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중간에 그 일을 접는다는 것은 앞의 모든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든다는 것이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제동을 걸어 그 시간에서 빠져 나오고 싶은 마음이 드는걸요.  누구는 도피라고 말하고 누구는 그런 선택도 너의 자유야..라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구는 아쉬워요..라고 말을 하더군요.

요즘 며칠동안 내가 축적했던 시간의 무거움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인연의 끈이든 내 기억의 무게든 다른 이에 대한 책임감이든 그 시간 속에 뭔가가 일어났던 것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은 것을 보면 말이지요.

2. 샤워를 하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음악을 듣습니다.  사소한 일들로 예민해져 버린 감각들을 조금은 느슨하게 해주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치유가 아니라 하루하루의 땜빵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땜빵과 납땜 자국으로 가득한 몸과 마음을 바라보며 괜찮은 척 하며 사는 것.... 쓸쓸한 일이긴 합니다만 누구나 그렇게 사는 것, 아니런지요.

3. 이제 잠들어야 할 거 같습니다.  잠이란 것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 얼마나 다행인가? 를 생각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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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2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 10시에 일어났다가 11시 10분에 또 한시간 삼십분을 잤다는....
오늘밤은 안녕히 주무시길^^

클레어 2005-07-21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잘 주무셨나요? 밤에만 나타나는 저에게 다가오시는 여우님... 좋아요..흐흐~ 이사 잘 하시길...아가염소들이 여름볕에 쑥쑥 크는 것처럼 여우님도 새로운 곳에서 쑥쑥 생기발랄해지실 거라 생각해요. 어린 것들 이야기 해주시는 여우님 이야기가 너무 좋아요..항상 기대하며 보고 있답니다. ^^
 

어제 늦게까지 마신 술의 숙취로 오늘 내내 힘들었다. 지금에야 정신을 차리긴 했는데 정신은 반 쯤 나가도 해야할 일들은 모두 해내고 있으니 오랫동안 직업훈련에 투자한  시간을 몸이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어쨋거나 깨질듯한 머리 속에서도 떠오르는 말은 하나였다.

"역시....젠장.."

거미같은 인간이 있다.  여기저기 보이지 않는 그물망으로 숨막히게 하는...거기다 자신의 손에는 절대로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는 지저분한 곳을 구르게 만드는...그런 사람이...

어제 술자리에서 사무장과 한잔하면서 원장의 계산을 다시 역계산 했다.

병원내 직원중 하나도  좋은 자리로 함께 옮겨줄테니 어짜피 직장을 옮길거면 원장과 사무장이 아는 곳으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은근슬쩍 날 떠본다. 비열하다. 사람들의 인사권을 이용해서 가뜩이나 동료들을 소중히 여기는 나에게 앞으로의 나의 행보가 병원직원의 인사이동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방법을 구사하는 원장의 비열함이 역겨웠다.

사무장에게는 참고만 하겠다고 말했으나  약간 마음이 흔들렸고, 술을 마시며 마음을 다시 잡았다.

- 이만큼 휘둘렸으면 되었다. 그 병원직원도 자기문제는 알아서 하겠지..내가 지지해줄 문제는 아니다. -

빨리 직장을 떠날 7월 말만 기다리고 있다.

거미같은 인간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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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9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5-07-1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사람들이 함께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 역겹지만
그게 또 세상살이라...어렵군요.
에오스님, 너무 거미줄에 매이지 마셨으면....

클레어 2005-07-20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닥님/ 흐흐~

파란여우님/ 부비부비~ 여우꼬랑지 털에 잠시만 기대도 될까요?
 

유리의 技術/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끓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환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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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유명한 대사는 천계영의 '언플러그드 보이'라는 만화에서 나온 말이다.

2. 직장 앞에 '영양탕'집이 생겼다. 가뜩이나 요즘 몸이 허해졌다 느끼고 있는데(과학을 한다는 인간이 이와 같은 표현을 쓴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서두 뾰족하니 대체를 할 말을 찾기 귀찮다.-_-) '왠 째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여기서 잠깐. '영양탕'집에 가보면 알겠지만 멍멍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삼계탕도 판다.  내일이 초복이지 않은가? 벼..변명이 되나?? -_-;;;)

요즘 개업집에서는 연례행사처럼 행사 도우미들을 불러서 시끄러운 음악과 함께 화려한 춤실력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출근시간부터 뿡짝뿡짝~거리는 음악과 함께 숏팬츠에 탱크탑을 입은 긴 다리의 아가씨들이 열심히 춤을 추며 홍보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고 보던 사람들도 하나둘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그들은 춤을 추는데 그들의 앞을 비켜가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여전히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들 옆 바람인형이 너훌거리듯 그렇게..그렇게 말이다.

