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문학과지성 시인선 608
유선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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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정은 “이 세상에 불행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천국에 있다고 믿게 될 것이라.”라는 시몬 베유의 문장을 신에 비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우월성이 바로 고통이라고 해석한다. 그런가. 슬픔이 인생의 디폴트 값이라는 걸 포장한다고 해서 견뎌지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아니 독자는 시 안에서 그걸 발견할 때마다, 아니 텍스트 안에 자기 고통과 슬픔을 언어의 감옥에 가둬버린다.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도 까마귀의 역설은 해결되지 않고 자기모순에 빠진 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여전히 각자 해결할 문제다. 헛된 희망을 버려야 오솔길이라도 찾아 떠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그러나 시는 현실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을 위한 위로일 뿐이다. 시가 스스로 시가 되려면 사랑 대신 멸종으로 바꿔 읽어야 한다. 그러면 시시하지 않다.

까마귀의 역설*

인간 중에도 인류학자가 있듯 새들 사이에도 조류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어느 날 조류학 분야의 저명한 교수인 까마귀 R의 실종 소식이 보도되었다. 수색 결과 한 장의 편지가 발견되었으며 아래는 R이 남긴 편지의 전문이다.

친애하는 까마귀 여러분께

내가 오랫동안 주장해오고, 이 사회에서 하나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주장입니다. 검은 깃털 색은 우리 까마귀종의 유구한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그것은 주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보편적인 진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내 날갯죽지 깊숙한 곳에서 흰 깃털 한 올을 발견한 것이지요.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의심했습니다. 내가 드디어 미친 것일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까마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물 중 하나입니다. 인간들은 그것을 미러 테스트라고 부른다지요. 흰색 깃털은 선명했습니다. 나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날개를 확인했습니다. 날이 지날수록 흰 깃털은 늘어만 갔습니다.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문장은 ‘모든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가 아니다’라는 문장과 논리적으로 동일합니다. 흰 우유는 까마귀가 아니고, 흰 종이는 까마귀가 아니고, 흰 눈은 까마귀가 아니지요. 처음에는 깃털을 하나씩 뽑아보았습니다. 피부가 벌게지며 부어올랐죠. 고통스러웠습니다. 흰색 깃털은 주체할 수 없이 많아졌고 점점 나를 뒤덮는 흰 깃털들을 보며 고민했습니다. 흰색을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 깃털들이 내 몸 전체를 덮게 되는 날이 온다면…… 누군가가 내 흰색 깃털을 발견해버린다면……

물론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이론을 수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론을 위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바쳤습니다. 전 세계의 까마귀들을 보러 매일을 타지로 날아다녔고, 셀 수 없이 많은 동족의 시체를 해부해버렸죠. 그동안 저에게 지친 배우자와 자식들은 등을 돌렸고 나는 가정의 파탄을 명성과 맞바꾸었습니다. 유력한 정치가들도 나에게 자문을 구했죠. 이 이론을 포기하는 것은 나에 대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것을 완전히 증명했다고 믿습니다. 그 이론은 제 인생 그 자체이며, 나는 흰 까마귀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벌써 내 몸의 반절을 흰색이 덮어버렸습니다. 이제 더이상 깃털을 뽑는 방식으로 이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깃털을 뽑은 자리에서 난 피를 닦는 일에도 이젠 지쳤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까마귀가 아니다.

이제 나를 까마귀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나는 분류될 수 없는 하나의 이상한 생물입니다. 여러분도 흰 까마귀를 발견하고 상식을 수정하는 불쾌한 일을 겪기를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따라서 저는 눈이 가득한 북쪽으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완전히 하얘진다면………… 그곳에서는 아무도 저를 찾을 수 없겠지요. 거울에 비친 나는 투명해질 것입니다. 미러 테스트도 소용이 없도록 말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저의 이론을 수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까마귀가 아니고 따라서 여전히 모든 까마귀는 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젠 정체를 알 수 없는 R이

