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고요 문학과지성 시인선 312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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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을 만큼

사진은 계속 웃고 있더구나, 이 드러낸 채.
그동안 지탱해준 내장 더 애먹이지 말고
예순 몇 해 같이 살아준 몸의 진 더 빼지 말고
슬쩍 내뺐구나! 생각을 이 한 곳으로 몰며
아들 또래들이 정신없이 고스톱 치며 살아 있는 방을 건너
빈소를 나왔다.
이팝나무가 문등(門燈)을 뒤로하고 앞을 막았다
온 가지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밥풀을 가득 달고.
‘이것 더 먹고 가라!’
이거였니,
감각들이 온몸에서 썰물처럼 빠질 때
네 마지막으로 느끼고 본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동체(胴體) 부듯 욕정이 치밀었다.

나무 앞에서 멈칫하는 사이
너는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떤 모습으로든 우울한 날이 있듯이 어떤 자세로든 이제 인생의 황혼녘을 준비할 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황혼으로 비유된 늙음의 시간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인생은 공평하다고 주장한다. 사뭇 진지해 보이는 이 주장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거짓에도 불구하고 나이들어 죽어가는 모든 인간에게 느끼는 연민은 다를 수가 없다. 하얀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를 보고 느낀 욕정의 끄트머리. 그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정년을 마친 노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의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간다. 사물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공명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이다. 한발 더 다가갈수록 소리와 의미 사이의 긴장은 풀어지고 무화된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에 침묵보다 더 큰 소리로 내면의 풍경소리 울린다. 그 울림이 실어증의 원인이 되고 침묵의 극치라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실어증은 침묵의 한 극치이니

아 이 빈자리!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누구’가
의자 하나 달랑 남기고 사라지고
오랜만에 만나 사람이
그 ‘누구’와 무척 가깝지 않았어요? 물을 때
느낌만 남는 자리.
목구멍에 잠시나마 머물게 할 무엇이 나타나지 않는....
나름대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공터만 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설명이 불가능한 순간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소리로 표현되지 않는 침묵으로 전달되는 소리.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시인의 몫이다. 황동규 시의 편력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또 다른 시작인지. 외로움보다 즉물적인 ‘홀로움’을 내세운 이 작품이 그를 대변한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시인의 모습에서 나이를 읽어내기 보다 세상속에 풍경처럼 펼쳐진 사물들의 모습과 맑고 조용한 시선들이 만나는 명징한 소리를 읽어낼 수 있다면 <꽃의 고요>는 비로소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

홀로움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 더디게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지독한 반어가 독자들을 화자와 동일시한다. 봄이 짧다는 진술을 이해하는 독자나 느껴본 적도 경험할 겨를도 없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짧은 생에 대한 담담한 목소리가 오히려 슬프게 들린다. 그래서 ‘더딘 슬픔’이 무섭도록 빠른, 혹은 찰나와 같은 순간적인 슬픔으로 전달된다. 꽃이 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꽃이 ‘고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사는 것이 슬프다. 침묵하는 꽃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현실이 너무 차가운지도 모른다.

더딘 슬픔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처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06032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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