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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 - 개정2판 ㅣ 창비아동문고 46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트 그림 / 창비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말괄량이 삐삐'와 '개구장이 에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독한 말썽꾸러기 녀석들을 탄생시킨이 스웨덴의 여류 작가에게 어린 시절을 빚지고 있는 셈이다. 린드그렌이 말썽꾸러기의 이야기를 쓰기 전까지만 해도 스웨덴의 동화는 얌전하고 착한 어린이라든가 '사가(saga)'라는 전설 속의 영웅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삐삐'의 이야기가 출판되고 나서도 어린이들을 개구장이로 만들지 않을까 하고 꽤나 걱정하던 학자들의 노파심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린드그렌은 그저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는 딱딱하고 교훈적인 이야기로 이것저것 참견하고 뭔가를 시키려고 드는 어른들의 틈에서 짓눌리고 구겨지기 십상인 아이들의 마음을 펴주는 것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봐주고 '그 시기가 아니면 해보지 못하는 상상과 모험의 세계'를 긍정적인 눈으로 봐주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의 걱정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어른들과는 다른 눈높이(신체적인 눈높이 조차도 어른들과는 너무나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너무나도 다른 아이들의 눈높이)를 가진 아이들을 어른들의 편리함의 잣대에 맞춘 '작은 어른'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거대한 틀에 처음 접하면서 나름의 생각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말썽과 모험, 고난, 즐거움 등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
이제는 어린 개구장이 시절로 돌아갈수도, 똑같은 말썽을 피울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린드그렌의 어린이관처럼 그것은 어린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에.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린드그렌의 이야기가 가치가 있는 것은 아이들의 흥미진진한 삶을 어떻게 긍정해주고 어떠한 눈높이로 봐주어야 하는지를 어른들에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작은 씨앗하나가 제 힘으로 지구의 중력을 이기며 줄기를 돋우고 잎을 틔우고 꽃을 맺고 열매를 맺는다. 생명이 자라는 모든 과정에 필요한 것은 위험에서 보호해 줄 수 있는 따뜻한 관심이지 몇 센티를 자라야 하고, 어떤 색 꽃을 피워야 하고,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강요가 아니란 점을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고 싶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이야기 하고자 했는데 옆길로 너무 많이 샜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동화책 중에서 가장 먼저 읽었던 책이었다. 여태껏 린드그렌이 보여주었던 말썽장이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주인공과 세계의 모습. 그 뿐 아니라 작가가 살았던, 미-소 냉전 시대, 이데올로기로 격앙되어 있었던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정치의식과 풍자정신이 동화 속에서 어떻게 보여 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책이었고, 간결하고 멋진 삽화들이 있어 상황들을 눈으로도 볼 수 있었지만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계속 할 정도였다.
모험 소설은 얼마나 생생하게 주인공과 읽는 독자가 일체감을 느끼느냐에 따라 그 흥미와 재미가 따라오게 된다. 분량이 꽤 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밤을 꼬박 새고 말았다. 고 3 때도 정시에 자고 정시에 일어나던 내가, 대학교 시험기간동안에도 잠은 꼭 자던 내가 왜? 이유는 재미있으니까다. 즐겁고 재미있는 일은 손에서 놓으려면 꼭 아쉬움을 동반한다. 그러나,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계속 주인공들과 함께 모험을 했으며 모험이 끝나고 희뿌연 아침햇살이 창가를 밝히는 것을 보면서 왠지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는 ‘나’, 즉 동생 ‘카알 레욘(사자라는 뜻)’이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전개가 된다. 나는 기침으로 언제나 부엌 옆 낡은 소파에 누워 있어야 하는 병약한 아이이고, 바다에 나갔다가 영영 소식이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의 바느질 가게 손님들조차도 ‘나’의 죽음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처지에 있다. 그에 비해 형 ‘요나탄 레욘’은 왕자님과 같은 멋진 용모에, 공부도 1등이고 힘도 학교에서 가장 세고, 거기다 친절하기까지 하다.
