> 이로써 볼 때 위조의 혐의를 벗기 힘들다.
(7) 청사연구전문가에 의하면 이 <<강희유조>>는 강희 54년(1715년) 11월 21일의 유지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강희유조에는 헛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8) 어떤 사람은 옹정이 사후에 청동릉에 묻히지 않고, 청서릉에 묻었다는 점을 드는데, 이것은 그가 황위를 적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므로, 지하에서 황부 강희와 조부 순치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옹정은 즉위후 강희가 좋아하던 곳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궁도 강희가 머물던 창춘궁에 머물지 않고 다시 원명원을 만들어 거기에 머물렀다. 그리고 강희가 그렇게 가기 좋아하던 승덕의 피서산장에 옹정은 한번도 가지 않았다.
(9) 옹정은 여러 형제들에 대하여 죽이거나 감금하는 등 "살인멸구(죽여서 입을 막는 것)" 혹은 "입을 못열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것도 의심의 근거로 삼는다.
(10) 옹정은 즉위후 연갱요와 롱커뚜오를 살해하는데 이것도 살인멸구의 의심을 받는다.
(11) 옹정은 <<대의멸미록>>을 만들어 자신에 관한 10가지 나쁜 소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자신을 변호사는데, 이것은 마치 "여기에 금괴를 묻지 않았음"이라고 쓴 말뚝을 박아두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었다.
대체로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윤진이 동모형제인 황십사자 윤정의 황제위를 찬탈한 것으로 얘기한다. 그 이유로서는
(1) 강희가 생각한 후계자는 황십사자 윤정이었으며, 그를 무원대장군으로 봉한 것은 그에게 군공을 세워서 군권을 장악한 후 황위를 이어받으라는 의미였다고 주장한다.
(2) 어떤 학자는 강희가 죽기전에 옹친왕이 즉위하라는 유지를 남긴 바 없다고 하며, 소위 강희유조는 위조된 것이라고 한다. 강희가 막 죽은 후에 옹정쪽의 사람이 "전위십사자(傳位十四子)"라는 글자를 "전위우사자(傳位于四子)"로 고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관해서는 윤진이 유조를 고쳤다는 설, 롱커뚜오가 고쳤다는 설, 연갱요가 고쳤다는 설의 3개 설이 떠돌았다. 강희황제가 임종전에 서녕에 가 있던 무원대장군 황십사자 윤정을 북경으로 불렀는데, 이 명을 롱커뚜오가 가지고는 발송하지 않고 유조를 고쳤다고도 한다. 이것은 소문에 불과하고 사실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유조를 고쳤다는 것은 성립되기 힘들다고 본다.
하나, 당시 번체자로 쓰는 경우에 '우(于)'는 '어(於)'로 써야 하는데, 십(十)을 어(於)로 고치기는 어렵다.
둘, 당시 글의 규범은 황X자로 쓰는 것인데, 이것은 우(于)와 사(四)의 사이에 황자를 넣어야 하므로 고치기가 어렵다.
셋, 청나라의 국서는 중요한 경우 만주어와 한자를 동시에 쓰는데, 한자는 고친다고 하더라도 만주어는 고칠 방법이 없다.
(3) 옹정이 이름을 고쳤는가? 어떤 사라은 강희의 유조에는 "윤정[示+貞](황십사자)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를 윤진[示+眞]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이는 진과 정의 글자가 비슷함으로 인하여 일어난 의심이다. 옹정제는 후에 황14자의 이름을 윤정에서 윤제로 고치도록 명하는데, 그 이유도 이것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윤진의 진이나 윤정의 정이나 한자발음으로 쩐[Zhen]으로 같기 때문에 피휘를 위해서 바꾸게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때 형제들의 돌림자도 윤(胤)에서 윤(允)으로 바꾸게 한다.
셋째, 무조탈위설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옹정이 유조에 따라 즉위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모순으로 해석이 명확하지 않다고 보고 그러한 설은 유지되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옹정이 유조를 고쳐서 즉위하였다는 것도 증거가 명백히 부족하다고 본다.
옹정이 즉위한 것은 그가 황권경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이며, 이러한 황위경쟁은 드러나거나 감추어지거나간에 40여년에 걸쳐 있어온 것이고 결과적으로 태자당그룹도 실패하고, 8아거그룹도 실패하고 결국 4아거그룹이 승리한 것이라는 것이다.
옹정제의 황위는 정도로 취득한 것인가? 비정도로 취득한 것인가? 옹정이 등극한 후 280여년이 지났지만, 학술계에서는 아직도 뜨겁게 다투어지고 있는 주제이고, 연속극등에서도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역사에는 이에 관해 더 이상 적혀 있지 않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고, 정사에는 절대 옹정이 황위취득과 관련하여 조금이라도 올바르지 않은 일을 했다고 적지는 않는다. 강희는 생전에 황위계승의 유조를 내린 적이 없고, 조금이라도 황위계승과 관련한 문건을 남기지 않았다
옹정제의 즉위후의 뒷이야기이다. 그와 대결하였던 형제들의 뒷이야기이다.
