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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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에서 루비가 떨어져 나갔군. 눈도 사라졌어. 게다가 몸도 금이 아니야." 시장이 말했다. "이거 뭐 거지가 따로 없구먼!"
"거지가 따로 없군요." 시의회 의원들이 말했다.
"게다가 발치에 죽은 새도 있네!"
(행복한 왕자 중에서)-21쪽

결국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완벽한 옆모습에 직업은 없는 쾌활하고 무능한 청년이 된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는 사랑에 빠졌다. 그가 사랑한 처녀는 로러 머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은퇴한 대령으로, 인도에서 자제력과 소화 기능을 잃어버린 후 결국 둘 다 회복하지 못했다. 로러는 휴기를 사모했으며, 휴기는 로러의 구두끈에 입이라도 맞출 태세였다. 이들은 런던에서 가장 잘 생긴 한 쌍이었지만 돈은 한 푼도 없었다. 대령은 휴기를 무척 좋아 했지만 약혼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 일만 파운드가 생기면 오게나, 젊은이. 그때 생각해 보자고."
(모범적인 백만장자 중에서)-132쪽

유령은 가장 무시무시한 웃음을 터뜨렸고, 그 소리가 낡은 둥근 천장에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메아리가 사라지자 곧 문이 하나 열리더니 오티스 부인이 옅은 파란색 실내복 차림으로 나왔다. "몸이 아주 안 좋으신 것 같네요." 오티스 부인이 말했다. "여기 닥터도벨팅크를 가져왔어요. 혹시 소화불량 때문이라면 이게 즉효약이에요."
(캔터빌의 유령 중에서)-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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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 - 소통의 기술, 세상을 향해 나를 여는 방법
유정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품절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느 날 백악관을 찾아온 한 군사전문가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가 떠난 뒤 비서에게 몹시 기분 좋은 어조로 '그 사람 참 말을 잘하는 사람이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전문가가 한 것이라곤 조용히 루스벨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가끔씩 '그렇군요' '아, 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등으로 응수한 것 뿐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통에 대한 관심, 특히 듣기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지 또 하나의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아침 국무회의에 들어오는 각료들에게 평소에 하는 아침 인사인 양 이런 말을 해보았다고 한다.
"내가 어젯밤에 우리 할머니를 죽였답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것 같은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도 대통령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에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엄청난 고백을 하는 최고 통수권자의 말에, 각료들은 마치 날씨 이야기나 진부한 인사에 대꾸하듯 평범한 아침 인사로 대응했다는 것이다.-44~45쪽

막연히 헌혈이 필요하다고 감정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정확히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헌혈하고 있으며 현재 상황에서 혈액이 얼마나 부족한지, 대한헌혈협회나 보건복지부 등 전문기관에서 나온 수치를 제시해야 한다.
의식의 표면에 파문이 일기 시작하면 이제 청자는 입장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와 제안 받은 행동을 수행하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화자는 이때 청자에게 명확한 지침을 제공함으로써 행동의 변화를 망설일 수도 있는 청자가 수행에 나설 수 있도록 돕는다. '헌혈이 그 정도로 필요한 것이구나'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청자가 그 대열에 동참할 수 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나는 빈혈이 있어 피를 뽑으면 몸에 좋지 않다.'는 생각을 불식시킬 수 있는 전문적인 의학 정보를 제공해야 하며 어디에 가서 어떻게 헌혈을 해야 하는 것인지 헌혈하는 절차를 자세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 밖에도 헌혈했던 사람들의 체험담 등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 청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130~131쪽

말을 잘 못하는 데는 표준화된 틀이 있는 것 같다. 거짓이거나 무언가를 감춘 말, 진심이 아닌 판에 박은 듯한 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말, 실은 자신의 의견에 불과하면서 검증된 사실인 것처럼 하는 말, 안 해야 할 말,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말,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하는 말, 현학적이거나 어려운 말, 대중에 영합하거나 잘 보이기 위한 말, 치명적인 오류를 담은 말 등이 그 예이다.-137쪽

말하자면 스스로에게 신용장을 발부하는 행위이다.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대화로부터 잠시 벗어날 것임을 예고하는 방법sin-licences 또한 자주 쓰는 방법이다. '지금 이런 전문적인 이야기가 적절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잠깐만 언급해 보면'이라고 하면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것임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또한 부정적 반응이 나올 것을 알고 있다고 인정하는 방법cognitive disclaimer이 있다. '여러분께서 이 사람을 정신 나간 인간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 제 논리를 들어보시라' 등등.-164~165쪽