이목을 끌지 못하는 행사 도우미.. 모두가 짜증을 내면서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그녀들에게 춤은 무엇인가?

미끈한 몸매와 길쭉길쭉한 팔다리에서 뿜어내는 율동이 전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낭비되고 있음을 그들도 느끼고 있을까? 하루 일당에 맞추어 추는 춤, 어떤 개업식에서나 볼 수 있는 그녀의 춤은 바람인형의 춤과 비슷한 면이 있는 듯 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3. 하루좽일 그녀들의 춤과 소란스러운 바깥 광경 때문에 산만해진 정신머리는 '힙합'을 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런 의미없이 소비되는 음악과 그녀들의 동작들이 폭력으로 내 머리를 흔들어 놓고 있다. .. -_-

에어로빅장에라도 왔다고 생각하고 그녀들의 춤을 따라라도 한다면 조금은 이 상황이 의미가 있어질까?

에라~ 잘 모를 때는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다.

사무실 문을 잠그고 스텝을 간만에 밟아보다.. -_-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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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15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영상으로 보여주셈^^

클레어 2005-07-1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저는 짝춤아니면 동영상 안찍습니다..ㅋㅋ 여우님과 춤출 기회가 있다면 동영상을 찍지요..우헤헤~
 

 

 

 

 

며칠안에 구입하려고 벼르고 있는 넘입니다. -_- 당근, 이문재 시인의 시집이구요..

이문재 시인 (시 창작론)

1. 글쓰기는 말걸기이다(듣기가 읽기인 것처럼)

누구에겐가 말을 건다는 것은 첫 마디를 던진다는 것이다. 처음 몇 마디가 뒤엉켜 버리면
끝장이다. 내 후배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을 꺼내는 친구가 있다. “저어, 있잖아
요, 제가, 며칠 전부터 생각한 것인데요, 선배에게도 전에 한 번 말씀을 드린 사항인데……”

그래서 그 후배가 다가오면 나는 이렇게 쐐기부터 박는다. “너, 결론부터 말해.”

글도 마찬가지다. 모든 글쓰기는 첫 문장 쓰기이다. 나는 후배 기자들에게, 기사의 첫 문
장은 ‘호객 행위’라고 말한다. 단편소설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필름도
도입부를 매우 중시한다. 리모콘이 등장한 이후, 텔레비전 프로그램, CF 제작자들은 강박
증이 생겼다. 첫 장면에 승부를 걸어라. 처음 몇 초 안에, 시청자를 붙잡지 못하면, 채널
을 바꾸기 때문이다. 모든 글은 첫 문장이다!


이 지면을 통해, 글 잘 쓰는 비결을 하나 공개한다. 내가 잘 아는(이름 석 자 가운데 한
자만 대도 독자들 대부분이 알 수 있는) 시인은 시를 한 편 완성하고 나면, 첫 문장을 백
번 이상 소리내어 읽는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다시 읽어 본다. 첫 문장이 흡족해야 시를
발표하는 것이다. 거듭 반복한다. 첫 문장에 목숨을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의 시(쓰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절실한 것이며, 절실하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창과 학생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도 시(쓰기)가
자신에게 왜 필요한 것인지 명쾌하게 정돈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에 일고여덟은 ‘나 자신
과 대화하기 위해서’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까운 이
들과 좋은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시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라
고 답한 학생은 거의 없었다.

