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세계문학전집 13
에밀 졸라 지음, 최애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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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 일대의 역작 '루공-마카르 가'시리즈의 열여섯 번째에 자리 잡은 '꿈'은 비교적 따분하고 재미가 없는 소설이다. 재미로 소설 읽기를 추구하는 독자라면 피해가는 것이 좋겠다. ^^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아그네스 문... 19세기 중반, 얼어붙은 우아즈 강과 피카르디 지방의 평원을 뒤덮은 눈으로 시작된 문장은 마치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의 치밀한 묘사처럼 매력적인 건축물 분석처럼 읽혀 진다. 그러한 묘사 끝에 등장하는 추위에 떨며 쓰러지는 어린 소녀가 있었으니 성당 옆에서 사제복 장인으로 생활하는 위베르 부부에 의해 발견 된다. 9살 업둥이 소녀 앙젤리크는 '황금빛 전설'을 읽으며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기쁨으로 아름답게 성장한다.

어느 날 저녁, 앙젤리크는 때때로 즐겼듯이, 자신의 손에 키스를 하던 중에 분명 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너무도 부끄러워 당황하여 돌아섰다. 그리고 아그네스가 그녀의 몸짓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그네스는 그녀의 육체를 수호하는 성인이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앙젤리크는 그렇게 사랑스러운 소녀가 되어 있었다. (51쪽)    

소녀가 아그네스에 빠져들 무렵, 위베르는 파리에 들러 소녀의 친모가 아주 행실이 나쁜 푸카르 부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온다. 15세가 넘어야 합법적 입양이 가능한 그 시절이었고, 위베르틴이 비공식적인 후견인이 되기 위한 문서가 서명되었다는 사실을 막 확인하고 돌아오는 순간, 위베르는 소녀에게 친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이제 앙젤리크는 위베르부부의 딸이 되었다. 

"행복은 너무도 단순해요. 우린, 우리 같은 사람들은 행복해요. 왜냐고요?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죠. 그게 다예요! 어렵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기다리는 사람이 찾아오는 날, 어머니는 아시게 될 거예요. 우린 곧 서로 알아보게 될 거예요. 한 번도 그를 본 적은 없지만 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요. 그는 그러면서 대답할 거예요. 그러면 다 끝나는 거예요. 영원히. 우리는 어떤 궁전에 가서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 침대에서 잠을 자겠죠. 오! 너무도 간단해요!"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그만해!" 위베르틴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꼬리를 잘랐다. (78쪽)


어머니 위베르틴의 다그침에도 여유로운 미소로 고집스러운 앙젤리크의 사랑론... 딸을 사랑하여 감싸는 위베르...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사제복에 수놓기라는 가업을 잘도 익혀가는 앙젤리크, 백합꽃 자수를 완성시키고 흐뭇해 하는 아름다운 처녀... 카트린의 지혜와 엘리자베트의 겸손함과 아그네스의 순결함을 간직하고 싶었던 그녀... 그리고, 남모를 비밀!

꿈속에서 그녀는 그가 그녀의 침실 커튼의 희끄무레한 히드 덤불 사이로 소리없이 들어오는 것을 분명 보았다. 그녀의 뇌리는 꿈속에서든 깨어 있을 때든 온통 그로 가득했다. 그는 그녀의 그림자 곁에 늘 함께 있는 정다운 그림자였다. 그녀는 비록 혼자였지만 꿈속에서는 두 그림자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만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녀는 위베르틴에게 모든 것을 말해 왔다. 그러나 그것만큼은 위베르틴에게조차 비밀이었다. (105쪽)

매사 즐겁고 행복하며, 새하얀 빨래처럼 순결한 이 처녀의 한 마디가 아름답다.
 
"어머니, 잠시만, 잠시만요!······ 수건들 위로 이 커다란 돌을 얹어야겠어요. 이 도둑질 잘하는 개울물이 옷을 갖고 달아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109쪽)

오전, 개울가에서 빨래를 즐기는 그녀를 훔쳐보던 노동자.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다가 순간의 실수로 캐미솔이 급류에 떠내려 갈 때, 혼신의 힘으로 질주하여 그것을 구해다 주는 청년 노동자. 그리고 오후, 널어 놓은 빨랫감들이 바람에 휘날려 곤혹스러울 때 또 다시 나타나서 도와주는 그 청년 펠리시앵은 자신이 유리 채색공이라고 소개한다. 남몰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선행을 즐겨오던 앙젤리크를 향한 펠리시앵의 스토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사랑 고백은 그녀를 더욱 움추려 들게 만들었고, 그녀를 향한 그의 접근 방식은 자수를 의뢰하는 것으로 변형되었지만 갈수록 냉냉해지는 그녀 때문에 가슴은 더욱 아프다. 하지만 더 아픈 것은 사실 앙젤리크였다.