1. 황장자 윤제. 황태자를 폐했을 때, 강희에게 윤잉을 자기손으로 죽이겠다고 말했다가 노여움을 사서 작위를 박탈당하고 집에 유폐되었다. 강희제는 패륵 연수등을 파견하여 감시하게 하였으며, 명을 내려 만일 감시에 소홀하면 일족을 멸하겠다고 하였다. 윤시는 이미 하늘을 볼 수 없는 죽은 호랑이였다. 옹정 12년(1734년)에 죽었고, 패자(貝子)의 예로 장사지내졌다.
2. 황이자 윤잉. 함안궁에 유폐되었다. 옹정제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그를 이군왕으로 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산서성 기현 정가장으로 윤잉을 보내어 유폐하였다. 옹정2년 (1724년)에 사망하였다.
3. 황삼자 윤지. 원래 황권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단지 책을 편집하는데 열심이었는데, 사건에 연루되었다. 옹정즉위후 "윤지가 황태자와 원래부터 친했다"는 것을 이유로, 윤지에게 강희의 능인 경릉(景陵)을 지키도록 보내어 졌다. 윤지는 당연히 불쾌해 하였고, 혼자서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것이 옹정의 귀에 들어가서 윤지의 작위를 박탈하고 경산 영안정에 유폐하였다. 옹정 10년 (1732년)에 사망하였다.
4. 황오자 윤기. 강희제가 준거얼을 친정할 때, 정황기 대군을 이끌었다. 후에 항친왕(恒親王)에 봉해졌다. 윤기는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황위다툼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옹정 10년(1732년)에 사망하였다.
5. 황칠자 윤우. 옹정 8년(1732년)에 사망하였다.
6. 황팔자 윤사. 옹정의 형제중 가장 능력있고 우수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를 폐한 후 윤사가 황권을 노골적으로 노리자 강희가 그를 미워하였다. 옹정의 즉위후 윤사와 그의 그룹은 눈의 가시와 같이 여겼다. 윤사도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마음 속으로 앙앙불쾌하였다. 옹정은 우선 윤사를 친왕으로 올려주었다. 부인이 윤사에게 축하를 하자, 윤사는 "뭐 축하할 일이 있느냐. 결국 목이 달아날 일인데..."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옹정에게 들어갔다. 후에 옹정은 그의 왕위를 삭탈하고, 집에 유폐시시켜 이름을 "아치나(阿其那)'로 불렀다. 아치나에 대하여는 과거에는 만주어로 돼지라는 의미라고 해석하였으나, 지금은 학자들이 "후안무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7. 황구자 윤당. 윤사와 같은 그룹에 속하였으므로 옹정이 용서할 리 없었다. 윤당도 이것은 명확히 알았다. 그래서 "난 출가하여 중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옹정은 그가 출가하여 중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핑계를 잡아 윤당을 족보에서 빼고,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어 싸쓰헤이(塞思黑)라고 하였다. 싸쓰헤이는 과거에는 만주어로 개라는 의미로 해석하였으나, 요즘의 학자는 "후안무치"로 해석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당은 28의 조목으로 직예총독부에 유폐된다. 유폐중 죽었으나 독살된 것이라고 얘기된다.
8. 황십자 윤아. 윤사그룹에 들었으므로 옹정이 싫어하였다. 옹정원년(1723년), 윤아에게 몽고에 사신으로 가도록 하였으나, 윤아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옹정은 장가구에 거주하도록 하고, 같은 해 작위를 박탈하였으며 북경으로 불러 유폐하였다. 건륭2년(1737년)에 비로소 석방되었다.
9. 황십이자 윤도. 강희말년에 상황기 만주도통을 맡았으며 중용되었고 권한을 가졌으나 황자의 당에는 가입하지 않았었다. 옹정이 즉위하면서 윤도를 이군왕에 봉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작위를 박탈하고 패자(貝子)로 대우하다가 다시 진국공으로 낮추었다. 건륭즉위후에 다시 이친왕으로 봉해졌다. 건륭 28년(1763년)에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0. 황십사자 윤정. 옹정과 동모소생이다. 그러나 윤사와 같은 그룹에 속하였으며 소문에 의하면 윤진이 유조를 고쳐서 원래 윤정에게 돌아갈 황제위를 윤진이 빼앗았다는 것이며, 이렇게 두 형제는 서로 원수가 되었다. 옹정즉위후 윤정에게 북경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준화에서 강희제의 무덤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그 부자를 경산 수황전 좌우에 연금하였다. 건륭즉위후에 석방되었으며 건륭에 의하여 중용된다.
11. 황십오자. 윤우. 장희제 사후 경릉에서 강희의 묘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들 외에 비교적 상황이 좋았던 사람은 3명이다.
12. 황십삼자 윤상. 윤상은 강희시절에 유폐되었는데, 이유는 불분명하다. 옹정즉위후 이친왕으로 존중받았다.
13. 황십육자 윤록. 윤록은 장친왕 보궈뚜오를 이어 장친왕의 작위를 승계하였다.
14. 황십칠자 윤례. 윤례는 옹정 즉위후 과군왕이 되었다가 과친왕으로 승급하였다. 먼저 이번원을 장악하고, 종인부와 호부를 맡았다. 윤상과 윤례는 4아거그룹에 들었으나, 강희가 살아있는 동안은 비밀로 하였고 대외에 드러내지는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