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85-189

 

 

 

 

 

 

옹정 연간에는 준가르 부족과의 전쟁 때문에 이와 관련되 군사보고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태화문 밖에 있었던 내각사무처는 내정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때문에 군사기물을 유지하거나 황제가 직접 명령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옹정 7년(1729) 6월, 청나라 조정은 황제가 머무는 용종문 근처에 군기방을 설치했다. 옹정 10년(1732) 3월, 군기방은 군기처(군기사무 처리처)로 바뀌었다.  

설치 초기에 군기처는 군사와 관련된 사무를 처리하고 계획하는 일을 담당했다. 때문에 정식 부서가 아닌 치려(임시 사무소)'로 분류되었으며 전문관리도 없이 모두 '내정차사'라고 불렸다. 당시 군기처에 근무하던 군기대신, 군기장경은 모두 기존의 관직을 겸하며 군기처의 사무를 담당했다. 이렇게 임시로 설치되었던 군기처는 그 소임을 완수한 다음엔 없어져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 기구는 사라지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확대를 거듭해 내각과 의정왕대신회의를 능가하는 권력의 최고 중추가 되었다. 바로 황권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으로는 육부경시, 구문제독, 내무부 태감의 경사방, 밖으로는 18개 성이 군기처 소속이 되었다. 

군기처가 군사사무를 담당하던 임시기구에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는 상설기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제주의 중앙집권 통치의 필요성에 완전히 부합했기 때문이다. 내정에 있었던 군기처는 황제의 명령을 신속하게 집행할 수 있었고 높은 보안성을 갖고 있었다. 설령 왕공대신이라 할지라도 황제의 허락 없이는 군기처로 들어갈 수 없었다. 심지어는 군기처의 창문 밖, 계단 위에도 함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황제가 군기대신을 만날 때는 태감도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군기처는 관리들의 구성이 매우 간단했다. 모든 일은 군기대신이 주관하고 실질적인 처리는 군기장경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 처리가 빨랐고 효율 또한 높았다. 황제는 만한대학사, 상서, 시랑, 경당 등에서 군기대신을 뽑았다. 

군기처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언제나 황제의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황제는 대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해 그들의 권한을 제한했다. 예를 들면 군기처는 황제가 맡기지 않은 일에 대해 물을 권한이 없었다. 또한 황제가 일임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황제의 뜻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군기처를 설치한 후, 황제 아래의 중추권력은 군기처의 권력확대에 따라 점차 전이의 과정을 겪에 된다. 먼저 의정왕대신회의의 권력은 한층 약화되었다. 옹정 시절에는 강희 말년에 시행했던 기주의 권력 약화정책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리고 기주에 대한 엄격한 감시도 잊지 않았다. 

나라의 대사는 더 이상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즉 의정왕대신은 이름뿐인 직함에 머물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 내각의 권력 역시 제한을 받게 된다. 옹정 시절 내각대학사의 관품은 정1품으로 높아졌지만, 군기처의 대신을 겸하지 않는 이상 실질적인 권력은 거의 없었다. 황제는 모든 국가대사를 군기처를 통해 처리했다. 

옹정 시기 군기처의 성격은 군기대신과 군기장경의 임용에서 잘 나타난다. 옹정제는 이친왕 윤상, 대학사 장정옥, 채정석, 악이태, 마이새, 평군왕 복팽, 귀주제족 합원생, 영시위내대신 마란태, 병부상서 성계, 내각학사 쌍희, 이번왕시랑 반제, 난의사 눌친, 도통 망곡립, 풍성액 등을 군기대신으로 삼았으며, 내각시독학사 서현덕, 장병, 병부주사 상균, 서길사 악용안, 내각중서 시조생, 한림원편수 장약애 등을 군기장경으로 삼았다.

 ...채정석은 옹정 4년에 호부상서를 역임했던 인물로 윤상을 도와 재정을 처리함으로써 옹정제의 신임으 얻었다. 마이새는 옹정제에 의해 북로군영 무원대장군에 임명되어 일찍부터 총애를 받았다. 망곡립은 옹정 초년 장로의 염정으로, 옹정제의 환심을 얻었다. 합원생은 서남 개토귀류(소수민족 관리정책)에서 큰 공을 세웠는데, 옹정제는 그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옷을 벗어 하사했다고 한다. 눌친은 옹정제가 병이 위독할 당시 고명대신으로 삼았던 인물이니 그에 대한 신로가 얼마나 컸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장약애와 악용안은 장정옥과의 악이태의 아들이었다. 

..."오직 황제의 측근만이 군기대신이 될 수 있었다. 군기대신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뽑았다." 

이들 측근은 임명된 후 더욱더 황제에게 복종해야 했다. 때문에 군기대신들은 저술이나 전달작업에만 종사할 뿐, 천자와 권력균형을 이루는 재상이  될 수 없었다. 옹정제는 군기처에 '일당화기'라고 쓴 편액을 하사했다. 심복들이 서로 힘을 합쳐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일단 군기처로 온 일은 크든 작든 그날 모두 해결해야만 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업무효율이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조칙을 전달하는 방법도 매우 빨랐다. 장정옥이 제안한 '廷寄'는 군기처에서 조칙의 내용을 봉한 후 병부에 넘겨주면 역참을 통해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군기처는 서신의 내용에 따라 전달속도를 결정했다. 만약 봉투 위에 '마상비송'이라고 쓰여 있으면 전달자는 하루 삼백 리를 달렸다. 더 급한 일이면 하루 동안 가야 할 거리를 따로 써놓기도 했다. 하루에 사백 리, 오백 리, 육백 리, 심지어 팔백 리를 가기도 했다. 

하지만 내각은 그러지 못했다. 내각에서 조칙을 발표하면 육부에서 이를 베껴 쓰거나 관련 부서에서 문서로 만들고 더 많은 부서에 전달이 되었기에 시간낭비가 심했다. 게다가 보안을 지키기도 쉽지 않아 소식을 먼저 안 지방관리들이 공문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대응책을 짜놓는 일도 허다했다. 

...군기처의 관리들은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별다른 특권은 없었다. 군기대신은 매일 세 번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지만 역시 직무 이외의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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