찬성측은 이제 왜 길거리에서 흡연이 금지되어야 하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그냥 그게 싫어서' '나는 안피우니까'가 아니라 길거리 흡연을 금지했을 때의 사회적 이해득실 등을 따져 꼼꼼히 논거를 뒷받침해야 한다.
필수 쟁점이란 수많은 잠재적 쟁점 가운데 찬성측이 자신들의 논제를 증명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 주요 쟁점을 말한다. 깨끗한 공기를 마실 권리, 건강 문제, 길거리 흡연을 금지하는 국가가 늘어나는 추세 등 논증을 위한 쟁점은 다양하다.-234쪽

지난 10년간 정부 당국자들은 대북정책에 있어 국민의 뇌리에 '퍼주기'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문제 정의를 남기지 못했고, 대언론 정책에 대해서는 '대못질'이라는 개념에 대적할 만한 문제 정의 만들기에 실패했다. 물론 '퍼주기'라는 개념은 지난 정부의 햇볕정책에 부정적인 언론이 만들어낸 말이지만 정부는 이를 넘어선 개념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비록 '친생명'이라는 옷을 입은 낙태반대론자에게 '반생명'으로 공격당할지라도 낙태찬성론자가 진정으로 펼치고자 하는 취지는 '선택옹호'이다. 이처럼 결과적으로는 '많이 주고' '문을 걸어 잠근' 것이라 해도 적어도 '퍼주기'나 '대못질'만은 아닌, 정책의 선한 개념이 존재하는 것인데, 당국자들은 이를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햇볕정책은 퍼주기가 아닌 '나누기', 대언론 정책은 대못질이 아닌 '거리두기'라는 개념 정의가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 확실히 자리잡아 국민들과 공유되었다면, 대선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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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2 2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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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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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11월11일...

온라인 서점 알라딘과 창작과비평사가 공동으로 배려한 영화시사회를 다녀왔다.
처음 영화 제목을 보고 개나 늑대를 연상시키는 동물 이리를 생각했었는데, 밀양처럼 '이리'라는 지명을 의미하는 제목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부터 정확히 31년 전인 1977년 11월11일에 전라북도 이리시에서는 대형 참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비롯된 영화다.

그 사건 현장에는 가수 하춘화와 지금은 작고하신 코메디언 이주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요새 말하는 의도적인 테러와는 무관한 사건으로 기록되는데, 이리역(현재 익산역)에 정차해 있던  한국화약(현재 한화)의 화물 열차에 실려있던 대량의 폭발물이 관리 소홀로 폭발했던 대형 사건이다. 정식 책임자도 없이  허술한 안전 의식이 불러온 사고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맥을 같이 하는 부끄러운 인재였으며 이리역에 지름 30미터 깊이 10미터의 거대한 웅덩이가 파인 규모였다고 한다.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톤이나 되는 대량 폭발이라 이리역 주변 반경 500미터 이내의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1,647세대 7,8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영화는 작년 오늘, 그러니까 이리역폭발사고 30주년을 맞이한 추모행사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사건 당시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으며, 사건 이듬해에 태어난 1978년생으로 2007년11월11일 현재 서른살인 윤서가 주인공이다.
영화 도중에 중국인 학원선생과 대화중에 윤서 자신이 밝히듯 그녀는 태아 때 그 진동을 느낀 후, 비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백치이다.
윤서는 동네에서 미친년으로 통하고, 아무나 집적거리는 백치이지만 마음이 곱고 한없이 착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슬픈 존재이다.
윤서는 익산역을 사이에 두고 아파트 노인정과 기찻길 옆 중국어 학원을 육교로 넘나들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생활하는 백치 처녀다.
택시 기사인 그녀의 오빠 태웅은 그녀를 돌보며 모형 건축물 조립을 유일한 취미로 생활하는 삶이 괴로운 존재이다.
윤서는 노인정과 임금 체불이나 하는 중국어 학원 청소와 잔심부름을 하는 백치지만 오빠와 달리 큰 불만이 없는 삶이 행복한 존재이다.

노인정을 배경으로 전라도 노인들의 사투리가 정겹고, 소외층인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외롭고 또 외롭다.
불법체류자인 노동자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아들에게 불러주는 그 자신의 모국어로 된 노래가 정겹고 그의 비참한 처지가 측은했다.
그 지방의 단체 중에 컨테이너를 아지트로 둔 베트남 참전용사들인 노인들의 모임도 참으로 우수꽝스럽고 천박하다.
윤서가 일하는 중국어 학원의 선생님이 고향의 애인과 2년만의 재회를 예고하며 기뻐하는 통화 내용이 애틋 했다.
아빠의 과일가게를 봐주며 공부하던 예진이라는 소녀와 윤서의 우정이 예진의 죽음으로 슬퍼졌던 영화다.