상대적으로 글쓰기와는 무관한 젊은이들에게 두 번째 질문(꿈이 있다면, 그걸 한 문장으로
말해 보라)을 던졌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출판사에 다니는 젊은 편집자들과 술을 마
시다가 꿈을 물어 보았더니, 몇몇은 당혹스러워했고, 몇몇은 ‘있는데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한둘은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했다고 여기는 기색이었다.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없는
꿈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내 지론을 강요했다간 싸움이 날 판이었다. 나는 ‘우리는
꿈꾼 것만을 이룰 수 있다’는 무하마드 유누스(〈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의 저자.
방글라데시의 대안 운동가)의 잠언을 들려 주고 싶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시는 왜 필요한가? 나는 ‘마지막 개인’으로서의 나를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시(쓰기)가 필요하다. 시(쓰기)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단독자가 아니다.
완전한 포로다. 나는 이 거대 도시가 요구하는 온갖 제도와 가치로부터 이탈해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없다. 나는 이 반인간적인 문명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말해 늘 깨어 있기 위해 시(쓰기)를 필요로 한다. 시를 쓰는 순간,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
는 시간만큼, 나는 이 우주 안에서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악기이기를 지향
하면서도 나의 시는 아직, 수시로 무기이다(이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지면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마지 않는, 한 문장의 꿈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쁘게 가난을 선택할
수 있게 하소서’이다. 산업 문명으로부터 완벽하게 이탈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도시에서
스스로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기생의 존재’가 도시를 떠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생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쌀 한 톨을 일궈내는 데도 삼라만상이 참여해야 한다). 야생조
차도 인간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과학적 보고서가 있는 터에, 함부로 도시의 바깥을
상정하는 것도 유아적으로 보인다.

시를 통해 자기 삶과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도시적 삶의 그늘로부터
한 뼘씩이나마 벗어나고 싶은 독자가 ‘아직도’ 있다면, 감히 한 권의 책을 권한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권진욱 옮김, 한문화). 이 책을 한 번
읽어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면, 당신은 이미 이전의 당신이 아니다. 미국의 글쓰기 지도
전문가인 나탈리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권하고 있다. ‘여러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꿈에 대해서 5분 동안 써 보십시오’.



2. 문제는 감각이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축구 경기를 보다 보면, 간혹 ‘감각적인 플레이’라는 멘트가 나온다.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선수’라는 표현도 자주 접한다. 최상의 기량이라는 찬사다. 지난
해 6월, 월드컵 축구대회 대 폴란드 전에서 황선홍 선수가 이을용 선수의 패스를 받아 성공
시킨 골 같은 경우 말이다. 황선홍은 골대를 보지 않고 슛을 날렸다.

스포츠에서는 ‘감각적’이라는 수사가 극찬이지만, 시에서는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시에서 감각적이라는 평가 앞에는 대개 ‘지나치게’라는 부사가 붙는다. 감각이 승한 시는
깊이가 없다는 전통적인 잣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비평’에 동의하지 않
는다. 지나치면 그르치는 것이 어디 감각뿐이랴. 상상력에서부터 이미지, 리듬, 관념어,
주제의식 등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 가운데 지나침이 허용되는 것은 없다.

나는 감각적인 시를 옹호하는 편이다. 감각없는 축구 선수가 드리블이 좋지 않듯이, 감각적
형상화가 서툰 시는 생생하지 않다. 감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가벼운 감각이 가벼울
따름이다. 감각에는 깊이가 없다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감각은 몸과 마음의 경계이다.
감각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있는 가교이다. 시인은 감각을 통해 (자아를 포함한) 세계와 만
나고, 독자는 감각을 통해 시와 교감한다.

실존은 감각의 실존이다. 감각의 실존 가운데 가장 앞서 가 있거나 높이 있는 것, 그러니까
감각의 극단이 시이다(‘잠수함 속의 토끼’라는 비유가 있다). 감각의 제국 안에서 제왕은
단연 시각이다.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지할 때 사용하는 감각은 시각이 대부분이다(80퍼센트).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간다(혹은 비켜선다). 보통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쓰기는 단순한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보기(觀)이다.

“북쪽은 고향/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른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시인 이용악
(1914-1971)의 초기 시 〈북쪽〉 전문이다. 시 속에서 국경 근처 고향을 그리워하는, 국경
너머 팔려간 여인을 염려하는 시인의 눈은 마음의 눈이다. 그 마음의 눈은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는 지경까지 꿰뚫어보는 놀라운 시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이처럼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존재다.