* 이 시는 철학자 카를 구스타프 헴이 가설의 귀납적 입증에 관해 제시한 '까마귀 역설'과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이 남겼다고 알려진 "새에게 조류학이 유용한 만큼 과학자들에게 과학철학이 유용하다"라는 발언의 영향 아래에서 씌어졌다. 실제로 파인먼이 이러한 발언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철학적 좀비’는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가 1990년대에 제기했던 사고실험이다. 심리철학 분야에서 이론적 아이디어로 제시한 이 말은 외면적으로는 보통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지만 내면적인 경험이나 의식이 없는 인간이라는 설정. 현대인을 향한 조롱과 비난이 아니다. 물론 유선혜가 자기 시를 읽는 독자를 향해 날린 어퍼컷도 아니다. 그래도 두근대는 가슴팍, 조금 빠른 심박수, 조급한 박동이 없는 나와 너는?

빈맥

아이들은 놀이터가

철거될 예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네를 탄다 숨이 찬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교복의 색이 다른 중학교로 흩어지면서

사인펜으로 쓴 롤링 페이퍼를 만지작거리고

동물은 인간보다 수명이 짧다는 걸

자기 전마다 생각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아이들

두근대는 가슴팍을 식히며

이별이라는 단어를

이해해본 적이 없다는 듯이

끝을 상상하는 능력을 모두 잃은

사랑을 시작하는 심장은

조금 빠른 심박수를 가졌다

나쁘다는 것도 모르고 아름답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소방차가 줄지어 달린다는 사실에

신이 나는 것처럼

성당의 양초를 쓰러뜨리고 간 사람을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할아버지의 병실 의자에 앉아서

귤껍질을 까며 미래를 조잘거리는 아이는

어른이 된 자신을 보지 못하는 그의 병명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고

사랑을 시작하는 심장은

졸업식에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난

혈관이 튀어나온 손등을 제멋대로 상상한다

죄다 끝나버린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조급한 박동으로 뛰어나가고

넘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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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
브야사 지음 / 여래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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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양으로 승부하던 아날로그 시대를 지나 이제는 인간의 고유한 창조성이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정보 처리 능력이 아니라 정보 편집 능력으로 평가받는 상황에서 인문학적 소양과 내면의 가치를 강조하는 기업이 점점 늘고 있다. 현실적인 목적이 아니더라도 자기 삶의 목적과 가치가 단단한 사람은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으며 불안한 세상에서 중심을 잡으며 살 수 있다.

『바가바드 기타』는 오래된 인도의 경전이다. 이 책은 힌두교라는 특정 종교의 교리나 요가의 수련 방법이 아니라 삶의 지침서로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찬란하고 무용한 마음 공부의 한 방편으로 크리슈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새로운 눈으로 ‘나’를 돌아보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앎의 궁극 목표인 ‘나’를 찾는 것이 참다운 지혜다. ‘나’ 아닌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은 무지다.”(제13장 11절) 이런 문장을 곱씹다 보면 홍자성의 『채근담』에서 삶의 지혜를 얻듯이 자기 수양과 마음 챙김의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다가 문자로 기록된 고전들이 대개 그러하듯 바가바드 기타는 정본에 대한 논쟁이 많고 전하는 사람마다 그 의미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한다. 여기서는 최근에 출간된 책을 소개하지만 여러 판본을 살펴 마음에 드는 책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바가바드 기타는 전체 1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르주나의 번민에서 시작해서 해탈에 이르는 과정으로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의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민족과 지역에 따라 역사, 문화, 전통이 다르게 발전해 왔다. 시대와 상황을 고려하여 이질적인 요소를 걸러내고 인간의 삶과 세상 사는 이치에 대한 부분에 집중한다면 이 책에서 색다른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네트워크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고독과 마주하는 혼자만의 시간은 현대인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때때로 돌아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한 대로 살기 위해서는 물질과 육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정신과 마음의 영역을 돌볼 필요가 있다.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는 공부에 집중한다면 중년 이후의 삶에서 조금 다른 의미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에서 주인으로 살려면 세상일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세상일에 얽매여 분주한 사람은 결코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한다.(取天下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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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고 무용한 공부 - 내면의 삶을 기르는 배움에 대하여
제나 히츠 지음, 박다솜 옮김 / 에트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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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호기심과 질문의 동물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밤하늘의 빛나는 별빛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우리 삶에 의미가 있는지 등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 작은 호기심이 과학기술 발전의 바탕이며 철학적 탐구의 시작이었다. 인류가 찬란한 문명을 이뤄 현재에 이른 과정은 정말 놀랍기만 하다. 앎을 향한 욕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본능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지만 우리는 대체로 현실에 적응하며 하나둘씩 질문을 잃어버리고 산다.