모녀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사람들은 그녀들을 알아보고 칭송했다. 검소한 면직으로 옷을 입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어머니, 흰색의 얇은 원피스를 입고 대천사의 우아함을 풍기는 딸. 그녀들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그렇게 의자 위에 올라서 있던터라 너무도 눈에 띈 나머지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그럼요, 부인, 그럼요. 저 청년은 주교님의 아들이에요! 그걸 모르셨수?······ 참 잘생겼어. 게다가 부자이기까지 하고. 아! 원한다면 도시를 통째로 살 수 있을만큼 부자지. 백만장자야. 백만장자!" (196쪽)
  

서서히 드러나는 청년의 정체, 전형적인 신데렐라 소설의 전환점을 도는 듯 싶었지만, 그들에게는 역시나 전형적인 방해물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이미 부모들에 의해 준비된 정략 결혼이 아니겠는가. 

"아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결혼 계획이 서 있었던 거지. 모든 게 결정되었던 것 같아. 코르니유 신부님이 오는 가을에 그가 부앵쿠르 가문의 클레르 아가씨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다고 확언을 해 주시더구나······. 부앵쿠르 저택 알지? 저기, 주교 관저 옆에. 그 집안은 주교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란다. 쌍방 모두 가문으로나 재산으로나 그보다 더 좋은 걸 기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 이 결혼에 대해 신부님의 칭송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 (217쪽)

이 소설에는 젊은 남녀의 사랑만이 사랑이 아니었다. 이베르틴의 위대한 사랑은 부모를 등지고 가난한 위베르와 결혼 하기에 이르렀고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저주를 받았었다. 장모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 사위 위베르는 수양딸의 고통에 참지 못하고 울부짖는다.

그는 울었다. 그리고 울면서 외쳤다.
"아! 당신은 지금 저기 위층에 있는 우리 아이에게 형벌을 내리고 있는 거요······. 당신은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것처럼 펠리시앵이 우리 아이와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아. 당신은 그 아이가 당신처럼 겪기를 원치 않고 있어." (263쪽)


허락받지 못한 사랑에 병든 처녀,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이제 영혼 속으로 악이 침투해 오는 다섯 창문인 감각에 기름을 바를 시간이었다. 엄지손가락에 성유를 적시고 그 감각이 살고 있는 그녀의 육체 다섯 부분에 기름을 바르기 시작했을 때, 그의 손에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맨 먼저 눈에, 감은 눈꺼풀 위에, 오른쪽 왼쪽 차례로, 주교는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십자가를 그으며 라틴어로 기도문을 외었다.
"네가 네 눈으로 저지른 죄가 무엇이든 이 성유와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주 하느님께서 네 죄를 사해 주시기를."
음탕한 시선, 불명예스러운 호기심, 광경의 허영, 사악한 독서, 수치스러운 근심을 위해 흘린 눈물, 그러한 시각의 죄악이 속죄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황금빛 전설' 외에 다른 책을 읽은 것이 없었고, 상당 건물의 후진이 그녀에게 다른 세상을 향한 시선을 차단해 버렸으므로 시야를 뻗을 다른 지평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오직 열정에 대항하는 복종의 투쟁 속에서만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296~297쪽)

드디어 허락된 그들의 결혼...

양쪽으로 늘어선 신도들의 울타리 사이로 앙젤리크와 펠리시앵은 성당 문을 향해 느리게 행진했다. 승리를 거둔 지금 그녀는 꿈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들어가기 위해 저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알지 못하던 세계를 향해 눈부신 빛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늦추며 활기찬 집들과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술렁이는 군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너무도 허약해졌고,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거의 안아 들다시피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보석과 여왕의 옷이 가득한 그 왕자의 저택을, 신혼의 방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그 저택을 상상했다. 그녀는 숨이 차서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몇 걸음 더 나아갈 힘을 차렸다. 그녀의 시선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머물렀다. 그녀는 그 영원한 결합이 행복했다. 대성당 문의 문턱, 광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꼭대기에서 그녀는 비틀거렸다. 행복의 끝점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존재의 기쁨이 마감하는 곳이 거기였던가?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몸을 일으켜 펠리시앵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 그 입맞춤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318~319쪽)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결코 해피엔딩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그녀의 죽음은 마냥 슬프지 않은 꿈의 실현으로 해석된다. 죽음 뒤에 본문은 짧게 그 죽음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주교는 죽은 영혼의 해방을 도왔으며, 어머니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위베르 부부는 용서 받았으며, 자신의 꿈을 이루고 행복 속에서 숨을 거둔 그녀는 결코 불행하지 않은 최후를 맞았으며, 모든 것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은 행복이었음을 펠리시앵을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밀 졸라의 필력에 기대하며 뭔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추적해 온 나의 독서는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주의 소설이 어떻고, 유전과 교육과 환경의 메커니즘이 어떻고 하는 찬사는 학자들의 신설 놀음이 아닌가 싶다.

※ 해방의 을유년에 시작된 을유문화사가 세계문학전집을 재기획 한다고 해서 많이 기대했었다.
아마도 민세문집(민음사세계문학전집)의 성공에 자극을 받아 재도전 하는 것 같은데, 민세문집 214권을 우여곡절 끝에 완독한 독자의 입장에서 처음접한 을세문집이 다소 실망스럽다. 5년간 준비했다는 을세문집 시리즈가 하드커버 말고는 민세문집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저 따라하기에 집착하는 듯 싶다. 돌아가신 정진숙 선생님의 꿈이 헛되지 않도록 보다 획기적인 전략으로 맞서주기를 바란다. 독자로서 정말 최고의 시리즈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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