잘난 형 '요나탄'이 주인공이 아니고 왜 골골거리며 죽음이 얼마남지 않은 '카알'이 주인공일까란 생각을 잠시 하게 되는데, 동물의 세계에서는 골골거리며 병약한 어린 것들에게는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인간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도움과 보살핌이 없이는 동물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아이들은 사회속에서 시들어가다가 죽게 된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 또한 '나'라는 '카알'의 작은 몸에 감정이 이입되어서 처음에는 죽음이 두렵고 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힘 쎄고 용감한 형 '요나탄'이 주인공이었으면 어쩌면 이야기가 당연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작고 초라한 '내'가 주인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바뀔지를 계속 따라가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형 '요나탄'은 형제이면서도 선생이고 조력자이며 동료이다. 그리고, 현실 속의 '요나탄'은 병약한 '나'를 돌봐 주고 '낭기열라'라고 하는 죽음 후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급기야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현실 속에서는 불타는 집안으로 뛰어들어 '나'를 업은 채 2층에서 뛰어내려 죽게 된다. 이렇게 그는 죽음으로써 '낭기열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작고 여리고 겁도 많은데다 병약하기까지하다. 그러나, 형 '요나탄'이 말해준 '낭기열라'의 이야기를 듣고난 후, 현실 속에서는 죽었지만 '낭기열라'에서 '나'를 기다릴 '요나탄'이 무척 그리워졌다. 아이들이 겪게 되는 첫번째 통과의례의 원동력. 그것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어리고 나약한 존재로 남아있기 보다는 사랑하는 이의 바램대로 성장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고 그렇게 아이들은 자라게 된다. 현실 속의 '나'는 죽게 되지만 그 허물을 벗고 성장한 '나'는 '낭기열라'로 가 있게 된다. 물론, 인간정신의 성장이 메뚜기 탈피하듯 그렇게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아이가 집에 있다면 관찰해보시는 것은 어떠실지...
새로 태어난 세상이 두려워 울기만 하던 아기들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부모의 음성을 알아듣고 미소짓고, 부모의 음성을 배우고 따라하는 것은 아이들이 나름의 통과의례를 부모를 위해 겪었기 때문이다. (자폐아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이다. 한 단계를 넘지 못하니 다음단계로 성숙할 수 있는 길이 막힌 것이다. 어른들만큼 아이들도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나름의 과정을 밟고 있음을 잊지 말자.)
형 '요나탄'은 약속대로 '낭기열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낭기열라에 온 '나'는 예전의 병약하기만 한 아이가 아니고 형과 함께 사냥도 하고 작은 토끼도 돌보고 이웃 아주머니 꽃밭을 가꾸며 먹을 것을 구하게 될 정도로 자신의 앞가림을 하는 아이가 되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듯 보이는 '낭기열라'
그러나, '낭기열라'도 그저 평화로운 곳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판단하게 된 것은 '나'의 세상을 보는 눈이 예전과 다르게 조금씩 넓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낭기열라'는 '텡일'이란 독재자가 '들장미 골짜기'를 장악함으로써 행복한 '벚나무 골짜기'와 '텡일'의 지배속에 핍박을 받는 '들장미 골짜기'로 나눠지게 되었다. 형과 '벚나무 골짜기'의 아름다운 오두막집에서 살던 나는 수탉 주점이라는 어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까지 진출하게 되고 형으로부터 '텡일'의 무서운 독재속에서 신음하는 '들장미 골짜기'의 이야기도 듣게 된다.
눈이 넓어진만큼 두려움은 더 커져만 갔고, 세상은 아름다운 '벚나무 골짜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들장미 골짜기'가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작고 어리기만 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형 '요나탄'은 '들장미 골짜기'에서 '텡일'에게 저항하던 지도자 '오르바르'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구하기 위해 '들장미 골짜기'로 떠나게 된다. 나는 또다시 기로에 서게 됐다. '벚나무 골짜기'에 마을 아주머니랑 남아있으면 안전하게 지낼 수는 있겠지만 형을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국 나는 먼저 떠난 형을 찾아서 '들장미 골짜기'로 혼자 떠나게 된다. 혼자서 산 속에서 지내고 가파른 골짜기 돌길을 걷다가 '벚나무 골짜기'의 배신자가 '텡일'의 군사들에게 정보를 넘기는 것을 엿듣게 된 나는 잘못해서 '텡일'의 군사들에게 들켜 잡혀 버렸다. 이제 형도 없고 나를 지킬 수 밖에 없는 것은 오직 나뿐인 막막함.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꼬마일 뿐인 나를 이용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것도 꼬마 얼간이인데다 원래 '들장미 골짜기'에 살던 아이처럼 행동하고 거짓말로 그들을 설득시켜 '들장미 골짜기'까지 그들의 안내를 받아 가게 된 것이다. 기적처럼 '벚나무 골짜기'와 '들장미 골짜기'의 연락책을 맡으며 '오르바르'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던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집에서 그리운 형도 만나게 되고.