주입식, 강의식 학교 교육에 익숙한 기성세대에게 ‘공부’는 인내와 고통에 가까웠다. 경쟁과 점수로 각인된 공부는 암기와 동의어로 인식돼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평생 배움의 연속이다. 음식을 만드는 레시피부터 핸드폰의 새로운 기능을 익히는 일까지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은 나이와 무관하게 매우 소중한 기쁨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지겨운 공부가 끝나는 게 아니라 자유롭고 재밌는 진짜 공부가 시작된다.

공부의 시작은 관심이다. 인생의 목적지와 방향에 맞춰 사람들의 관심사는 계속 변한다. 진학과 취업, 결혼과 자녀 교육, 부동산과 주식, 건강과 죽음 등 나이와 삶의 단계에 따라 현실적인 관심도 바뀐다. 생애 주기별 평생 교육은 21세기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필요에 의해 자기에게 맞는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직업을 찾고, 학위를 받고, 승진을 위한 공부 등은 우리가 경험하는 매우 현실적인 공부다. 이런 종류의 공부는 생존을 위한 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도유망한 철학자이자 교육자로 20년 넘게 대학교수로 일하던 제나 히츠는 순수한 지적 욕구가 넘쳤던 시절을 지나 어느새 위계와 경쟁에 익숙해져 ‘배움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학계를 떠나 캐나다 동부 외딴 숲속에서 노동과 봉사를 수행하며 ‘작고 평범한 인간의 삶’을 실천한다. 그리고 성공이나 생산성으로 평가할 수 없는 자기 성찰과 진정한 가치에 대한 고민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책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과 사물을 향한 관심이 인간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진짜 공부가 아니냐고 묻는 듯하다. 금전적 이익을 계산하지 않는 배움, 나를 돌아보며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태도야말로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가 아닐까. 중년을 넘어 은퇴한 이후에도 내면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인생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평생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았는지, 노후 준비를 위한 자산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도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충고가 떠오르는 저자의 이야기가 새삼스레 삶의 의미와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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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1조, 파시즘을 쏘다: - 세계 15개국 헌법으로 본 민주주의의 얼굴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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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임명직이 아니다. 자격시험도 없다. 그러나 언론은 유형, 무형의 권력을 누리기 시작한 지 오래다. 레거시 미디어는 비판과 감시 기능 대신 행정, 입법, 사법 혹은 자본 권력과 공생 관계를 이뤄, 아니 기생한 지 오래다. 인터넷과 함께 뉴미디어 시대가 열렸고 순기능과 역기능이 혼재하는 현실에서 필터링은 이제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 듯하다. 필터 버블 현상을 극복하려는 노력 없이는 길들어진 관점으로 살 수밖에 없다. 비판적 사고력은 주체적인 삶을 위한 필수 도구다. 생각의 근육은 헬스장에서도 기를 수 없다. 학력과 상관없는 사유 능력과 판단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검찰과 사법부의 부패는 공화국을 위태롭게 하지만 그들의 거대한 카르텔은 진영의 논리로 해결하기 어렵다. 감시와 처벌은 요원하고 제 기능을 상실한 공권력의 해악은(아니 그 제도를 운용하는 자들이 스스로 권력기관이라 착각하는) 일상생활 곳곳에 침투하여 타인과 세상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흔들고 공동체의 질서와 규범에 균열을 일으킨다. 어쩌면, 동서양의 역사를 막론하고 기득권의 공고한 암묵적 카르텔보다 무서운 건 그 카르텔에 편입하기 위한 각자도생의 경쟁이 아닐까. 상식과 공동체의 질서는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대체로 상식과 진리는 단순하고 간명하다.