동생 일이라면 타고 있던 손님마저 끌어 내리고 달려가는 태웅, 누구 씨인지도 모르고 유산한 동생을 산부인과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는 그의 처지는 어디 호소할 곳이 없다. 동생을 위해 콘돔을 한 뭉탱이 사주지만 윤서는 그러한 상황에서 사용하지도 못하고 그냥 당한다. 정신과 달리 육체가 건강한 탓인지 그녀는 매번 임신을 한다.
임신한 그녀가 몸이 아파 쓰러져 있을 때 부축해 집(노인정)에 데려다 줬을 뿐인데, 강간범으로 몰린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가 슬프다.
친오빠에게 몸을 바치려다 발길질 당하는 윤서가 괴롭고, 그렇게 지쳐 노인정으로 나와 잠든 윤서의 냄새를 맡던 왕따 노인도 슬프다.
왕따 노인은 윤서의 냄새를 맡던 그날 밤 목을 메달아 세상을 떠나지만 윤서는 노인의 죽음에 별다른 느낌이 없는 백치일 뿐이다.

익산역에 내려 태웅의 택시를 타고 모현아파트 노인정을 찾아가는 노신사, 그는 오래 전 애인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남자다.
옛사랑을 만나 침묵으로 대화하는 두 노인을 바라보는 윤서의 시선이 즐겁고, 그 뒤로 지나가는 할머니 노래패의 '부산정거장'이 즐겁다.

원하지도 않는 털모자 하나 사주고 굴다리로 끌고가 윤서를 겁탈하는 변태 놈을 보는 건 고역이었다.
태웅의 택시비를 떼먹고 교회 뒷문으로 달아나는 놈도 참 짠했다. 그렇게 살아 뭐하리...

또 다시 임신한 윤서를 말없이 택시에 태우고 바다로 나갔다가 혼자만 돌아오는 태웅이 무섭다.
태웅을 짝사랑 하는 다방 여종업원의 실수가 용서할 수 없는 보는 것을 불편하게 했다.
새로 부임한 중국어 선생이 만난 윤서는 무엇일까?

이 모든 부조리함 속에 조리는 마치 다음과 같이 묻는듯 하다.

"당신들은 1977년 11월11일 밤 9시15분이 낳은 상처를 기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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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 - The Guardi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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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질문의 연속이다.
이 영화는 인생의 황금기를 다 보낸 사나이와 인생의 황금기를 이제 막 시작하려는 사나이가 해상구조대 교관과 훈련생으로 만나 각자의 상처를 이겨내고 사제의 정을 쌓아 가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선택 뒤에도 끊임없는 반복되는 크고작은 선택의 질문들 속에서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자네에겐 2가지 선택권이 있어. 서류에 오늘 서명하면 자네는 여기 코디악에서 시민처럼 살 수 있어. 아니면, 내가 권한 A스쿨 교관이 되던가."
오로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삶도 돌아볼 틈이 없는 최고의 구조대원 벤 랜달... 구조대장(클랜시 브라운)은 우정어린 제안을 하고, 결국 벤은 아내 헬렌의 이혼 요청 상태에서 A스쿨 교관의 길을 선택한다.

"당신은 2가지 중 한가지를 선택할 수 있어요. 다시 돌아가거나, 나와 함께 나가서 현금을 반으로 나누는 것이죠."
동료 훈련생들과 바에서 내기를 하는 제이크 피서...
그는 홀로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인(멜리사 세이지밀러)에 다가가서 말을 걸지만 선수에게 걸렸다. 동료들의 내기돈을 반땅하면서 시작된 두 사람은 관계는 캐주얼(?)한 사랑으로 훈련기간 동안 또 다른 선택의 숙제를 남긴다. 

또 다른 질문도 있다.
"숫자 2의 의미는 뭐야?"
"내뒤에 오는 녀석들이 자기들이 몇 등 할건지 가르쳐주는거야."
캐쥬얼한 사랑의 여인멜리사 세이지밀러가 제이크의 오른쪽 어깨 뒤에 숫자 문신에 대해 묻자 하는 대답... 즐겁다.

TheGuardian.jpg

"스물 둘!"
"스물 둘이요? 괜찮네요 그정도면. 2백은 아니지만 뭐..."
"내가 잃은 사람들 숫자야. 제이크... 유일하게 세고 있었던 숫자야."