그러나 시각이 감각의 전부는 아니다. 시각은 오히려 흘러넘치고 있다. 이용악 시대의 시각
과 21세기 후기 산업 시대의 시각은 크게 달라져 있다. 시각은 대량 소비 시대, 대중 문화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광고와 매체를 통해 인간의 눈을 포섭해,
인간을 소비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시각 패권주의’ 시대이다. 시는 시각으로부터 출발했지
만, 이제 시는 저 왜곡돼 있는 시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소비자의 눈을 인간의 눈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

주로 시각에 의한, 시각을 위한 인지와 소통은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배제하거나 왜곡한
다. 시각 과잉은 인간을 인간 자신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정현종의 시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던, 그리하여 그 섬에 가고 싶어하던 시대는 행복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터넷과 휴대 전화가 있는 이 시대에 인간을 시각 과잉으로부터 ‘구원’하는 여러 방법 가
운데 하나가, 시각 패권주의에 희생당하고 있는 나머지 다른 감각을 복원하는 것이다.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은 시각이 활동하지 않을 때에라야 활발해진다. 깊은 어둠 속에
누워 있어 보라, 얼마나 많은 소리가 들리는가. 제대로 맛을 낸 음식을 음미하는 미식가의
얼굴을 보라, 미식가는 눈을 감고 ‘음~’하는 탄성을 내지른다. 손가락도 촉감에 충실하고자
할 때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발표하는 시들에는 소리와 향기가 자주 등장한다. 나는 이 같은 변화를
시각 패권주의에 대한 시의 저항이라고 이해하고자 한다. 차창룡 시인이 최근에 펴낸 시집
〈나무 물고기〉에는 ‘똥은 꽃처럼 향기로워’(〈트리베니 가트에서 누는 똥〉)라는 놀라운
대목이 나온다.

이 시는 꽃을 똥의 차원으로 추락시킨다. (아름다운) 꽃이 상승이라면 (추한) 똥은 하강의
이미지인데, 이 상승과 하강을 똥의 형상(하강하면서도 결국은 상승을 의미하는 생김새)으로
일치시켰다가, 급기야 똥의 냄새를 꽃의 향기로 격상시킨다. 아, 얼마나 통쾌한가. 시각 패권
주의의 대표적인 아이콘인 꽃에서 똥의 향기를 ‘맡는’ 시인의 감각이라니. 황선홍의 월드컵
첫 골에 못지 않은 ‘감각적인 시’이다.


3 . 짧은 글을 읽어라

봄이여 눈을 감아라/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
병상일지 전문 5> 전문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시집이 많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시집을 받아 볼 높은 위치에 있다는
소리가 아니다. 시사주간지에서 오랫동안 문학 담당 기자를 했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보도
자료’로 보내오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다 동료, 선후배 시인들이 ‘부채의식’ 때문에 보내
는 시집들도 제법 있다. 시인들은 시집 받는 것을 ‘빚’으로 여긴다. 그래서 새 시집을 펴낸
시인들은 그동안 시집을 보내온 시인들의 명단을 놓고 한 나절 넘게 주소를 쓴다. 그동안 밀
린 ‘시집 빚’을 갚는 것이다.



보름달은
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
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 줍니다.

<달처럼> 전문


우편으로 시집을 많이 받다 보니, 몇 가지 요령이 생겼다. 출판사와 시집 장정을 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시집 맨 처음에 실린 시를 먼저 보게 된다. 그러고 나서 시집 맨 뒤
에 자리잡고 있는 시를 본다. 그 다음에 눈여겨보는 시가 짧은 시들이다. 시집 맨 처음과 맨
나중에 위치하는 시에 신경을 쓰지 않는 시인은 거의 없다. 첫번째 실린 시는 시집 전체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고(서시 분위기가 많이 난다), 마지막 시는 이른바 ‘앞으로의 계획’쯤
에 해당한다. 이렇게 두 편의 시를 읽고 나서, 짧은 시들을 골라 읽는다. 그러니까 서너 편
정도 일별하면 시집의 높낮이를 웬만큼 측정할 수 있다.

왜 짧은 시인가? 짧은 시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짧은 시에는 시인의 시력과 시야가 압축
되어 있다. 사물과 사태, 삶과 세계의 핵심을 치고 들어가는 직관력은 물론이고 직관한 내용
을 최소한의 어휘로 형상화하는 솜씨. 장악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파스칼이었던가?
‘시간이 없어서 짧게 쓰지 못했다’라고 말한 이가. 흔히 장시를 쓰는 데 시간과 공력이 많
이 들어가는 줄 알고 있는데, 모든 장시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서너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를 쓰는 데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 하이쿠를 쓰는 시인들은 수도승
못지 않은 삶을 살았다. 두 행짜리 하이쿠를 쓰기 위해 엄격한 규율을 지켰다. 4행짜리 게송
을 읊은 선승들은 또 어떻고).