변화와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고 온건주의자와 혁명가들의 충돌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진영을 넘어 삶의 태도와 방향으로 나타난다. 직업과 나이, 성별과 지역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이성적 판단 능력과 논리적 사유의 문제다. 허나 현실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해석’의 문제로 귀결된다. 어떤 현상에 대한 관점과 인과 관계가 엇갈리면 더 이상 토론과 합의는 가능하지 않다. 최소한의 합의로 굴러가는 민주정과 법치는 보이지 않는 ‘선line’이 존재한다. 진보와 보수는 단순한 관점의 차이다. 오프사이드offside 룰을 어겼는지에 관한 심판 판정에 불만이 있을 수는 있으나 오프 사이드 라인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다를 수는 없다. 타인과의 갈등, 세상에서 벌어지는 부패와 범죄를 ‘해석’의 문제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대체로 질서를 위반하고 범죄를 저지른 자일 확률이 높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근대 국가의 틀을 형성하면서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합의한 하한선, 마지노선, 최저선이 헌법이다. 말하자면 최소한의 합의에 해당한다. 링 위에서 상대 선수의 귀를 물어뜯은 타이슨도 있고, 박치기로 상대 선수의 코피를 터트린 축구 선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 패배자가 되고 더 이상의 게임은 무의미해진다. 현실이 스포츠와 같을 수는 없으나 진영 논리에 갇힌 사람들의 주관적 해석과 갈등 국면에서 각자의 억울함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헌법이 그 판단 기준이라면 현상과 사건을 해석하는 헌법재판소는 또 어떤가. 또다시 제도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로 환원되는 걸까.

온 국민이 헌법을 공부하는 시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시작하는 대한민국 헌법을 다시, 각자 ‘해석’해 보자. 이 문장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의미일까. 유행처럼 출판된 헌법 관련 책들이 차고 넘친다. 법과 관련된 책들을 꾸준히 읽어 온 사람도 새삼스럽게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다. 박홍규 선생님의 책을 집어든 건 순전히 개인적 취향이겠으나 ‘파시즘’이라는 키워드로 대한민국의 헌법을 살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 15개국의 헌법을 살피면서 다시 한번 정치가 아니라 각자의 삶과 현실을 점검해야 한다. 법은 법률가들의 소유가 아니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기준과 합리성을 바탕에 둔 법률이 아니라면 언제든 수정 가능한 약속에 불과한 법의 적용 문제는 무지의 베일이 적용돼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담긴 이야기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와 방법을 각자 점검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숨 쉬는 공기는 물론 내 몸의 뼛속까지 정치적이다.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언제든 바꿀 수 없다면 자기 도그마에 갇혀 살 수밖에 없다.

비교는 절대적이고 고정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상대적 관점을 갖게 하는 것이고, 이로써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그 여러 가지에 내재하는 공통된 보편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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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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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무렵,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었다. 이후로 어떤 동물도 키워본 적이 없다. 202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약 15%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다. 개, 고양이, 물고기, 거북이, 새…….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자기 가축화’에 성공한 동물들의 생존 전략을 소개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친화력과 협력을 기반으로 진화했다. 이 ‘친화력’은 생존에 필요한 요소로 작용했으며, 특히 개의 경우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특화돼 있다. 노력보다 본능에 가까운, DNA에 새겨진 ‘다정함’은 무엇일까. 이해와 배려, 친절과 웃음을 넘어 희생과 이타적 태도까지 확장할 수 있는 우리 편을 향한 다정함은 다른 집단에 대한 공격성과 혐오로 표출되기도 한다. 나와 다름을 확인하거나 생각이 다르거나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돌변하는 선택적 다정함도 본능일까.

