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다녀갔듯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295
김영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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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의 손길은 그것이 스치기만 해도 아름답다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김영태의 시는 아름답다. 이제 칠십의 나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간결하며 투명하다. 평생 미술과 음악, 무용 등 예술 전반에 관한 폭넓은 안목과 관심으로 삶을 이야기한다. 86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그를 처음 만났다.

  
한 아이는 꽃처럼
   밤에 피어 있다
   무척 두려울 것이고
   처음으로 꽃으로 밤에
   피고 있다

   장례식 날엔 비가 내렸다
   멜빵끈을 잡은 환도도 서 있다
   그 옆에 죽은 리스도 서 있다
   솔 답배를 거꾸로 물고
   불을 붙이는 사람도 있다.
   대여섯 명                                - ‘결혼식과 장례식’ 전문

시집 표지의 자화상의 변화 모습만큼이나 시간이 훌쩍 흘렀고 시는 더욱 새롭다.

  
하염없이 내리는
   첫눈
   이어지는 이승에
   누군가 다녀갔듯이
   비스듬히 고개 떨군
   개잡초들과 다른
   선비 하나 저만치
   가던 길 멈추고
   자꾸 자꾸 되돌아보시는가       - ‘누군가 다녀갔듯이’ 전문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에서 시인은 그의 전 생애를 말하고 있는듯하다. 세월의 무게가 아니라도 이 한편의 아름다운 그림을 상상해보면 삶과 죽음의 세계가 동양적 세계관에서 이야기 하듯이 이분법적, 불연속적 세계관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길고 가는 부드러운 곡선처럼 그렇게 하나가 되어 이어져 있는 느낌이다.

  
앞모습은 말을 하지만
   뒷모습은 말이 없다
   인간은 나이들어
   한 장의 뒷모습을 두고 간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다 지나간 뒤에
   남아 있는……           - ‘뒷모습’중에서

라고 말하는 시인의 뒷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제 생을 정리하고 마감하는 시편들이 곳곳에 보여 오히려 슬프다. 그것은 넉넉함이고 부드러움이고 편안함이며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슬프게 닿는다. 생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내면적 고백보다 오히려 무심한 듯 스쳐지나가듯 툭툭 내뱉고 던져놓고 모른척 하는 말하기 방식이 이제 비로소 김영태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더러운 것들 많은 세상에
   중광은 걸레처럼 살다 갔다
   미친 듯 반성하듯 붓 한자루로
   인사동 선천집
   토란국에 빠져다가 기어나온
   동갑내기 떠돌이 파계승은        - ‘괜히 왔다 간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고 말하며 이승에서의 삶을 ‘소풍’에 비유한 시인 천상병과 ‘괜히 왔다 간다’고 말하고 떠난 중광 스님, 이제는 김영태가 그 동갑내기 떠돌이 파계승을 추억한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는 것일 뿐이다. 모든 문학적 관심이 인간과 삶의 문제이겠으나 그 풀이 방식의 다양성만큼이나 늘 새롭고 반갑고 즐거운 것이 또한 문학이 아닌가.

  
앞머리 짧게 친
   화등잔만한 눈
   망사옷 속
   가슴을 숨기지 못한
   너무 시퍼런
   길이 만나는 곳
   너무 시퍼래서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르는
   저 스무 살!                         - ‘길이 만나는 곳’

  이 시를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싶다. 그것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길이 만나는 지점을 김영태는 스무 살 튀어 오를듯 젊고 신선한 여자의 가슴 속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싸구려 곁눈질이 아니라 놀라운 생명의 발견이며 생에 대한 열정일 것이다. 수많은 길들 속에 정답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처럼 내게 주어진 길을 Ч??열심히 걷다 지치면 쉬어 가리라.


200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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