‘봄이여 눈을 감아라/꽃보다/우울한 것은 없다.’(<병상일기 5>) ‘보름달은/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 줍니다.’(<달처럼>) 두 편 다 3행으로 이루어진 지극
히 짧은 시이다. 앞의 것은 김초혜 시인이 계간 <시와시학> 2002년 겨울호에 발표한 작품이고,
뒤의 것은 최종수 시인의 첫시집 <지독한 갈증>에 실린 시이다. 짧은 시는 비수라기보다는 번개에 가깝다. 하지만 사람들은 번개와 천둥이라고 하지 않고, 천둥과 번개라고 말한다. 번개와 천둥은 사실 동시에 발생하는데, 빛보다는 소리를 더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짧은 시는 번개다. 번갯불에 벼락을 맞기도 하지만, 한참 뒤에야 세상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병상일기 5>를 보자. 봄은 꽃의 계절인데, 봄으로 하여금 꽃을 보지 말라고 한다. 생명의
한 절정인 꽃에서 ‘우울’을 보았기 때문이다. 절정인 꽃은 곧 시들게 마련. 만개한 꽃 속
에서 꽃의 죽음을 본 것이다. 짧은 시는 이처럼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온갖 고정관념
(선입견)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뒤흔드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꽃, 기쁨)에서
죽음(우울)을 발견하는 눈! 시의 위력은 그 눈에서 나온다.

<달처럼>은 또 어떤가. 달을 빛의 양(동그란 정도)으로만 규정하고, 어둠을 빛으로 물리쳐야
할 악으로만 이해해 오던 우리에게 시인은 아주 새로운 견해를 제출한다. 어둠을 깨우는 것
도 중요하지만, 그 어둠과 함께 하는 벗 또한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 순간 어둠은 빛의 반대
진영에 있는 악이 아니라, 빛과 더불어 존재하는 동반자로 거듭난다. 어둠의 입장이 되어 보
자. 자신에게 위압적인 큰 빛(보름달)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작은 빛(초승달)이 훨
씬 더 애틋하지 않을까. 보름달이 혁명이라면 초승달은 연민(공감)의, 혹은 연대의 은유이리
라.

짧은 시를 많이 읽자. 짧은 시는 서너 번 읽으면 외어진다. 그렇게 외운 시는 삶의 여러 국면,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접점을 가지면, 시의 의미가 부풀어오른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친구가 있다면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라고 말해 보라. 큰 것, 힘센 것
만을 추구하는 선배가 있다면 어둠과 벗이 되어 주는 초승달 이야기를 꺼내 보라. 좋은 시는
짧은 시이고, 짧은 시는 우리들 구체적인 삶의 안쪽에 들어와 있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이메일을 띄울 때, 외우고 있는 짧은 시를 전송해 보자. 보내는 이나 받는 이의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스파크가 일어날 것이다.


4. 은유, 그 아슬아슬한 거리

지중해가 맑은 이유가 그 청년 때문인 것 같았다. 몇 년 전,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고 나
왔을 때, 주인공 마리오에 대한 기억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말라터진 바게뜨 빵을
연상시켰던 마리오는 너무 섬약하고 또 너무 순수했다. 그가 지중해의 청정함을 지키는 정수
기처럼 보였다.

마리오가, 잠시 섬에 체류하게 된 세계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전속 우체부’가 되면서 시
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네루다를 영웅화했다면, 네루다가 떠난 이후,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보낸 별이 반짝이는 소리까지 담은 ‘녹음 편지’는 전통적인 시(활자)의 시대를 마감하는
징후로 보였다. 시위 현장에서 마리오가 스러져가는 장면은, 네루다 혹은 시의 시대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 전에 본 영화여서 몇몇 장면만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네루다가 거두절미하고 ‘메타
포’라고 답하는 대목이다. 메타포, 은유. 그렇다. 은유가 시의 전부는 아니지만, 은유를 빼
놓고서는 시를 쓸 수도, 읽어내기도 쉽지가 않다. 은유는 시와 시쓰기, 시읽기에서 가장 핵
심적인 동력(전달 장치)이다. 직유를 거쳐 은유를 웬만큼 구사/해독할 수 있다면, 그는 괜찮
은 시인/독자이다.