'들장미 골짜기'에서 '요나탄'은 그들을 '텡일'에게서 해방시켜줄 '사자왕'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여전히 나에게는 영웅과도 같은 형.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들장미 골짜기'에 온 덕분에 '텡일'의 무기인 '캬틀라(불을 뿜는 용으로 불길에 닿은 사람은 모두 독에 중독되어 죽거나 평생 마비된 채 살아야 한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내가 알게된 중요한 정보도 형에게 건네주었으며, 형과 함께 '오르바르'를 구출하기까지 한다. '벚나무 골짜기'에서만 해도 형의 도움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내가 이젠 형의 유능한 조력자가 되어서 형과 함께 말을 달리고 있다.
'벚나무 골짜기'와 '들장미 골짜기'의 연합이 '오르바르'의 구출로 이루어짐으로써, '텡일'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형 '요나탄'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승리를 위해서는 텡일과의 전쟁도, 사람을 죽이는 것도 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오르바르'와의 대립에 결국 지고말아 '요나탄'은 지켜보겠다고 한다. '캬틀라'를 조정하는 나팔을 불며 '텡일'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보다 못한 '요나탄'은 나팔을 뺏어서 '캬틀라'를 조정함으로써 '텡일'들을 섬멸하게 된다.
전쟁은 끝났으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인 '요나탄'은 끝내 '캬틀라'의 불길에 맞아서 온몸이 마비된 채 조금씩 죽어가게 된다. 나는 또다시 버림받게 되는 것인가? '낭기열라'의 평화, 지긋지긋한 투쟁과 노력으로 얻어낸 것인데 형이 없는 곳에서 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형 '요나탄'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에게 '낭길리마'의 이야기를 해준다. 또다른 죽음에 대한 이야기, 아니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요나탄은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난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젠 내가 형을 업고 '낭길리마'의 문을 열기로 마음먹는다. 형을 업고 뛰어내린 낭떠러지에는 '낭길리마'로 가는 빛이 보이고 있었다.
'나'는 두번째 통과의례를 방금 뛰어넘었다. 영웅과도 같은 '요나탄'을 뛰어넘으며, 그를 살리기 위해 내 한계를 뛰어넘으며 또다른 세상으로 가게 된 것이다. 첫번째 통과의례 후의 세상과는 달리 두번째 통과의례 후의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 통과의례를 지난 사람들이 그만큼 별로 없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자신의 맡은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혜와 용기를 갖추게 된 아이들에게 '다른 이를 업고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내리는' 이와 같은 통과의례를 의식하게 하고 통과하도록 할 수 있을까?
너무 재미있어서 다시 꼼꼼히 재독을 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나탄' 형은 린드그렌 여사의 화신(化身)이었다. 나약한 나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며 나의 스승이 되고 길라잡이가 되었던 그였지만, 그 또한 전쟁이라는 거대한 괴물앞에서는 고민할 수 밖에 없는 한 인간. '요나탄'이 전쟁전에는 물에 휩쓸려가는 '텡일'의 부하를 살려주면서 "그게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나도 몰라. 어쨌든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인데, 만일 그걸 하지 않으면 쓰레기처럼 하잘 것없는 사람이 되는거야." 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텡일'을 죽여서 평화를 얻는데 가장 기여한 사람이 '요나탄'이었으므로. 아마도 그와 같은 고민이 '낭기열라'의 평화 후 '요나탄'을 죽이는 것으로 결말을 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린드그렌 여사는 죽어가는 '요나탄'의 몸이 되어 나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치열한 냉전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인간으로써 인간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과 냉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독재자를 몰아내는 폭력의 정당성을 함께 고려하고 있는 제 마음을 보았습니다. 제 도덕성은 이런 모순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음 세대들이여! 내 세대에서 만약 전쟁이 끝나게 된다면 그대들은 자신 속에 갖혀 있지말고, 새로운 세상을 위해 힘든 이들, 죽어가는 이들, 아픈 이들을 업고 뛰어주지 않으렵니까? 물론 선택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겠지만, 아직까지 보지 못한 빛을, 새로운 세상을 보는 방법은 오직 그것 뿐이랍니다." 라고.
'소설 속의 나'는 흔쾌히 넘었던 통과의례였는데 '현실의 나'는 아직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멀뚱히 두번째 통과의례 앞에 서 있다. 두번째 통과의례의 원동력이 뭔지 아직 알지 못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