떠나는 벤에게 제이크가 마지막 질문이라며 평생 구조한 사람들 수에 대해서 묻는다.
숫자 2만으로 이 영화를 보다가 22이라는 숫자에서 진한 감동이 밀려 들어 왔다.

요새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영화 '해운대'의 해양구조신은 이 영화의 첫 구조장면과 마지막 구조 장면과 매우 흡사한 감동을 보여 준다.
두 영화 모두 멋진 장면을 보여주는데... 해운대는 이 영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우리 모두 누군가의 가디언이 되고 싶어지는 영화...
인생에 대한 멋진 이야기가 이 영화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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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텐 - Adrift in Tok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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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의 상징이 된 신축건물 ECC 센터내 Arthouse MoMo,
그 곳에서 내가 처음 보았던 영화는 '후지타 요시나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텐텐'이었다.

우리 말에 '여기저기 전전한다.'는 듣기에 따라 다소 굴욕적인 말이 있다.
여기서 '전전'은 이리 '저리 굴러다니거나 옮겨 다닌다.'는 의미로 구를 전(轉)자의 중복 발음인데, 이것을 일본어 발음으로 그대로 옮기면 텐텐(轉轉)이 된다. 즉, 이 영화 텐텐은 우리말로 '전전' 혹은 '산책'으로 번역될만한 것이며, 두 남자의 도쿄산책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영화에 특히 끌렸던 것은 며칠 전 아내가 한 사흘 정도 기습적으로 일본여행이나 다녀 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화는 제법 단순한 이유로 시작된다.
법대를 졸업하지 못한 불우한 청년 후미야(오다기리 죠)는 혈혈단신으로 84만엔의 사채 빚이 있다.
그에게 찾아온 중년의 빚쟁이 후쿠하라(미우라 토모카즈)는 사흘 안에 빚을 청산하라는 최후 통첩을 남기고 떠난다.
하지만, 이 젊은이에게 뚜렷한 묘안은 없다. 어떤 격언처럼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를 생각해 보지만 뚜렷하게 두드려볼만한 대상이나 공간 자체가 없는 참으로 대책없는 불쌍한 청년이다. 역전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물함 열쇠에 양심도 팔아 보지만 역시 대안은 없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후쿠하라의 미행에 노출되어 있다.
아무런 대안없는 후미야에게 빚쟁이 후쿠하라는 사흘에서 한달간 자신과 도쿄 산책에 동행하는 조건으로 100만엔이라는 거금을 제시한다. 후미야는 그 제안이 탐탁치 않고 의심스럽지만 뚜렷한 대안이 없는 상태이므로 거부하지 못하고 약속에 응한다. 그들의 산책 최종 목적지는 도쿄에서 가장 큰 경찰서가 있는 카스미가세키... 정확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직은 목적도 알려지지 않은 산책 노예가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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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곳으로 가야하는지도 모르는 채 오로지 돈 때문에 동행하는 젊은이와 묵묵하게 청년을 끌고 가는 중년의 사나이...
그들의 발길 닿는대로 따라가다보면 즐겁고, 상쾌하지만 이면에 감춰진 사연들을 하나 둘씩 알게되면 뭉클한 감동이 있다.

키치조지의 진다이 식물공원 벤치에서 제안받은 이 산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관광코스가 된다.
이노카시라 공원 - 달꼬치집 이세야 - 행운의 배우 키시베 잇토쿠 - 아사가야의 어떤 신사참배 - 빗뽀리역 근처의 아이위가게 - 코스프레 나이트 - 패션전문학교 문화복장학원 - 신주쿠 중앙공원 - 칸다강의 오모카게 다리 - 스미다가와의 시계방과 주택가 - 우에노 동물원 - 아사쿠사에 있는 아담한 하나야시키유원지 - 카스미가세키까지...

아마도 이 영화는 국내에서 아직 인기를 찾지 못한 것 같다.
반일감정으로 치부하기에 일본문학과 일본영화는 그 자체로 꽤 괜찮은 것들이 많다.
이 영화 속 슈퍼마켓 종업원들의 수다와 같은 시끄러운 잡스러움마저도 즐겁다.
산책하는 두 남자가 전해주는 황당한 설정과 잔잔한 감동도 예사롭지가 않다.

후쿠하라는 왜 후미야에게 이런 선심성 동행산책 아르바이트를 제안한 것일까? 후미야는 이 산책으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

그리고, 이 영화의 산책 코스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 부부의 도쿄산책 코스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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