직유는 주종 관계이다.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라고 쓸 때(결코 좋은 비유라고는 할 수 없
지만), 바람은 그가 달리는 상태를 구체화하는 보조 역할에 머문다. 하지만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라는 표현에서는 약간 달라진다. ‘그’와 ‘바람’ 사이도 그렇게 가까운 것은 아니
지만, ‘비’와 ‘쇠못’ 사이처럼 스파크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비와 쇠못 사이는 매우 먼
거리다. 일상적 차원에서 비와 쇠못은 거의 무관한 관계이다.

‘비둘기는 평화다’와 같은 상징은 아예 주종 관계에서 종이 사라진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
징으로 쓰이는 순간, 비둘기 고유의 정체성은 지워져 버린다. 상징은 상징에 동원되는 수단
을 지워 버리는, 매우 폭력적인 비유법이다.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울 때, 비둘기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상징이 종교와 신화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상징은 권력의 도구이다.

직유에서 주종 관계가 희박해질 때, 나는 그것이 바로 은유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직유가
술어(동사)를 거부할 때, 예컨대 ‘비가 쇠못처럼 달렸다’가 아니고, ‘비는 쇠못이다’로
변화할 때, 직유는 은유로 한 차원 승격한다. 그래서 나는 비유법을 자주 은유법이라고 이해
한다.

‘그대는 꽃이다’라고 쓸 때, 그대는 꽃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그대가 꽃을, 또는 꽃이
그대를 없애려고 하지도 않는다. 은유의 차원에서 그대와 꽃은 그대도 아니고, 꽃도 아닌 전
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은유의 위력이다. 내가 지지하는 은유는 다원주의에
바탕한 은유이다. 즉 하나의 절대적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모든 존재와 의미가 각자
하나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은유이다. 직유가 수직의 상상력이라면, 은유는 수평의 상상
력이다. 직유(혹은 상징)가 과거의 세계관이라면, 은유는 미래의 세계관이다. 공존, 상생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직유도 그렇지만 은유의 생명력은 비유되는 두 이미지 사이의 거리에서 나온다. 앞에서
예로 든 문장을 다시 불러와 보자.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 혹은 ‘그는 바람이다’라고
했을 때, ‘그’의 이미지가 선명해지지 않는 것은 바람이 갖고 있는 모호성 때문이다.
여기서 바람은 주어를 도와 주지도 못하고 동사에 기여하지도 못한다. 참신하거나 구체적
이지 않은 직유는 구사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상투성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 혹은 ‘비는 쇠못이었다’라는 표현이 위의 경우보다 조금 산뜻
한 까닭은 쇠못이 갖고 있는 구체성 덕분이다. 은유를 ‘A는 B이다’라고 흔히 말하는데,
A와 B의 사이가 너무 가까울 때 상투성으로 전락하고, A와 B 사이가 너무 멀면 난해함으로
빠진다.

네루다와 마리오 사이의 대화를 흉내낸다면, 시란 저 A와 B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이다.
그리고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저 A와 B를 결합시키는 비결은 (전에도 말했지만) 평소의
관찰력과 상상력에서 나온다. A와 B를 난데없이 연결시켜 강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직관력은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관찰과 상상의 누적이 없다면 은유의 직관은 불가능하다.

사족 같은데, 한 마디만 덧붙여야겠다(은유를 말하고 있으니까).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
선에 바늘을 찔러야, 풍선은 강렬하게 터진다.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 그것이 관찰과
상상의 상태이다. 그것이 깨어 있는 정신이다. 그렇게 깨어 있다면, 바늘(직관)은 얼마든지
있다. 불지 않은 풍선은 풍선이 아니다. 탄생 이전이거나 죽음 이후다.


<글의 출처 : 이명희 시인의 홈피에서.             http://staratte.cafe24.com/main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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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5-07-14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에오스님 ^^ 추천하고 퍼가요~~

클레어 2005-07-16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검정개님 ^^ 참 좋은 글이죠? 많이 퍼가세요.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