그러나 인간과 달리 맹목적 다정함 덩어리처럼 보이는 강아지 앞에서 사람들은 무장 해제되곤 한다. 격일로 가는 헬스장에 소설의 주인공 비숑 프리제를 똑 닮은 강아지 한 마리가 회원들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적극적으로 손 내밀지 않고 멀리서 손을 한번 흔들어 주고 눈인사만 하는 사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설 때 고개를 들어 눈길을 주는 그 강아지가 있는 날과 없는 날은 헬스장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고 느낀다. 말없이 게으르게 엎드려 조는 모습이 가장 보기 좋다. 이 소설을 읽은 후부터 그녀석을 속으로 이시봉이라 부른다. 일상에서 만나는 실제 강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읽으면 이 소설을 즐기는데 도움이 된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알바 공작부인》은 흑백으로 실려 있어 이시봉을 구체적 이미지로 떠올리기 쉽지 않다.

소설은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스페인 카를로스 4세와 왕비와 재상 마누엘 고도이 그리고 알바 공작 부인 등 실존 인물과 역사를 속에 스며든 이시봉의 족보 추적기 그리고 만 스무 살 알콜 중독자인 이시습과 정채민의 앙시앙 하우스 등 대한민국의 현재 이야기. 소설에 한 번 등장하는 라흐마니노프 첼로 소나타 G단조에 어울리는 소설 속의 소설을 읽는 액자 구성은 익숙하지만 또 하나의 재미다. 500쪽이 넘는 장편의 지루함을 덜고 색다른 서사에 힘을 보탠다. 어느 쪽이든 이야기를 끌어가는 능력과 재미는 언제나 글 쓰는 이의 몫이 아닌가.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부터 『눈감지 마라』에 이르기까지 이기호가 보여준 재치 있는 문장과 대상을 향한 다정함이 곳곳에 묻어있어 평소 그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넉넉하고 흐믓하게 즐기기 충분하다.

스페인 왕가의 치정극, 비숑 프리제와 얽힌 비화는 고야와 알바 공작 부인의 실제 관계를 알지 못해도 정채민과 박유정과 김상민의 관계를 통해 반복 재생되는 일들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시봉의 주변 인물들인 이시습, 정용, 수아, 리다는 정채민과 앙시앙 하우스 사람들과 다르다. 한발 떨어져 나를, 아니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객관적 시선은 불가능할까. 소설 속 허구의 인물들이 언제나 상징과 알레고리로 작동하는 건 아니다.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하면 충분하지만 긴 여운을 남기거나 현실 속의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인간은 다양한 상황에서 각각의 면면이 드러나며 다채롭게 반응하지만 소설에서 만나는 입체적 인물은 반갑지 않을 때도 많다. 소설에서는 일관된 캐릭터가 오히려 마음 편한 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그리고 가수는 노래로, 배우는 연기로, 작가는 책으로 만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이기호가 키우는 이시봉을 확인하거나 다른 호기심을 충족한다고 해서 소설이 더 재밌거나 감동이 배가 되지는 않는다. 현실과 픽션의 경계가 모호할 때,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상상력을 즐기는 게 더 낫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겠으나 문학은, 아니 예술의 목적과 역할은…….

명랑한, 짧고 투쟁 없는 삶이라는 이시봉에 대한 규정이 반려견을 향한 일반적, 아니 ‘다정함’이 주는 가장 큰 장점이 아닌지 싶었다. ‘개새끼’라는 욕설부터 ‘개 같은, 개만도 못한’ 혹은 접두사로 쓰이는 ‘개~~’ 등의 표현에 이르기까지 ‘개’는 반려견이나 강아지와 달리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시봉은 이씨 성을 가진 집안의 가족이다. 동물을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소설을 인간 삶에 대한 깊이와 무게를 느끼거나 예리한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돌아보지 않는다. 각각의 소설은 나름의 목적과 이유가 분명해야 좋다. 이시봉이 사형집행인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마치 점심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이제까지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급식실을 향해 돌진하는 고등학생처럼”이라고 묘사하는 이기호의 유머와 재치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1808년 스페인 민중봉기에 관심을 갖고 유럽 역사를 다시 들여다봐도 나쁘지 않다. 소설은, 아니 모든 책은 각각의 독자에게 전혀 다른 모습일 테니. 다만 나는 ‘그것’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이기호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성석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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