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집 애지시선 28
정군칠 지음 / 애지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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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물집


환한 빛을 따라 나섰네
지금은 달이 문질러 놓은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여에 부딪치는 포말들을
바다의 물집이라 생각했네
부푸는 바다처럼 내 안의 물집도 부풀고
누군가 오래 서성이는 해변의 밤
온통 흰 꽃 핀 화엄의 바다 한켠
애기 업은 돌을 보았네
그 형상 더욱 또렷하였네

제 몸 밀어내고 다른 몸을 품고서야 바다는
해변에 닿는다지
버릴 것 다 버린 바다의 화엄이
저 돌로 굳은 것일까
걸러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참 많았네
목이 쉬도록 섬을 돌았네
단지 섬을 돌았을 뿐인데 목이 쉬었네
파도의 청징淸澄한 칭얼거림이 자꾸만 들려왔네
깍지 낀 손 풀어 그 울음 잠재우고 싶었으나
달빛은 바다 위에서만 출렁거리고
나는 서늘한 어둠의 한켠에 오래
오래 머물지 못했네-26~27쪽

달의 난간


파도는 부드러운 혀를 가졌으나 이 거친 절벽을 만들었습니다

열이레 가을달로 해안은 마모되어 갑니다 지워지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끊어지는 신엄의 오르막길, 바다와 가장 가까운 벼랑에 이르자 누군가 벗어놓은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생의 난간에 이르면 달빛 한 줌의 가벼운 스침에도 긁힌 자국은 선연할 터인데 내 안의 빗금 같은 한 무더기 억새, 바싹 다가온 입술이 마릅니다

生涯의 끝에 이르러 멈추었을 걸음 망설임의 흔적인 듯 바위 틈에 간신히 붙은 뿌리, 뿌리와는 달리 땅 쪽으로 뻗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온몸으로 지나간 길, 마음 한 번 비틀어 曲을 만들고 마음 다시 비틀어 折을 만들었으나 길 밖을 딛었을 자의 흔적은 허공뿐입니다

자주 바람 불어 달이 잠시 흔들렸으나 죽음마저 품어버린 바다는 고요합니다-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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